2화.
안수희.
이것이 원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었던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보육원에서 자라왔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열악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찾아냈으니.
바로 대중목욕탕이었다.
비록 작고 허름한 목욕탕이었지만, 그곳은 수희에게 있어서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보육원에서는 항상 친구들과 함께 비좁은 샤워실에 모여 싸구려 비누로 몸을 대충 씻어야만 했다. 그곳엔 제대로 된 목욕용품도, 몸을 충분히 씻을 넉넉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대중목욕탕에서는 널따란 열탕 안에서 몸을 노곤하게 지질 수도 있었고, 카운터에 판매되는 다양한 목욕용품으로는 온몸을 향기 나게 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때밀이.
때밀이를 처음 받아보던 그날, 안수희는 마치 득도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의 몸이 어디까지 깨끗해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경험한 느낌이랄까.
‘지금까지 내가 씻어온 건 다 가짜야. 때밀이, 이게 진짜다……!’
그런 안수희가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온 후 목욕탕 세신사로 취직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는 남들과 다른 천부적인 때밀이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안수희의 때밀이를 통해 손님들은 이전까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락의 시원함을 맛보았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녀가 때를 밀기만 하면, 그 어떤 손님이라도 제 마음을 무장 해제해 마음속 비밀을 수희에게 술술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수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신기한 능력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안수희는 오늘도 고객님의 등짝을 시원하게 밀어드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돌아 누우실게요, 손님!”
“언니 손 진짜 야무지다. 어쩜 이렇게 때를 시원하게 잘 밀어?”
“목욕업계의 황금 손이라고 들어보셨나 몰라……?”
“이 언니 진짜 재밌다니까? 아무튼 오늘 내가 했던 얘기들은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비밀이야!”
“암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친구 없어서 말할 사람도 없어요, 고객님. 하하하!”
“아유, 이렇게 성격 좋은 언니가 무슨 친구가 없어! 하여간 이 언니 웃겨!”
고객은 깔깔 웃으며 몸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이윽고 안수희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수희의 얼굴을 보곤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언니? 이제 보니까 내 딸하고 또래인 거 같은데. 대학생이었어?”
“아…… 저 대학 안 다녀요.”
“아니 왜?”
안수희는 살짝 당황했지만,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대학은 내년에 가려고요! 세신사로 일하면서 등록금 모을 거예요.”
“그래, 잘 생각했어. 그래도 너무 때만 밀지 말고 연애도 좀 해, 알았지?”
“에이, 제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죠.”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남자 만나, 잘생긴 놈으로다가. 남자는 그저 잘생긴 게 최고야!”
“그쵸, 잘생긴 게 최고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예약 손님들의 때를 모두 밀어드린 안수희는 밤늦게까지 목욕탕에 홀로 남아 마무리 청소를 시작했다. 막내 세신사로 입사한 후 으레 있던 일이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탕 바닥을 대걸레로 연신 문질러댔다.
“열심히 때 밀어서 나도 남들처럼 대학도 가고, 목욕탕 딸린 집으로도 이사 가야지!”
이것이 안수희가 고된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목욕탕 안에서 공짜로 목욕도 하고 돈도 벌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것.
그렇게 머릿속으로 제 미래를 상상해보던 안수희는, 그만 바닥에 놓여있던 비누를 발견하지 못했고.
“꺄악?!”
……비누를 밟고 미끄러져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던 향년 20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
이세계 역사상 가장 강대하다 불리는 카데베르 제국.
비덴비덴 남작령은 제국 안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아주 작은 영지에 불과했지만, 제국민들 중 이 남작령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제국 땅에서 유일하게 온천수가 솟아나는 관광 명소였으니까.
그러나 얼마 전,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온천수가 말라버리며 관광업에만 의존하던 비덴비덴 남작령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지질학자에 수질학자까지 모두 모여 조사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온천수가 고갈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작가 목욕탕을 찾는 고객들의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하지만 워낙에 능력 있는 수완가였던 비덴비덴 남작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온 가족이 다 함께 마차를 타고 수도로 향하던 길.
그러나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남작의 마차가 전복되며 비덴비덴 남작 부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외동딸인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만큼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그녀 역시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게 유일한 생존자였던 산수이 비덴비덴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혼수상태에 빠진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죽은 듯 잠들어있는 산수이를 보며, 유모는 하녀에게서 물수건을 건네받아 산수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산수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옆에서 돌봐온, 선한 인상의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다.
“우리 아가씨 얼른 일어나셔야 할 텐데…….”
이윽고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유모는 하녀를 방 안에 남겨둔 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모를 기다리던 집사가 서 있었다.
노쇠했지만 눈빛만큼은 충심으로 가득한 그가 모노클을 빛내며 유모에게 물었다.
“……차도가 있습니까?”
유모는 고개를 저었다.
집사 역시 한숨을 푹 내쉬며 걱정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인근 보다폰 백작령에서 수영장을 열었다고 합니다. 우리 남작님께서 하셨던 사업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더군요. 이전보다 더 많은 영지민들이 그쪽으로 이탈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이게 다 제가 대리인으로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께서 쓰러지신 마당에 집사님마저 계시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라고요.”
“말씀이라도 그리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더 늦기 전에 아가씨께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
두 사람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산수이가 잠들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유모가 집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맞다, 집사님. 혹시 그 괴담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비덴비덴 남작 가문에 악령이 씌었다는…….”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악령이라니요, 유모. 그건 항간에 떠도는 잘못된 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저택의 사용인들이 이곳을 그만둘 때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커먼 무언가를 봤다고 했었잖아요? 으으, 정말 귀신이면 어떡하죠?”
집사가 유모를 달래며 말했다.
“제가 더 알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모.”
하지만 그 역시도 제 선대부터 모셔온 비덴비덴 남작가의 앞날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잇따른 기괴한 현상들 때문에 이곳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남작가의 유일한 핏줄인 산수이 영애마저 잘못된다면 정말 비덴비덴 가문은 이대로 끝나게 될 터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산수이의 방 안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놀란 집사가 다급히 방문을 열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하녀가 그를 향해 답했다.
“아가씨…… 산수이 아가씨가 눈을 뜨셨습니다……!”
***
[……세신사여.]
목욕탕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던 안수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영혼이 허공 위로 붕 떠올랐다.
그녀는 목욕탕 바닥에 넘어진 채 죽어있는 제 육신을 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나 정말로 죽은 거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방금 전 사망하였죠.]
그 목소리에 놀란 안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눈부신 빛으로 뒤덮여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떤 여인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서 있었다.
“당신은, 천사인가요?”
[저는 목욕을 관장하는 신, 사우나스. 목욕을 사랑하는 당신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하여, 그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드리고자 합니다.]
“한 번의 기회? 그럼 저를 다시 살려주시는 건가요?”
그러자 사우나스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다시 살려드리기는 할 건데…….]
“그런데요?”
[이곳에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살려드릴 예정입니다.]
“다른…… 세계?”
사우나스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나의 사도가 되어 임무를 완수한다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드릴 예정이니, 아주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사우나스는 수줍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사우나스에게 안수희가 눈을 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할게요.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요!”
[오…… 이 넘쳐흐르는 열정! 역시 제가 인재를 제대로 골랐군요? 좋습니다. 그대는 앞으로 비덴비덴 남작가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부디 몰락한 그곳을 다시 온천 관광명소로 부흥시켜 주십시오.]
몰락 영지를 부흥시키라니.
‘으음, 신이 아니라 꼭 게임 퀘스트 주는 NPC 같긴 하지만…….’
안수희가 사우나스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기한은요?”
그 질문에 사우나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의 사도여, 목욕을 사랑하는 자가 왜 그런 질문을……? 본디 목욕의 진정한 철학은 한없이 늘어지는 데 있는 것. 천천~히 하십시오. 천천히…….]
“네? 아니 그럼, 제가 몇십 년이 지나도 사우나스 님의 미션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떡해요?”
[으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마친 사우나스가 살짝 하품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수희가 당황하여 물었다.
“아니 저기, 사우나스 님? 그럼 대체 저에게 이런 임무를 맡기시는 이유가……?”
[그건…… 천계의 목욕탕이 영 별로라.]
“예……?”
여태까지 호호 웃기만 하던 사우나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안수희에게 물었다.
[자, 그럼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나의 사도여?]
“아니, 저기! 잠깐만요! 사우나스 님……!”
아직 물어볼 게 산더미같이 많았다. 하지만 사우나스는 이미 그녀를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거품거품 보글보글 쓱싹쓱싹……! 빙의해라, 얍!☆]
“아니 그 괴상한 주문은 또 뭔데! 사우나스, 아니 이봐 목욕의 신 양반! 아,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깐!”
하지만 안수희가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눈앞은 이미 하얗게 점멸했고.
얼마 후 그녀는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의 몸에서 다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