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화.
비덴비덴 남작령에 위치한 이 유서 깊고 고풍스러운 목욕탕에는 제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공간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때밀이실이었다.
제국 최초의 세신사라 불리는 남작가의 여주인 산수이 비덴비덴은 오늘도 어김없이 초록색 때수건을 손에 끼운 채 고객님의 때를 밀어드리고 있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대리석판 위에 엎드려있던 중년의 여성 고객은 그만 참지 못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 거기 정말 시원…… 헉? 높으신 분께 제가 무슨 망언을!”
그녀는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산수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때만 벅벅 밀 뿐이었다.
“또 그러신다, 또! 때밀이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니까요?”
“하지만 귀한 분께서 저같이 천한 것의 때를 밀어주실 때마다 황송한걸요.”
“사람 몸에 귀천이 어디 있어요? 어차피 밀어보면 다 똑같이 때 나오는 몸뚱인데. 자, 그럼 이제 마무리할게요!”
그렇게 오늘도 보람찬 때밀이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온 산수이에게, 갑자기 남작저의 하녀가 달려와 다급히 고했다.
“주,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숨넘어가겠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괜찮으니 천천히…….”
“그분들이 또다시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산수이가 하녀에게 되물었다.
“설마 네 명 전부 다 온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줘요, 제발.”
하지만 하녀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가 맞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게다가 목욕탕 죽돌이…… 아니, 그 네 분께서 지금 한자리에 모여계신다고요!”
“안 돼! 그것만은 절대-!”
산수이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는 그 문제의 네 남자가 모여 있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
남성 목욕탕 안.
수많은 고객들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열탕 안에 홀로 앉아있는 한 매력적인 흑발의 청년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드래곤 종족인 그의 이름은 얀피르.
그는 오늘도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있는 얀피르의 곁으로, 곧이어 수려한 외모를 뽐내는 은발의 한 청년이 다가왔다.
휘온 에데카나.
그는 제국 유일의 공작이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열탕을 향해 가던 그는, 이곳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안 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탕 안으로 들어오면 분명……!’
휘온은 목욕탕 바닥에서 쓸려 내려가고 있는 더러운 ‘때’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열탕 안에 저자들의 때가 떠다니게 될 텐데!’
목욕을 사랑하지만 더러운 건 죽도록 싫었던 휘온은, 그렇게 열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애초에 산수이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중목욕탕엔 출입조차 하지 않았을 그였다.
그런 휘온의 망설임을 감지한 얀피르가 눈을 감은 채 그를 향해 뇌까렸다.
“유난 떨지 말고 얼른 들어와라, 휘온. 탕 밖에서 얼어 죽기 싫으면.”
“누가 유난을 떤다는 거지, 얀피르? 난 그저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을…….”
“준비운동 같은 소리 하네. 수영하냐? 네놈이 깔끔 떠느라 그런다는 거 이미 다 안다고.”
“영 틀린 말은 아니군. 네놈과 같은 탕 안에 몸을 담그기가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니.”
“아아 그러셔? 그럼 계속 그렇게 서 있든가. 네놈이 밖에서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다가 감기 걸려 뒈지면 나야 좋지 뭐.”
이렇게 훈훈한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였지만, 곧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목욕탕 안에 있던 모든 손님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놀라서 뒤를 돌아본 두 남자는 이윽고 목욕탕 입구에 서있던 근육질의 한 사내를 발견했다.
프리트 폰 카데베르.
제국의 황태자였다.
프리트가 금발을 휘날리며 걸어 들어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탕 안에는 이들 세 남자를 제외하곤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열탕 안에 들어와 얀피르의 옆에 앉은 프리트가 불쾌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감히 황족 앞에서 예도 갖추지 않고 도망을 쳐? 저것들을 단칼에 모조리 썰어버려야겠어.”
한편 텅 비어버린 남탕을 본 휘온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가 프리트를 뒤따라 서둘러 열탕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자꾸 그러시니까 사람들이 도망가는 겁니다, 저하.”
“난 그저 제국민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러 온 것이라고, 휘온.”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프리트를 향해 끄덕였다.
“그래 저하야, 잘 생각했어. 오늘은 꼭 목욕만 하고 가, 주인 찾지 말고.”
“말이 나왔으니 묻지. 산수이 그녀는 아직인가?”
그 말에 휘온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남작저 하녀에게 부탁해놨으니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째 그분이 보이시질 않는군요?”
휘온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모두가 도망 나가버린 이곳에는 그들 세 명을 제외하고는 썰렁한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프리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웃으며 벽에 몸을 편안히 기댔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없으니 잘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때, 휘온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열탕 한가운데의 거품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인영이 잠겨있던 것이다.
“저것은 설마……?”
그 인영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휘온이 물속에 손을 넣어 누군가를 휙 건져 올렸다.
휘온의 손에 잡혀 물속에서 나온 것은.
“루, 루헤 님?”
“흐아아암, 잘 잤다…….”
루헤 슈바츠발트.
마계의 대마왕이었다.
그는 제 길고 탐스러운 군청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휘온을 향해 예쁘게 웃었다.
그것은 마왕이라기보단 강림한 천사라 해도 믿을 만큼 선해 보이는 미모였다.
“루헤 님, 또 물속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겁니까?”
경악해 묻는 휘온에게 루헤는 대답 대신 길게 하품을 하며 끄덕였다.
프리트가 그런 루헤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놈은 왜 매번 물속에서 처자는 거지?”
“물속은 조용해서 잠자기 좋거든요. 그런데…….”
루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루헤를 보며 얀피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주인 아직 안 왔어. 그러니까 더 자라, 마족.”
“역시 드래곤들은 눈치가 빨라……. 그럼 전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루헤는 열탕 모서리에 기대어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얀피르는 루헤를 뒤로한 채 휘온과 프리트에게 입을 열었다.
“루헤 놈이야 마왕성으로 돌아가도 잠만 처자겠지만, 너희는 국정 안 돌보냐? 황태자랑 공작이란 놈들이 말이야, 맨날 목욕탕만 들락거리고.”
프리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드래곤. 나의 제국은 무탈하게 잘 굴러가고 있으니.”
휘온 역시 당당하게 받아쳤다.
“감히 네놈의 기준으로 날 평가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얀피르. 그리고 내가 여길 오든 말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이 목욕탕의 주인은 산수이…….”
“당연히 상관이 있지, 여기가 내 집인데.”
갑작스런 얀피르의 폭탄선언에 모두는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잠들어있던 루헤도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를 노려보았으니.
프리트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드래곤 너 설마…… 아직도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인가?”
“당연하지, 내 여잔데.”
그 말에 분개한 프리트가 눈이 뒤집힌 채 얀피르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감히 누가 네 여자야! 그녀는 황태자비가 될 몸이다, 이 드래곤 놈아!”
“황태자…… 비?”
그 단어를 들은 얀피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그의 몸에서 검은색 비늘이 솟아오르고 입 안에서는 송곳니가 길게 자라났다.
그가 프리트를 향해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황태자비야? 저하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결국 프리트와 얀피르는 목욕탕 안에서 거친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두 남자를 아연실색하며 바라보던 휘온이 루헤를 향해 간절하게 외쳤다.
“곧 산수이가 도착할 텐데……! 루헤 님이 좀 말려주십시오!”
하지만 루헤는 크게 하품을 한 뒤 나른한 표정으로 휘온을 향해 말했다.
“졸린데…….”
“그러지 마시고! 저 둘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건 오직 마왕인 당신뿐이잖습니까!”
“하지만…… 귀찮…….”
루헤는 세상 예쁜 미소를 짓더니 다시 크게 하품하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런 루헤를 보고 휘온이 다급히 외쳤다.
“루, 루헤 님? 루헤…… 야, 이 자식아! 도대체가 여기엔 정상인 놈이 없어. 다 미쳤다고!”
결국 휘온이 두 남자를 말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네 남자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작 그만!”
그 음성에 놀란 두 남자는 일순 싸움을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산수이!”
그 이름을 들은 루헤 역시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다시 물 밖으로 나와 외쳤다.
“수이……!”
하지만 산수이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네 명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분명 신성한 목욕탕 안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요?”
그때였다.
얀피르가 프리트를 놓아버린 채 열탕 밖으로 튀어 나가며 소리쳤다.
“주이이이인!”
그는 제 커다란 품 안에 산수이를 끌어안고는, 그녀에게 얼굴을 마구 비벼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커다란 한 마리의 대형견과도 같았다.
나머지 세 남자는 방금 전까지 피 터지게 싸워대던 얀피르의 모습을 떠올리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휘온이 혐오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저놈은 드래곤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야…….”
하지만 얀피르는 그들에겐 관심 없다는 듯, 계속해서 산수이를 향해 아양을 부렸다.
“주인, 핥아도 돼?”
산수이는 고개를 저었다.
“얀피르! 내가 저 세 명하고 싸우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
“벌칙으로 나 핥는 거 일주일간 금지.”
“일주일이라니! 너무 길어, 주인!”
하지만 산수이는 곧바로 프리트에게 몸을 돌려 그 역시 크게 혼쭐을 냈다.
“저하, 이렇게 자꾸 고객님들을 쫓아내시면 어떻게 해요?”
“억울하군.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하를 무서워하니까 앞으로는 황실 목욕탕을 이용하시라고요!”
프리트가 혼나는 모습을 보며 루헤가 크게 하품을 하자, 산수이는 그를 향해서도 다그쳤다.
“그리고 루헤 님! 또 물속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거예요?”
“…….”
“마왕성에 가시라고요, 제발! 마계 통치는 안 하세요?”
그녀에게 유일하게 혼나지 않은 휘온만이 목욕탕 안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휘온, 항상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산수이. 그대를 도울 수 있는 건 저의 기쁨…….”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하아, 이 세 명을 믿고 맡길 사람은 역시 휘온밖에 없네요.”
그 말에 휘온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산수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목욕탕만 드나드는 이 철부지 사내들을 어찌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법은 결국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빨리 때 밀어주고 내보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네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누구부터 때를 밀어드릴까요?”
그 질문에 네 남자가 동시에 손을 척 들었다.
“당연히 제국의 황태자부터지.”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시지요, 저하.”
“주인, 이놈들 때는 내가 밀어줄게. 넌 나만 밀어줘!”
“마계에서 여기까진 참 멀었…… 하아암…….”
산수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빨리 정하지 않으면 넷 다 안 밀어줄 거예요.”
결국 네 남자는 때밀이 순번을 정하기 위해 VVIP 때밀이실에 모여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이겼다!”
하지만 매의 눈을 가진 휘온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얀피르, 늦게 냈다. 다시.”
“내가 이겼군.”
그러나 프리트 역시도 휘온의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저하, 방금 몰래 보신 것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가위바위보는 끝날 줄 몰랐고, 결국 제비를 뽑아 순번을 정하기로 했지만 역시나 반칙과 술수가 난무했다.
“제가…….”
“루헤 님, 방금 마법을 쓰신 것 같습니다만?”
그런 네 남자를 바라보던 산수이는 때밀이실을 슬금슬금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순번이 정해지면 알려줘요……?”
VVIP 때밀이실의 문을 닫고 나선 산수이는, 재빨리 목욕탕 로비에 모여 있던 남성 고객님들에게로 달려갔다.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황태자 저하가 떠나셨으니 이제 다시 목욕탕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역시 해결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와아, 산수이 님 만세!”
산수이는 고객들에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불편을 겪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나가실 때 로비에서 잊지 말고 때밀이 할인권 꼭 받아 가시고요!”
이렇게 비덴비덴 남작가 목욕탕엔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