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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75화 (175/175)

제175화

파스스 흩날리는 백색 전광. 넝마가 된 몽마의 앞에서, 나는 사색에 빠졌다. PK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 광경을 보고 줄담배를 피워댔을 텐데. 아니면 이 꼴이 보기 좋다면서 경박하게 웃었으려나.

한때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던 적이 있었다. 비행기에 탈 때 신발을 벗고 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모르던 시절의 일이었다. 나의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던 존재. 내 삶을 자서전으로 남긴다면 챕터 세 개는 족히 가져갈 친구.

그때 약속했던 영원이 이렇게 깨지게 되는 걸 알았다면,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을까?

“……예솔아.”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작고 약했다. 잘하는 건 쥐뿔도 없었고, 지금처럼 내 감정을 대놓고 표현하지도 못했다. 친구라는 건 꿈만 같은 존재였다. 요새 널린 일진물 웹툰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학교는 작은 전쟁터였다. 볼품없어 도태된 개체를 굳이 자기 무리에 끼우려고 하는 동물은 없었다.

예솔이는 그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고, 그 뒤로도 쭉 내 옆에 있어준 친구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유일한 친구였고, 어떤 비밀도 터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 예솔이가 내게 손가락테크닉이 너냐고 물었다면, 나는 잠시 망설여도 끝내 맞다고 털어놓았겠지.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나 봐.”

나는 정체를 숨기고, 너는 종족을 숨겼지. 종족만 숨긴 것도 아니긴 해. 나와 함께한 함예솔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이젠 배신감도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집에 가고 싶다. 이 세계에 얽힌 모든 것이 날 괴롭게 했다. 영원한 우정은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한 존재에 의해 깨졌고, 우리는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네가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말을 멈추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맣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 용케 모습을 안 바꾸는구나. 너희 종족은 원래 형체가 없으니 모습을 바꾸면 적어도 고통은 없을 텐데.

인간이 되고 싶다고 했었나. 그건 한낱 생물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 애초에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한지부터 따져봐야겠지만.

막상 마지막으로 말하려니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손 위로 푸른 불꽃을 꺼내보았다가, 다시 거뒀다.

“너는 인간이 되길 바랐지만, 결국 인간이 되지 못했지. 그동안 내 친구로 살았지만, 사실 우리는 친구라고 말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감각. 남을 상처 주기 위한 말인데 왜 내가 상처입는 것 같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함예솔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니까, 네게 그 이름을 줄게.”

이름 없는 몽마가 걸어온 길을 보았다. 욕망한 것을 갖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온 존재를 보았다.

“네 묘비에 적을 이름이 함예솔이었으면 좋겠어.”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전투를 각오하는 게 쉬웠다.

아스모데우스의 기억 속의 나는 멋대로 그를 예솔이라고 불렀다. 그와 친구가 되기 싫다고 한 이유는 검은 눈의 내가 이 모든 것을 겪은 미래의 나이기 때문인 걸까.

아직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나가다 보면 모든 걸 알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 유일했던 친구를 보낸 오늘을 수없이 겪고 나면.

진실에 도달할 날이 올 거다. 반드시.

쿠구구궁-!!

이름이 없었던 몽마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해 온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모습을 바꾸지 않고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건넨 제안을 수락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푸른 불꽃을 떨구어 타다 남은 형체를 완전히 태웠다. 새벽 별처럼 푸르스름한 불꽃이 이 일대를 뒤덮는다. 욕망의 주인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으로 그 숨을 거뒀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영원히 나아가지 못할 낙원. 가장 이기적인 사랑을 꿈꾸던 존재가 그려낸 네버랜드.

유년기의 끝이었다.

* * *

【“그만 일어나지 그래.”】

나는 아주 긴 꿈을 꿨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퍼 자기나 하네.”】

두 개의 바다가 뒤섞이는 세상의 끝에서 얼굴 모를 누군가와 함께 걷는 꿈을.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이 두 개의 바다를 뒤섞어 하나의 바다를 만드는 꿈을.

【“그만 일어나.”】

두 개의 세계가 합쳐지는 꿈을 꾸었다. 어느 몽마가 멸망시키려고 했던 세계가 우리 세계와 합쳐지는 꿈. 바라지 않았던 합일의 도래.

“들리시나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는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따라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용사님.”

우리 엄마도 잘 땐 안 건드리는데 대체 어떤 미친 자식이 어깨를 흔드는 거야? 자는 거 안 보이냐고. 자는 거 안 보이냐고, 이 인간아.

“용사님. 세상을 구해야 해요. 지금 세상이 위험에 빠졌어요. 용사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감정 한 조각 실리지 않은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분명히 아까 들었던 목소리인데. 목 잘린 유령이 목을 붙이고 나타나서 낸 목소리 같은데.

“걔 안 일어나면 침대에서 밀어.”

“신하된 도리로 어찌 전하를 침상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겠어요.”

“자색 눈이 깨우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손으로 어깨를 흔들던 인간이 두 손을 뻗어 사람을 밀었다.

쿠당탕탕-!!

덮고 있던 이불에 말려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나는 이불에 둘둘 말린 채로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렸다.

“깼어? 깼으면 일어나서 밥부터 먹어.”

앞머리를 뒤로 넘겨 똑딱이 핀을 꽂아 놓은 편애가 이불을 걷어가며 말했다. 뒤이어 치고 들어온 건 양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 네정좋이었다.

“깨셨나요, 용사님?”

먹히지도 않는 용사님 타령을 하는 걸 보아하니 계속해서 어깨를 흔들던 건 네정좋이었던 모양이다.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

“목…….”

“목이 들어간 식사는 없어요.”

“그게 아니라 목이…… 붙어있네요.”

내가 아는 유주하 씨는 목 잘린 언데드인데, 이 유주하는 목이 멀쩡하게 붙어 있다. 목 잘린 모습을 하도 봐서 그런가, 목이 붙어있는 게 어색하기까지 했다.

“목 잘린 제가 나오는 꿈이라도 꾸셨나요?”

고개를 갸웃 기울인 네정좋이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표정도 오랜만에 보네. 내숭 100%의 향기가 난다. 환영 세계 안의 네정좋은 싸가지 만땅이었는데. 정말 본능적으로 기어야 할 상대를 알아차리는 사람이구나. 놀랄 기력은 없고 식상한 감탄만 나왔다.

“예. 목이 뎅겅 잘리셔서 그걸 주우러 다니느라 정신 없으시더라고요. 엄청 웃겼죠.”

다른 사람 속내를 읽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읽게 된 네정좋의 속내는 여전히 ‘어…….’ 였다.

내가 왜 여기서 눈을 뜬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밥을 먹으라니까 밥을 먹으러 가자. 자고로 한국인은 밥심으로 모든 일을 해치우는 거라고 했다. 뭐든 입에 집어 넣고 봐야 다음 일을 잘할 수 있다.

멋대로 이불을 걷어간 편애가 이불을 착착 개서 정리하는 게 보였다. 저러고 있으니까 가사일에 능숙한 악마 같아 보인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당연하지.”】

가사 능력이랑 살아온 세월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까. 나는 가사 능력과 살아온 세월의 상관관계를 주절거리기 시작한 악마를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침대와 간단한 가구가 놓여 있던 방을 나서자 널찍한 거실이 나왔다. 거실이 얼마나 큰지 저기서 테니스를 쳐도 될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실제로 테니스를 쳤다가는 여러모로 폐가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어디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탕-!

들어선 주방에서는 회칼을 든 러브리스가 싱싱한 생선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횟집 사장님이라도 되는 것 같은 신속함. 수산시장에 가게라도 내면 슈퍼 루키로 방송에 나올 것 같은 손놀림.

이름 모를 생선 하나를 완벽하게 썰어낸 러브리스가 다음 생선을 들었다. 나는 그 기막힌 광경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저기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네정좋이 생선 회 한 점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었다. 말없이 우물거리는 게 참 익숙해 보였다. 밥 먹으라고 하길래 주방 갔더니 횟집이 나왔는데요. 이거 맞냐.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횟감을 손질하던 러브리스는 내 질문을 받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셨나요?”

“예. 그런데요.”

“시장하실 텐데 드세요. 설명은 이따 자세히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에서 제일 늦게 나온 편애가 주방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식탁 의자를 빼줬다. 나는 식탁에 앉아 러브리스의 화려한 생선 해체쇼를 구경했다. 러브리스에게 저런 재주가 있는 줄은 또 처음 알았다. 재주가 저렇게 좋으면 헌터 은퇴해도 먹고 살 만하겠네.

여긴 어디고, 쟤들은 왜 여기 있고, 나는 왜 여기서 깼는가. 나는 러브리스가 내준 회를 집어 먹으며 질문할 것들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이 해체쇼는 네정좋과 러브리스의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생선 조달의 네정좋과 생선 손질의 러브리스 말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나 사이 좋게 협력하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수준인데.

“간장 어디 있어?”

“슈브한테.”

심지어 평범하게 대화까지 한다. 물론 사람은 밥상 앞에서 얌전한 게 도리라지만, 평소에 하도 싸워대던 인간들이라 이 광경이 놀랍기만 했다.

식사는 큰 트러블 없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에 러브리스가 서비스로 보여준 용 모양 사과를 보며 손뼉을 쳤다. 사과로 용을 만드는 솜씨라니.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걸까. 특성으로 만들어 준 팥빙수만큼 신기했다.

러브리스는 용 모양 사과를 먹으라고 줬지만, 승천하는 용 모양 사과를 어떻게 먹겠는가. 나는 사과를 거부하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설거지 담당은 편애인지 소파로 따라온 건 네정좋과 러브리스 두 사람밖에 없었다.

“색욕왕의 환영 세계에서 색욕왕을 처리하고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바깥 세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시겠죠.”

러브리스의 용 모양 사과는 결국 네정좋의 입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면 네정좋 입을 막으려고 저걸 깎아준 게 아닐까. 나는 러브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환영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전화를 받으셨었죠. 그때 뭘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기억하세요?”

“네. 그때 검은 눈의 짐승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은 눈의 짐승?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녹색 눈의 왕을 조심하라고 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검은 눈의 짐승이라니?

“전하가 환영 세계에 들어가고 나신 이후의 일입니다.”

두 손을 깍지 껴 잡은 러브리스가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분위기가 어쩐지 심각해지고 있었다.

“지금 저희 차원은 외부 차원과 불완전하게 이어진 상태입니다.”

그렇군. 듣고 보니 충분히 심각해질 만한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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