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푸르다 못해 새하얗게 빛나는 낙뢰가 하늘에서 빗발쳤다. 나는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섬광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이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눈이 멀 만큼 눈부신 전격의 폭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두 공간의 교차 지점을 바라보았다.
“특성을 되찾았네.”
하얗게 흩어지는 공간에 선 아스모데우스가 날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녹색 눈이 알 수 없는 열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뭐, 그렇지.”
이 세상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어느 인간은 결국 몽마의 한 끼 도시락이 되었다. 이전에 불타 죽은 누군가가 보면 탄식해 마지않을 결말이었다.
아니지. 결말을 단정 짓긴 아직 이른가. 나는 죽지 않았고, 이 세계의 주인 또한 남아 있다. 우리의 결착은 지금부터였다.
“널 죽일 거야.”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이기적인 사랑을 꿈꾸는 몽마의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종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고, 종족 또한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태생을 원망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한 세계를 멸망시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보다 못한 왕이었다.
[욕망의 주인을 맞이하라.
일어나라, 비천한 군중들이여. 욕망의 불꽃 속에 몸을 던져라.
권리를 위한 투쟁만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색욕왕의 군단이 외치고 또 외치던 말이었다. 비천하게 태어난 존재들의 투쟁.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그들보다 못한 왕이라니. 인간이 되겠다고 그를 찬미하고 경배하던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종족은 전부가 아니지. 너는 틀렸어.”
솔직히 말해서 이런 것은 한낱 인간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틀린 선택 때문에 세 사람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거짓뿐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네가 함예솔로 남기를 원했다면, 너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어.”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면, 끝내 진실된 모습을 비추지 말았어야지.
“또한 그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있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 모습으로 나와 만났어야 했고.”
색욕왕. 녹색 눈의 왕, 욕망의 주인, 몽마들의 왕, 가장 위대한 환영술사.
진정으로 나와 친구가 되기를 바랐더라면, 나를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차원을 멸망시키고 뒤늦게 인간이 되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아버렸는데.
“솔직히 네가 외부 차원을 멸망시키든 말든 나와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나와 관련이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지.”
나는 내게 피해만 없다면 어떤 일이든 눈감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못 보는 곳에서 누군가가 자행하고 있는 일이겠지. 그 모든 끔찍한 일을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경 쓰지 않는 게 훨씬 편하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네가 이번에 벌인 일은 스케일이 좀 커서 말이야. 내가 여기 갇힌 순간부터 신경 안 쓰기엔 글러 먹었어. 네 덕에 못 볼 꼴도 봤고, 뒤통수도 세게 얻어맞았지.”
그러나 종종 생각한다. 그게 옳은가? 눈 딱 감고 모른 척하는 게 옳은 일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양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거면 소소해서 눈 감아줄 수 있다고 해도, 차원 단위 스케일은 좀 아니지. 많이 아니지.
“결착을 내자.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싸워. 죽기 싫으면.”
왼손은 없지만 특성을 되찾아 튼튼한 몸뚱이는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여 극야를 불렀다. '보이지 않는 자'라는 수식어처럼 모습을 감추었던 극야는 내가 손짓하자마자 나타나 자신의 대낫을 쥐여 주고 사라졌다.
한 손으로 이걸 대체 어떻게 휘두르라고 주고 간 거지. 나이프 같은 거라면 모를까.
나는 극야의 대낫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대낫이 모습을 바꾸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크기가 줄어든 대낫은 나이프의 모습으로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나이프를 쥔 팔을 붕붕 흔들어보았다. 특성을 되찾아서 그런지 퍽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무기까지 준비되었으니 싸울 준비는 마쳤다. 극야는 모습을 감추었고, 네정좋은 어느새 사라졌고.
집요한 시선으로 날 쫓던 아스모데우스는 손톱을 허공에 그어 공간을 찢었다. 그의 뒤에 밀집해 있던 색욕왕의 군단이 모래처럼 사라졌다. 공간은 다시 그가 검은 눈의 인간과 처음 만났던 대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틀렸다고?”
녹색 눈이 무섭게 빛났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저런 눈빛이 아닐까.
“그럼 네가 옳다는 소리야? 넌 정말 진정으로 널 위하는 사람을 모르는구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아스모데우스가 짧게 탄식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나는 몰라.”
나는 한낱 인간이었다. 편애처럼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고, 극야처럼 회귀를 반복한 것도 아니었으며, 누구처럼 남을 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기준이 되기로 했어.”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면 항상 옳은 쪽이 되어야겠다. 공명정대함 따위 알 게 뭐람. 인간 사회도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손에 옳고 그름을 맡기는데, 그렇다면 같은 인간인 나도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쫄리면 뒈지시던가. 불만 있으면 말만 나불대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 그게 너희 차원의 방식이잖아?”
내가 아는 함예솔의 고운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도발에는 일가견이 있지. 작정하고 도발하면 다들 눈깔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저쪽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곧장 불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라. 날 죽이지는 않아도 이겨야겠다는 열의로 가득했다.
저쪽이 가진 것은 환영을 현실로 만드는 마법과 푸른 불꽃을 피우는 특성.
이전에 극야와 싸울 때 공간을 마구잡이로 바꾸었던 것은 그가 이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권리였다. 바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성가신 능력이었지만, 바깥에서 그를 상대하는 것보단 나았다. 바깥에서는 승산조차 없을 테니까.
특성이 돌아온 순간 느낀 건데, 이 안의 나는 바깥의 나보다 훨씬 강했다.
이 세계는 결국 아스모데우스가 만들어 낸 환영 세계. 그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세계다. 그리고 그가 싸워보았던 나는 검은 눈을 가진 일곱 악마의 계약자였지.
아마 나와의 전투라고 한다면 그의 뇌리에는 두 번이나 무참히 패배한 기억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함예솔과는 그렇게 싸울 일이 없었으니까.
아스모데우스를 죽이려면 지금뿐이었다. 바깥의 나보다 수십 배 강해져 있을 때. 지금밖에 없다.
콰지지직-!!
하얀 섬광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번개의 창. 무식한 타격음이 지상을 강타했다. 건축물이 파괴되며 흙먼지가 마구 흩날렸다.
공간을 비틀어 번개 창의 충격을 흡수한 모양인지 아스모데우스는 멀쩡했다. 나는 일그러지는 공간을 나이프로 베어 갈랐다. 극야가 아까 싸우는 모습을 보아준 덕에 대처가 쉬웠다.
나는 쉴새 없이 번개의 창을 떨궜고, 아스모데우스는 공간을 갈랐다. 푸른 불꽃은 내게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없었다. 신체 강화란 그런 특성이다.
공방은 너무 완벽하게 이어졌다. 흐름을 끊을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콰아앙-!!
눈부신 낙뢰의 폭격이 이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격을 쥐어 짜냈다. 공간을 잘라버리는 탓에 직접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근접전을 벌여야 하는데, 그것마저 공간을 접어 이동하니 마땅치 못한 상황.
전황을 바꾸려면 다른 요소가 필요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화염 덩어리를 바라보며 몸을 뒤로 물릴 준비를 했다.
쩌저적-.
상어 이빨 모양으로 갈라진 공간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집어 삼켰다. 그래, 저런 공간 특성이 있다면 접근이 쉬울 텐데 말이다.
……공간 특성?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극야뿐인데, 공간 특성? 극야는 전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으나, 공간 특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극야라고 해서 없는 특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텐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나는 화염 덩어리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다음 낙뢰를 준비했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앞으로 보내줄 테니까 거기서 조져요.”
메마른 사막처럼 갈라진 음성. 듣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섬뜩한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독 창백한 피부와 새하얀 입술, 얼기설기 꿰매놓은 목의 실자국과 뛰지 않는 맥박.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살아 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언데드라 해도 사람과 똑같이 기능한다면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지나치게 활기찬 어조였다. 언데드인 탓에 목소리 자체는 음산했지만, 신이 난 상태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를 언데드로 만들어 일으킬 만한 사람은 극야밖에 없으니 극야를 보고 온 것이겠지. 극야를 보고 와서 이렇게 신이 난 건가.
“그럼 부탁할게요.”
나는 나이프를 고쳐 쥐고 말했다. 네정좋은 내 등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엄호할게요.”
잡다한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우리 둘 다 각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죽음 너머를 보고 그 너머에서 돌아온 사람. 바깥의 네정좋과 다를 바 없는 특성을 가진 언데드 네정좋이 공간을 잘라냈다.
공간을 오려 이어붙이는 것은 찰나. 나는 끌어모은 전격을 나이프에 담아 아래로 내려찍었다.
하늘에서 춤추던 전기의 폭풍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응축되어 한 번의 휘두름에 실렸다. 끔찍하게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이 일대를 뒤덮는다.
대기가 샅샅이 불타며 거대한 울부짖음을 토해낸 지 몇 초 안 된 그때, 눈부신 빛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콰아아앙-!!
땅 깊숙한 곳까지 꿰뚫는 묵직한 감각. 눈이 멀 것만 같은 전광이 거짓된 세계를 밝혔다.
하늘을 찢고 땅을 불태우는 일섬. 진정으로 끝에 다다른 자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기적.
나는 하얗게 흩날리며 이 일대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잔해를 바라보며, 기적 같은 찰나를 되새겼다.
이 감각을 잊지 않고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바깥에서도 이만큼 강해질 수 있겠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였던 폭풍은 금세 잦아들었다. 나는 깊게 팬 땅을 내려다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