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차가운 눈보라가 끊임없이 몰아쳤다. 아스모데우스가 바랐던 영원은 이곳에 있었다.
봄이 오지 않는 겨울. 삶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한 영혼의 종착지. 낙원교의 미치광이들이 보았던, 죽음의 너머.
이곳은 그들의 차원이 멸망할 때까지 무너지지 않을 동토였다. 온기도 변화도 없는 땅. 썩지도 부패하지도 않을 땅.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이 똬리를 튼 지옥.
“여긴…….”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불쾌한 보라색으로 칠해진 하늘은 기후 변화 없이 잠잠했다. 눈보라가 대체 어디서 불어오는 건지 모를 하늘이었다.
“여긴 어디야?”
원초적인 공포가 등뼈를 타고 기어올랐다. PK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는 게 멘탈에 좋지 않을까?”
나는 얼어붙은 땅을 발로 걷어차며 대답했다. 단단하게 얼어 있었지만, 미끄럽지는 않았다. 낙원교 사람들은 이런 곳에 홀로 떨어졌던 건가. 용케 미치지 않고 살아 돌아왔구나.
산 자의 온기를 바라는 망자가 개미 떼같이 몰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몰려오는 것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저걸 다 합치면 고스트 군단을 만들 수 있겠는데. 차원 정복도 가능할 것 같다.
사령술사의 기본이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임을 생각해 보자. 망자가 가득한 이 동토는 간단하게 말해 극야의 무기 창고 같은 것이었다.
아스모데우스도 그것을 아는지 공간을 뒤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영원한 동토는 다른 공간으로 바뀌고 또 바뀌기를 반복했다.
“죽음에 저항하는 죽음이라. 우습지 아니한가?”
공간을 뒤바꾼 아스모데우스가 조소했다. 극야는 무표정한 낯으로 그 말을 받아쳤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 큰소리 치는 꼴이 우습구나. 네 영혼은 이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 처박아줄 테니 도발할 필요는 없다.”
대전으로 바뀌었던 공간이 다시 동토로 바뀌었다. 내가 지금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을 보는 건지, 아니면 4D 영화를 보는 건지 이렇게 구분이 가지 않을 수가 있나.
작열하는 푸른 불꽃이 흩날리는 눈보라를 따라 춤췄다. 모든 것을 녹일 것처럼 뜨거운 열기. 온기에 굶주린 망자 떼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저런 것일까. 생명력을 불태워 짜낸 불꽃은 새벽에 빛나는 푸른 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얼어붙은 대지마저 녹이는 불꽃이 질퍽한 땅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틈을 타고 솟구치는 불꽃.
“피해!!”
넘실거리는 불꽃이 PK의 살갗을 태웠다. 몽마가 가진 힘의 원천은 생물의 정기. 극야가 망자뿐인 이곳을 결전지로 고른 이유는 이곳이 그의 홈그라운드라는 이유도 있지만, 아스모데우스가 정기를 회복하지 못 하게 하려는 이유가 더 컸겠지.
불꽃에 닿은 PK의 왼쪽 팔이 모래처럼 사르륵 흘러내렸다. 딱 불꽃이 닿은 부분만 그렇게 변했다.
“괜찮아? 뒤로 가 있을래?”
나는 PK의 앞으로 뛰쳐나오며 물었다. PK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각오 안 한 것도 아니고.”
발밑으로 엉금엉금 기어온 망자가 PK의 발목을 확 잡았다. 동시에 어깨를 파드득 떠는 PK.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그가 한껏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의연한 척하고 있는 거구나. 하긴 처음부터 유령에 민감했던 그였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망자들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좋아. 그럼 반격을 시도해볼까.”
저쪽은 하나고 이쪽은 셋. 극야가 맨 앞에서 어그로를 끌어주고 있으니 충분히 도전해볼만 했다.
그들의 싸움은 멀리서 봐도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두려울 것 없었다. 저 두 사람은 나를 죽이지 못할 테니까.
죽진 않아도 죽을 만큼 아플 수는 있겠지.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게 어디인가. 나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등지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갈 테니까 공격을 막아줘. 눈치 봐서 몸 사리는 거 잊지 마.”
“앞으로 갈 거면 같이 가.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서? 그럼 여기서 죽나 이따 죽나 그게 그거지.”
눈가를 찡그린 PK가 앞으로 함께 나섰다. 나는 손을 벌벌 떨고 있는 PK를 보며 킥킥 웃었다. 저건 대체 어디서 나온 깡이람. 유령 하나에 벌벌 떠는 쫄보 주제에.
“그러다 죽으면 난 모른다.”
“생명 보험 들어놨으니까 가져가던지. 이제 너 아니면 탈 사람도 없어.”
PK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도 아닌데 생명 보험을 어떻게 타. 나는 PK의 어깨를 툭 치고 위를 향해 손짓했다. 몸이 위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콰광-!!
두 사람의 공방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불꽃과 얼음이 맞부딪힐 때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덕에 이 근방에는 희뿌연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매체 속 사신처럼 대낫을 든 극야가 일그러지는 공간을 잘라냈다. 아스모데우스의 환영은 현실에 구현되는 족족 잘려나가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공격하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환영을 구현하려고 하면 잘라버리고. 극야는 아스모데우스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었다.
“밑으로 내려갈 거야. 받쳐줄 수 있어?”
“나도 같이 내려가?”
“그건 알아서 해.”
그리고 우리는 이 전투의 불청객. 있으나 마나한 인간들.
휘이잉-.
거친 바람이 불어오며 안개를 몰아냈다. PK와 나는 극야와 아스모데우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손가락 끝으로부터 피어오른 불꽃이 주먹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이쪽으로 튀어오른 얼음 조각이 PK에 의해 허공에 멈춰 섰다.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바로 앞에서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푸른 불꽃이 흩날리며 궤적을 남겼다.
직격하면 나이스, 아니면 쪽박.
꽤나 놀란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모데우스가 불꽃을 피워 내게 맞섰다.
내가 빌려 사용하고 있는 이 특성은 본래 그의 것. 확 타오른 그의 불꽃이 내가 피운 불꽃을 좀먹고 자랐다. 나는 내 주먹 근처에서 잡아먹힌 불꽃이 어깨를 지나 PK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치이익-.
급하게 튄 불똥이 손바닥을 집어삼키고 흘러내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PK가 경악하며 외쳤다.
“너 제정신이야?!”
생명을 불태우는 불꽃이었다. 나는 모래처럼 흘러내린 왼손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손 없다고 안 죽어.”
이런 상황에서는 절단면이 말끔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 피가 철철 흘렀으면 무조건 병원행일 테니까.
지금 가진 특성은 이것뿐인데, 본래 주인이랑 싸워야 하는 탓에 쓸 수가 없네. 나는 통각이 마비된 절단면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럼 무엇으로 싸워야 하지?
“연희야…….”
울상을 지은 아스모데우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다가오는 손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충격에 빠진 녹색 눈이 제법 볼만했다.
극야와 아스모데우스의 싸움은 분명히 극야 쪽이 우세했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극야가 승리했겠지. 아스모데우스는 언젠가 정기를 다 소모하고 마니까.
하지만 나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그를 죽여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인간이 아니어서?”
분노로 절절히 끓는 녹색 눈이 보였다. 아스모데우스의 뒤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세계가 출렁거렸다.
“종족. 그래, 종족은 중요하지.”
일그러진 공간 틈으로 거대한 손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어지럽게 떠드는 목소리들과 잔잔하게 흐르는 비명과 탄식.
절반은 망령이 가득한 동토, 절반은 수를 셀 수 없는 군세가 집결한 땅.
환영으로 구현된 왕의 군단이 하나된 목소리로 외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내 곁에는 모든 것을 아는 악마가 있었다.
【“욕망의 주인을 맞이하라.”】
낫을 거꾸로 쥔 극야가 망자들을 일으켜 세우며 읊조렸다. 죽은 이들로 구성된 군대가 왕의 군단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비천한 군중들이여. 욕망의 불꽃 속에 몸을 던져라.”】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광경이 보였다. 환영으로 구현된 병사가 죽으면 망자가 된 그것이 다시 일어나 싸운다.
【“권리를 위한 투쟁만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극야가 긴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생이 비천한 것들은 언제나 자신의 태생 탓을 하곤 하죠.”
그는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답지 않게 단정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이 자신의 것인 마냥 구는 것들. 값싼 동정을 이용해 고지를 점하고, 일이 마음같이 되지 않으면 비천한 태생 탓으로 돌리는 것들.”
콰앙-!!
극야의 말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들린 것일까. 아스모데우스는 공간을 잘라 극야가 서 있던 자리를 완전히 부숴 놓았다.
“모든 일이 얼마나 반복되어야 깨달을 수 있을까.”
조소한 극야가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눈을 흘기며 모습을 감췄다.
“네가 실패한 이유가 태생 탓이 아닌 것임을.”
아스모데우스의 바로 앞에 나타난 극야가 대낫을 휘둘렀다. 아스모데우스는 황급히 공간을 가르고 불꽃을 일으켰다.
덩치를 키운 푸른 불꽃이 이 근방을 모두 태우려는 것처럼 맹렬히 타올랐다. 근처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모조리 막고 있던 PK가 힘에 부치는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괜찮아?”
딱 봐도 안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던가. 나는 PK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
PK는 농담으로라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그래.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곧 힘이 다할 거야. 특성을 너무 오래 썼어.”
이쪽 방향으로 돌진해온 병사가 PK의 특성에 의해 콱 짓눌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렇게 짓눌린 병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럼 죽든가…… 살든가 둘 중 하나겠지. 후자는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언제나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PK답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무시무시한 화염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말을 한 박자 쉰 PK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투로 말했다.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쳐 죽여. 아니면 억울해서 제삿밥 못 먹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뜨거운 화염이 밀려들어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타죽을 온도.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 앞에서, 나는 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비탄과 절규로 가득한 지옥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으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명이 생각보다 질기다는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의 푸른 불꽃이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서 말하던 인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불꽃에 타 흩어지고 있었다. 재가 된 뼛가루가 검게 그을린 땅 위에 흩뿌려졌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타 죽을 온도였지만, 특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견딜 수 있는 온도였다.
나는 밀려오는 불꽃에 맞서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푸른 낙뢰가 지상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