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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72화 (172/175)

제172화

골드 드래곤의 용언은 이번에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보여 주었다.

외부 차원의 이름 없는 몽마가 대한민국의 함예솔이 되기까지. 나는 아스모데우스가 긴 시간 동안 남겨온 행적을 생생하게 관람했다.

긴 미사여구는 필요 없었다.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 경악을 표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미치광이였다.

불성실한 왕인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정신 나간 왕 때문에 피해를 본 백성들 같은 건 내가 논할 사항이 아니지. 난 왕이 아니고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닌데.

그렇지만 차원을 멸망시키려고 드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상식적으로 그게 맞나? 그 차원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되겠다고 차원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게 맞아?

이건 역적같이 깜찍한 단어로 표현할 스케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게 아니라 차원을 팔아먹으려고 하다니.

누가 외계인이 되고 싶다고 자기 출신지인 지구를 멸망시키려 든다고 생각해봐라.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나는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미친 몽마…….”

나는 아스모데우스가 수도 없이 중얼거렸던 말을 살짝 바꿔 중얼거렸다. 쟤는 나보고 미친 인간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쟤가 미친 걸로 보였다.

편애는 어떻게 저런 걸 '모두가 말려도 한번 사랑한 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을까?

저건 '인간한테 꽂혀서 세계 멸망을 꾸미고 있는 미치광이 흑막'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지 않나?

편애는 악마치고 제법 멀쩡한 축에 속했다, 어떨 때는 네정좋보다 편애가 훨씬 멀쩡해보일 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종종 편애가 백과사전 따위가 아니라 악마라는 것을 잊고는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면 또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편애도 결국 악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신 차렸어?”

용언이 스며있던 팔목 안쪽이 옅게 빛났다. 나는 내 손목을 잡은 예솔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순순히 손을 거뒀다.

“겁먹지 않아도 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퍽 달콤했다. 아스모데우스는 나를 위해 세계를 무너뜨려는 것처럼 말했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그것은 모두 본인을 위한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에는 한 세계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게이트를 닫으면 그만이다.

만일 두 세계가 합쳐져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게 된다 하더라도, 위의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과 몬스터의 거주지를 격리하면 손쉽게 이룰 수 있었다.

어쩌면 격리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외부 차원의 주민들이 멀쩡히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과 공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나는 격렬한 종족 차별주의자고 공존해도 외계인은 거들떠도 안 볼 생각이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 차원 하나를 멸망시키겠다는 아스모데우스의 말이 얼마나 어이없게 들리겠는가. 내가 아무리 종족 차별주의자고, 그마저도 내 주변만 챙기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저건 좀.

“머리에 총 맞았어?”

너무 어이없는 계획을 본 나머지 13년 치 분노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나는 그동안 인간인 척을 하면서 내 옆에 들러 붙어있던 외계인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위해 한 차원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범죄자를 상대해야 했다.

이게 무슨 미국식 히어로물이야. 차원 멸망? 지구 멸망보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인데?

“머리가 있으면 제발 생각 좀 해봐. 인간이 되겠다고 차원을 멸망시키는 게 맞는 일인지.”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린 채로 아스모데우스를 설득했다. 이거 좀 잘못되지 않았어? 입장이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저쪽 차원을 지키겠다고 저 미치광이를 설득하고 있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생각이라면 머리에 쥐 날만큼 했어.”

이 우주에서 가장 이기적인 미치광이가 옅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은 건데…… 연희 넌 싫어?”

“그럼 당연히 싫지, 이걸 좋다고 말하냐. 정신과 상담 예약이나 해 봐.”

나는 진심을 담아서 조언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저 또라이를 갱생시킬 명의가 있지 않을까. 없으면 차원 하나 골로 가게 생겼다.

아스모데우스의 녹색 눈에 질색하는 내 얼굴이 비쳤다. 그는 하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질문했다.

“왜?”

따져 묻는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네가 외우주를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연희 너는 이 환영 세계에서 머물다가 내가 부를 때 나오면 돼. 그때가 되면 모든 일은 끝나 있을 거고, 지구는 다시 평화로워질 거야.”

“…….”

“특성은 사라지겠지만, 몬스터도 사라질 테니까 특성을 쓸 이유도 없어질 거야. 너는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면 돼. 네가 바라는 대로 살면 되는 거야. 네가 죽음 너머에 발을 들일 때까지. 그 숨이 다할 때까지.”

끔찍히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비록 나를 구실로 잡고 그의 욕망을 충족한 계획이지만, 이것보다 완벽한 계획은 없었다.

인류에게 위협적인 몬스터는 사라질 테고, 나를 귀찮게 하는 악마들은 그쪽 세계가 멸망하며 함께 사라지겠지.

특성이 없는 나는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니 모두가 내게서 관심을 거둘 테고, 그렇게 되면 나는 원하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고 좋게 말하면 평화로운 그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네 계획에는 인간이 된 네가 끼어 있잖아.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내 옆에 친구로 있을 생각이야?”

그동안 날 속여 놓고서 그걸 없는 일로 치겠다고? 외부 차원을 날려버리고 내부 차원을 평화롭게 만들면 그간 있었던 일들이 없던 게 되는가?

“내 친구는 인간인 함예솔이었지, 너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외부 차원이 사라져 특성을 잃게 되면 그를 상대할 방법이 사라진다. 저것은 내 남은 삶 동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평생을 함께하려고 하겠지.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이미 안 것을 어찌하겠는가?

“내게 있어 너는 기만자고, 내 인생 13년을 날려버린 괴물이야.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냉큼 넘어갈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리고 저쪽 세계를 날려 먹으려고 하는데, 악마들이 퍽도 가만히 있겠다. 계획을 얼마나 상세하게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겉만 봤을 때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나는 아스모데우스에게 돈을 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괜찮은 거예요?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온 네정좋이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물었다.

“별로 안 괜찮아요.”

나는 네정좋을 내쫓기 위해 허공에 손을 저었다. 패닉에 빠진 PK는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근처의 벽을 잡고 비틀비틀 일어나고 있었다.

“함께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가자고 했었죠?”

교만왕의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극야가 되풀이하던 말. '함께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가요.'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가자던 것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하긴 그는 회귀자였다. 이렇게 큰 규모의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보세요.”

싸늘한 얼굴의 아스모데우스가 내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오른손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녹색 눈의 왕이에요.”

콰앙-!!!

거대한 폭발음이 123층을 뒤흔들었다.

* * *

공간이 반으로 갈라지며 세상이 뒤집힌다. 정신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감각.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낯선 땅 위에 서 있었다.

권좌에 올라선 녹색 눈의 왕이 서늘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과거의 그와 인간이 전투를 벌였던 대전.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어.”

한 손에 푸른 화염을 휘감은 아스모데우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이킬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

셀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을 들여 세운 계획이다. 물러날 곳이 없긴 하겠지.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불꽃을 꺼내 보았다. 내 것이 아니라 저 몽마에게 하사받은 것.

부딪히면 밀릴 것이 뻔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싸울 준비 됐어요?”

“물론입니다.”

부름에 따라 이 자리에 소환된 극야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극야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내 세계를 드나드는 쥐새끼가 대체 누군가 했는데, 너였군.”

“쥐새끼라니. 쥐새끼는 너겠지.”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일그러진 공간의 틈에서 새벽 별처럼 푸르게 타오르는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위기 상황이 오면 그 누구보다 재빨라지는 네정좋이 PK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때마침 네정좋의 기척을 느낀 PK가 어깨를 파드득 떠는 게 보인다.

생각해 보니 언데드 군단을 지휘하는 극야는 자주 봤어도 직접 전투하는 극야를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화염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극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갈라지고 이어지길 반복하는 공간을 지켜보던 극야가 손목을 비틀어 공기를 쥐었다. 그의 손 위에 구현된 은빛 날붙이가 꿈틀거리는 공간을 자른다.

푸르게 끓는 아스모데우스의 화염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려 나갔다. 바닥에 투둑 떨어지는 것은 뜨거운 화염이 아닌 차가운 얼음 조각.

드드드드-!!

공간이 뒤바뀌고 있었다. 아름답게 정돈된 대전이 낡아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극야는 모습을 감추고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극야를 상대하는 게 영 어려운 듯했다.

“보이지 않는 자…….”

극야가 계약할 때 말했던 수식어였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모든 생물은 죽음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죽을 때를 모르는 것은 죽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볼 수 없으면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끼기기긱-.

공간이 마구 바뀌고 있었다. 황폐한 사막의 모습부터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던 라운지, 해와 달이 없는 캄캄한 대지까지.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 여파가 뒤까지 미쳤다. 정신을 바짝 차린 PK가 특성을 이용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았다.

“어디가 우리 편이야? 둘 다 나 몰라라 하고 싸우는데?”

“눈이 보라색인 쪽이 우리 편이야. 나 몰라라 하는 이유는 저 사람이 보기엔 네 목숨이 가치 없어서 그래.”

“듣는 인간 기분 나쁘게 하네.”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차가운 눈송이가 뺨 위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해도 달도 없는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내려와 땅 위로 사뿐사뿐 쌓이기 시작했다. 푸른 화염의 뜨거운 열기도 단단하게 언 땅을 녹이지 못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떠도는 수많은 망자. 산 자는 볼 수 없는 망자 떼가 산 자의 몸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나는 이끌어낸 불꽃으로 망자를 위협하며 혼잣말했다.

“끝없는 겨울의 주인.”

극야의 또 다른 수식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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