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나태왕이라 하면…… 검은 눈의 왕. 편애가 희귀하다 못해 킹갓제너럴급 재능이라고 표현했던 검은 눈의 소유자.
모든 계열에 재능이 있다고 하는 검은 눈은 모든 왕 중에서 오직 나태왕만이 가진 것이었다. 나도 지금까지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은 딱 세 명밖에 보지 못했다.
나태왕, 부산우유, 그리고 아스모데우스가 찾고 있는 그 인간.
“네가 바라는 것이 어떤 차원이지?”
예나 지금이나 창백한 낯빛이 눈에 띄는 나태왕은 푸른 손톱으로 허공을 그었다. 갈라진 공간의 틈 사이로 수많은 별이 반짝이며 흐르는 은하수 모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은하수 모형에서 빛나는 별들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다웠으나,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인간.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는 별.”
그는 언제나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렸다. 나태왕은 열의에 불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파멸의 길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구나.”
“무슨 뜻이지?”
“네가 바라는 인간이 너를 죽일 것이라는 소리지.”
나태왕은 앞을 훤히 내다보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스모데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네 스스로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네 삶을 파괴할 거다. 너는 끝에 가서 그 인간의 손에 죽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차원을 넘는 방법이나 말해.”
“재미없긴. 그래, 내 삶도 아니고 너의 삶인데 내가 참견할 이유는 없지.”
눈썹을 위로 휙 올린 나태왕이 고개를 팩 돌렸다. 기껏 조언을 해줬는데 까여서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이 차원 제일 가는 불도저였다. 그는 이미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행보만 봐도 멀쩡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지 않나… 왕과 대화하기 위해 왕이 된 왕이라니. 그의 신하들이 진실을 알면 기함을 토할 게 뻔했다.
“방법을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가 없이 도와줄 이유도 없지. 네가 퇴물을 상대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나도 네가 차원을 넘는 것에 협력하겠다.”
당시의 나태왕은 죽음 너머의 영역을 파헤치려다가 자색 눈의 악마에게 거절당한 상태였다. 완전한 사령술사가 되려면 어떻게든 자색 눈의 악마의 허락이 필요하다.
나태왕이 극야를 향해 아무리 퇴물이라 빈정거린다 한들, 결국 극야를 설득하지 않으면 사령술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좋아.”
불도저 아스모데우스는 나태왕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나태왕에게 협력했고, 몇 명의 악마를 만났다.
“그 인간을 찾는 건 그만 두는 게 어때.”
봉인에 갇혀 운신이 온전치 않은 녹색 눈의 악마가 말했다. 악마는 아스모데우스를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내 계약자를 잘 알아. 그 인간은 널 친구로 삼지 않을 거야. 오히려 죽이면 모를까.”
녹색 눈의 악마는 인간을 찾으려는 아스모데우스를 만류했다. 물론 이 동네 불도저 아스모데우스가 그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녹색 눈의 악마를 향해 돌을 던졌다. 화끈한 반응이었다.
“차원을 건널 생각이라고? 이번에도 똑같은 길을 가는 건가.”
자색 눈의 악마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웃었다. 보면 볼수록 묘하게 기분 나쁜 미소였다.
“결국 또 거름이 되는구나.”
자색 눈의 악마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악마는 그 후로 아스모데우스와 말도 섞지 않았다. 망자를 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태왕은 죽음 너머를 보기 위해 애타게 노력했으나 극야는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태왕은 결국 한발 후퇴했다.
“어쩔 수 없지. 죽음 너머는 그것이 환영 세계를 벗어난 후에 거래를 시도해보는 수밖에.”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나태왕이 한발 후퇴하다니. 아스모데우스는 생각했다. 검은 눈도 악마에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나.
뭐, 그는 좌표와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알아냈으니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그 인간이 넘어온 세계는 머지않아 이 세계와 합쳐질 세계였다. 지금은 소환술사들만이 관측할 수 있지만, 조만간 모두가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될 차원.
때가 머지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서둘러 차원을 넘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수명이 짧다고 들었다. 인간이 떠나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넘어간 차원, 내우주의 생물은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들 뿐이었다. 이 세계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인간마저도 외우주의 생물과 비교할 수 없었다.
“마나가 없기 때문인가?”
지구의 땅을 밟은 아스모데우스가 달이 하나뿐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외우주의 생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족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종족 특성이야말로 그 종족의 귀천을 나누는 기준.
종족 특성이 없다면 엘프와 몽마는 다를 것이 없었겠지. 드래곤과 드워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크기만 큰 드래곤이 배척받는 사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연 게이트는 아주 작아서 그 틈으로 마나가 새어 들어와봤자 큰 영향은 미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특성을 각성하고 종족 특성까지 각성하려면 거대한 규모의 게이트가 열려야 했다.
그런 게이트라면 머지않아 열리게 되겠지. 아스모데우스는 모든 것을 제치고 그의 인간을 찾는 데 열중했다. 드래곤에게서 그의 인간을 지킬 환영 세계를 차근차근 구축해가며 전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특징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인간을 찾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해냈다.
아직 작고 약한 인간. 어리고 미숙하며, 아무런 지식도 없어 외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인간.
앳된 얼굴의 그의 인간이 수많은 인간 틈에 섞여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니. 함예솔은.
“너!”
고대해왔던 만남에 기뻐하며 말했다.
“왕이 될 상이로구나!”
우리 둘의 첫 만남이었다.
* * *
차원과 차원 사이에는 시간의 괴리가 있다. 그것은 두 차원의 거리가 멀수록 더 심했다.
아스모데우스는 그가 본 인간이 작고 미숙한 상태라는 것에 기뻐했다. 차라리 과거부터 시작한다면 인간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다.
환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순조로웠다. 인간은 잘 자라고 있었고, 그런 인간의 단 하나뿐인 친구라는 사실은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평화롭고 한가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끝없는 전쟁과 분쟁, 모독과 멸시는 없었다. 이 세계는 수백 년에 걸쳐 불타는 땅도 없었고, 피와 뇌수가 흐르는 강도 없었다.
왕이 아니라 함예솔의 삶을 살아가던 아스모데우스는 문득 생각했다. 그의 인간이 이 세계를 사랑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고.
그의 생각을 듣는 나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걸까.
아스모데우스는 인간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외우주의 탐욕스러운 왕들은 작고 평화로운 세계에 눈독을 들였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다른 왕들이 내우주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나서야 합니다!”
“영토를 먼저 선점해야 세력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영토를 빼앗기기만 했습니다. 이건 기회입니다!”
시끄러운 신하들이 귀청 떨어지게 떠들어댔다. 독자적인 계획을 꾸미고 있던 아스모데우스는 외우주로 잠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내우주로 막대한 마나가 흘러 들어갔다. 인간들이 하나둘씩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건 아스모데우스의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연희는 각성자가 되었고, 그 뒤로 악마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모두 아스모데우스가 아는 대로였다. 저 보잘것없는 인간이 특성 하나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특성을 쪼개 나누어준 신하가 일부러 인간에게 죽도록 했다. 인간은 그렇게 푸른 불꽃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우주를 불태우는 침공은 계속되었다. 아스모데우스도 다른 왕과 같이 군단에 침공 명령을 내렸다. 다른 왕들이 손해를 깨닫고 침공을 접을 때도, 그는 꾸준하게 몽마를 보냈다.
우연희가 그것을 필요로 했으니까. 그의 인간은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한 존재였다.
죽어가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불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이 되기 위해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왕이 되어야만 하는 일이 있기에 왕이 된 것뿐이었다. 왕의 책무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내우주를 불태우던 전쟁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인간들의 대항은 격렬했고, 굳이 힘을 빼지 않아도 조만간 합쳐질 세계였다. 왕들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안 그래도 봉인 지역의 봉인이 아슬아슬하던 참이었다. 지금은 그쪽에 신경 써야 할 시기였다.
모두가 내우주에서 눈을 돌리자 그제야 틈이 생겼다. 아스모데우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차원을 넘었다. 환영 세계의 완성이 머지않았다.
그동안 교만왕이 우연희에게 깔짝이고, 자색 눈의 악마가 수작질했다. 나태왕이 접근하고, 탐욕왕의 정원이 열렸다.
“엘프 공주를 이용해 나를 소환하려고 했지? 왜 그랬어?”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감색 눈의 악마가 물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널 그 애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악마들의 눈을 피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완성된 환영 세계에 우연희를 넣어두고, 두 세계를 융합시키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옛 영주들의 봉인을 풀고, 외우주를 무너뜨려서 마나가 없는 세계를 만들 거다. 마나가 없으면 특성이 사라지고, 특성이 사라지면 과거로 회귀하게 되겠지.
내우주에 건너온 외우주의 존재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외우주가 통째로 날아가고 나면 그 세계의 주민은 물론이고 악마들도 사라질 테니 그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외우주를 멸망시키고 내우주에 고여 있는 마나가 모조리 사라지기 전에 우연희를 바깥으로 끄집어 낼 거다. 몬스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 마침내 인간이 된 아스모데우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영원히 변치 않을,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그의 이상향.
이름 없는 몽마도, 외우주의 존재들이 붙여준 아스모데우스도, 내우주의 인간들이 부르는 색욕왕도 모두 필요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이제 함예솔이었다. 그는 우연희가 붙여준 함예솔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모두가 그랬지. 나는 결국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나태왕도, 녹색 눈의 악마도, 자색 눈의 악마도, 신하들도. 모두가 그리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을 바란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평화로운 세계가 영원하기를. 네가 사랑하는 인간들 틈에서 삶을 마칠 수 있도록.
“이게 나의 유일한 소원이야.”
그동안 앞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비천한 종족의 이름 없는 몽마는 가장 위대한 환영술사이자 왕이 되었다.
꿈을 꾸는 것은 오직 불완전한 존재뿐. 몽마는 이 우주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랑을 꿈꿨다.
멀쩡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이 되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