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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70화 (170/175)

제170화

아스모데우스의 미친 인간은 그들의 세계에 큰 흉터를 남기고 갔다. 구시대의 지배자들은 봉인 지역에 그대로 봉인되었으며, 그것은 영주인 아스모데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을 봉인한 놋쇠 단지 안에서 생각했다.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인간이라는 종족은 어떤 종족이길래 그의 인간이 그토록 사랑했는가?

고요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인간이 직접 봉인한 다른 영주들은 길고 긴 잠에 빠져 있었고, 봉인 지역은 지나치게 황폐해 생물이라곤 주인 없는 짐승 정도밖에 없었다.

조용하다. 아스모데우스는 두 눈을 깜빡이며 사색에 잠겼다. 그는 다른 영주들과 함께 봉인되었음에도 잠에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스모데우스를 봉인한 것이 반지의 주인인 인간이 아니라 감색 눈의 악마였기 때문이다.

“너한테 유감은 없는데, 이 안에 들어가 줘야 할 것 같아.”

인간이 떠나가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발성 기관이 있는 모습의 악마가 놋쇠 단지를 흔들며 말했다.

“내 계약자는 성격이 너무 물렁물렁하거드은. 자기 손으로는 못하겠나 봐아. 불쌍한 문어 다리까지 빌리고 말이야.”

한숨을 폭 내쉰 감색 눈의 악마는 뒤뚱뒤뚱 걸었다. 두 발 달린 생물의 모습이 어색한지 자꾸만 네발로 기려고 하는 게 우스웠다. 저건 과거나 현재나 다를 게 없네. 어쩜 저렇게 한결같냐.

펭귄 같은 걸음마로 아스모데우스의 앞에 도착한 감색 눈은 단지 위에 손을 올리고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렸다. 아스모데우스는 쓰러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색 눈의 악마는 정말 아웃 오브 안중이구나. 나는 감탄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아스모데우스의 고민은 놋쇠 단지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세상이 바뀌고 여섯 명의 왕이 생길 때까지. 한때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골드 드래곤이 왕좌에 앉아 봉인 지역을 넘을 때까지.

봉인 지역은 암묵적으로 출입을 금하기로 약속한 지역이었다. 봉인 초반에는 다들 봉인 지역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나, 백 년이 지나면서 암묵적인 약속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그곳은 무법지대다. 죄를 지은 범죄자들은 물론이고 여섯 왕의 왕국에서 세금을 내며 살 수 없는 극빈층이 봉인 지역에 몰려들었다. 완전히 슬럼화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인간이 존재했다는 증거이자 과거에 이 땅에 군림한 영주들이 잠들어 있는 장소 같은 건 이제 없었다. 봉인 지역은 규율 바깥의 땅이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땅. 높으신 분들은 존재를 부인하는 지역, 평범한 주민들은 입에 담기에도 꺼려하는 지역.

“어이.”

그런 지역에 존귀한 드래곤이,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의 로드인 골드 드래곤이 친히 발걸음 하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봉인 지역은 발칵 뒤집어졌다. 규율 바깥에서 살아가는 가장 낮은 땅의 주민들은 그 존재를 느낀 것만으로도 혼절하기 일쑤였다. 혹자는 드디어 대청소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만 퍼 자고 일어나지 그래.”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 바다를 이뤘다. 아스모데우스는 여전히 사색에 잠겨 있었다.

“내 친히 발걸음했으니 말이다.”

까앙-!!

놋쇠 단지를 거침없이 걷어차는 불청객의 목소리. 사색에 빠져 있던 아스모데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깡깡깡깡-!!!

그들을 봉인한 매개체인 놋쇠 단지는 노란 눈의 악마가 제작한 물건답게 견고하고 튼튼해 손쉽게 부러지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다만 디테일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밖에서 저렇게 제기차기를 해대면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저 안에 든 아스모데우스의 눈썹 봐라. 꿈틀거리잖아.

다른 영주들이었다면 밖에서 제기차기를 하든 축구를 하든 놋쇠 단지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는 달랐다. 인간이 아니라 감색 눈의 악마가 봉인한 탓에 그의 봉인은 아주 불안정했고, 탐욕왕에 의한 강력한 외부 압력 탓에 놋쇠 단지는 말 그대로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시끄러워.”

쩌저적-.

놋쇠 단지 쪼개지는 소리가 청명하다. 아스모데우스는 탐욕왕 특제 꽹가리 장단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봉인을 깼다는 소리였다.

“나왔나?”

봉인을 깨고 놋쇠 단지 밖으로 나온 아스모데우스가 가장 처음으로 본 것은 시큰둥한 얼굴의 골드 드래곤이었다.

“나왔으면 됐다. 그 인간은 왜 네가 봉인에서 풀려났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해서 이리 귀찮게 만드는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골드 드래곤이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저건 왜 남의 놋쇠 단지로 제기차기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 황폐한 땅까지 걸음 해서 거드름을 피우는 거지? 아스모데우스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그 미친 인간이랑 어울리던 용가리 아니랄까 봐.

저 태어나면서부터 탐욕으로 똘똘 뭉친 거대 도마뱀이 가진 재물을 몽땅 털리는 것으로 모자라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던가.

어쩐지 저 도마뱀을 종처럼 옆에 끼고 다닌다 했지. 아스모데우스가 한심한 눈초리로 탐욕왕을 흘겼다. 탐욕왕은 그 눈빛이 마음에 영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 인간도 우습지. 아무리 역량이 괜찮다고 한들 너같이 천하고 같잖은 몽마를 거들떠보다니.”

탐욕왕의 서늘한 눈빛이 아스모데우스에게 꽂혔다. 종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계급이었다. 특정 종족만 가질 수 있는 종족 특성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곤 했다.

“너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영주도 아닌 한낱 몽마를 내가 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린 탐욕왕이 몸을 돌렸다. 아스모데우스는 탐욕왕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 인간이 날 구하라고 해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건가?”

인간처럼 모습을 바꾸었던 탐욕왕이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체가 일대를 뒤덮었다. 아스모데우스보다 몇십 배는 더 큰 드래곤이 그의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몽마는 드워프보다 못한 종족인 것을 잊었나? 너와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

드래곤은 위협적이었으나, 아스모데우스는 끝까지 무덤덤했다. 그는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다시 위로 올라가야겠다고. 다시 영주가 되어 저 드래곤에게 제대로 물어보아야겠다고. 가장 꼭대기의 존재와 가장 밑바닥의 존재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외부 차원의 절대적인 법칙은 힘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다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다. 원래 밑바닥에서 시작했던 삶이었다. 하물며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어려울 리가 있겠는가?

그는 동족인 몽마를 중심으로, 봉인 지역의 버림받은 종족들을 규합하고, 과거에 다스렸던 영토의 주민들을 회유했다.

하람과 계약한 바르바토스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아스모데우스는 영지민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훌륭한 영주였다. 모름지기 영지민들에게 훌륭한 영주란 세금 인상을 안 하는 영주다.

사람들이 꺼리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몽마들의 왕, 아스모데우스가 이끄는 군단은 적군의 정기와 생명력을 쪽쪽 빨아먹으며 연전연승했다.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나라를 세웠고, 아스모데우스는 진짜 왕이 되었다.

새로운 왕의 등장에 세계가 떠들썩했다. 모두가 아스모데우스의 행보에 주목했다.

스스로 봉인을 깨고 나온 옛 영주. 비천한 종족들을 모아 나라를 세운 걸물. 환영을 현실에 구현하는 위대한 환영술사.

주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이건 뭐, 돼지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격이랄까. 농담이 아니라 딱 그 정도였다. 몽마는 그만큼 천대받는 종족이었다. 봉인 지역으로 쫓겨난 종족은 다들 노예보다 못한 짐승 취급을 받았다.

수많은 호사가들이 새로운 왕에 대해 떠들어댔다. 대부분이 아스모데우스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왕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추측은 진실과 오백 광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다시 묻지.”

왕이 된 아스모데우스가 처음으로 걸음한 곳은 탐욕왕의 영토였다.

“그 인간이 날 구하라고 했어?”

아스모데우스가 탐욕왕의 성에 쳐들어갔을 때, 탐욕왕은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래.”

시큰둥한 얼굴의 탐욕왕이 말했다.

“네가 봉인을 풀고 나오지 않았다면 너의 봉인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질문에 대답한 탐욕왕이 금화 더미를 손으로 쓸었다. 번쩍이는 금화가 차르륵 소리를 내며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 인간은 왜 골드 드래곤에게 그의 봉인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을까? 종족을 바꾸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인간이 되지 않고 그 인간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잠시 헛된 희망을 품었다.

“나와 약속까지 해가면서 널 구하기를 바라다니.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찬 탐욕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스모데우스는 눈앞을 가로막은 보물창고의 문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약속? 약속이라고?

탐욕왕의 실체가 악덕 고리대금업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저 골드 용가리는 그 누구보다 약속에 민감했다.

드래곤의 약속은 귀하다. 용언으로 맹세하는 약속은 악마조차 섣불리 손댈 수 없는 맹약이었다.

대체 무엇을 걸고 약속한 건지는 몰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인간은 반드시 위험해진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어차피 그 인간을 다시 만나려면 세계를 건너야 하겠지. 아스모데우스는 다음 목표를 정했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 이게 무슨 중2병 걸린 인간 같은 소리인지.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진지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야말로 목표가 생기면 불도저 같이 전진하곤 한다.

차원은 별. 그리고 별은 천체 관측자들의 영역. 즉, 감색 눈을 가진 소환술사들의 영역.

군림하되 다스리지는 않는다. 아스모데우스는 국정을 신하들에게 맡겨두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말만 그럴싸하지 그냥 일 하나도 안 했다는 소리다.

나랏일을 버린 악덕 왕은 감색 눈의 악마를 찾아 삼만리를 찍었다. 인간은 떠날 때 악마들을 죄다 봉인하고 떠났지만, 악마라는 건 개념에 가까운 존재. 편애를 봉인한다고 땅이 사라지지 않고 극야를 봉인한다고 죽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 또한 봉인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미치는 힘이 아주 약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악마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했다.

그래서 아스모데우스는 감색 눈의 악마를 찾으러 다녔다. 감색 눈의 악마는 최초의 천체 관측자. 그라면 세계를 넘는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그 인간이 대체 뭐라고 저 고생을 하는 걸까. 아스모데우스는 겨우 찾아낸 감색 눈의 악마에게 물었다.

“너의 계약자였던 인간을 만나고 싶어. 내게 세계를 넘나드는 법을 알려줘.”

감색 눈의 악마는 대답했다.

“미아안. 나, 그런 건 흥미 없어서. 아! 그래! 거대한 괴물을 소환하는 법을 알려 줄까? 그런 건 흥미없니이?”

생고생을 해서 찾아낸 감색 눈의 악마는 정말 쓸모가 없었다. 진짜 대단하다. 그리고 더 대단한 건 이쯤 되면 실망할 만한 데도 꿋꿋하게 다음 방법을 찾아 나서는 아스모데우스였다. 불도저가 따로 없다.

아스모데우스는 차원을 넘을 방법을 찾아 긴 시간을 헤맸다. 그는 소환술사 말고도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을 죄다 찾아다녔다.

물론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차원을 넘는 방법이라니. 완전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모두가 그런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차원을 넘는 방법?”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 방법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어렵지 않지.”

그의 질문은 소환술사에서 시작해 세계를 돌고 다시 소환술사로 되돌아왔다.

아스모데우스의 오랜 난제를 해결해준 것은 바로 나태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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