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아주 옛날에 이름 없는 몽마가 하나 있었다.
몽마는 기본적으로 괄시 받는 종족. 외부 차원은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엉망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제법 현대적인 모습이 되어 살기 나아진 편이지. 이름 없는 몽마가 살아가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72명의 강자가 치고받고 싸우던 고대였다.
땅 곳곳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하루가 다르게 땅의 주인이 바뀌었다. 푸른 불꽃을 품고 태어난 몽마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전투 적성을 갖고 있었다. 몽마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욕망에 사로잡힌 그 순간, 몽마의 심장이 뛰었다. 몽마의 특성인 푸른 불꽃은 심플하고 강력했지만,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안주할 수 없었다.
꿈은 크게 갖는 게 좋다는 말이 있지. 몽마는 먼 미래에 헛짓거리하고 가는 엘프 공주처럼 큰 꿈을 품었다. 아니지. 이걸 큰 꿈이라고 말해야 할까? 몽마는 그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화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후에야 꺼지는 것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푸른 불꽃으로 모든 것을 태웠다. 높은 곳에 앉은 것들이 공유하던 정보를 손에 넣었다. 몽마는 적성에 맞는 녹색 눈의 악마를 따라 했다. 새벽 별처럼 짙푸른 눈이 풀잎처럼 맑은 녹색 눈이 되었다.
손에 쥔 힘이 늘어갈수록 추종자가 생겼다. 이름 없는 몽마는 어느 순간부터 아스모데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땅의 주인이 되었고, 영주이자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되어도 종족 차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스모데우스는 녹색 눈의 악마 다음으로 뛰어난 환영술사였으나, 은연중에 무시당했다. 어딜 하찮은 몽마 따위가 권좌에 오르냐는 말이 나돌았다. 하람과 계약한 바르바토스 같은 머저리들이 특히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이래서 금수저는 안 돼.
멘탈이 순두부인 개체라면 크게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생이 미천했던 존재였다. 꺾이고 부러질 곳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럴 만한 곳이 있었으면 진작에 꺾였겠지. 여러모로 비범한 몽마였다.
탐하고 탐하는 일생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다른 영주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았다. 거슬리면 죽이고 탐나면 취했다. 패배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악마와 영주 몇 명을 제외하면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견줄 사람조차도.
그렇겠지. 녹색 눈의 악마 다음가는 환영술사인데 말이야. 우리 집 악마는 생각보다 더 강력한 악마였다.
아무튼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산맥에 틀어박혀 금광이나 파내고 사는 골드 드래곤 나부랭이가 누군가에게 옆자리를 내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후회할 거다.”
땅에 있는 보석을 사러 온 골드 드래곤 나부랭이가 경고했을 때조차도, 별생각이 없었다. 정말 순리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몽마였다.
이 땅에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일도 없겠지. 아스모데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 이상한 인간이 아스모데우스의 영토에 멋대로 침입하는 일이 얼마 안 가서 일어났다는 거다.
“아. 그 얼굴 보니까 알겠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생명체. 외부 차원의 유일한 인간은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대뜸 말했다.
“네가 예솔이구나. 함예솔.”
원래 이름이 없긴 하나 초면에 이름을 지어 주는 생물은 또 처음이었다. 일단 영토에 멋대로 침입했으니까 잡아 죽이긴 해야겠지. 아스모데우스는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싸웠다.
“완전 허접.”
그리고 개털렸다.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돼. 예솔아, 마실 거나 가져와라.”
검은 머리를 벅벅 긁은 침입자가 어전에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악마 셋이 그 뒤를 따랐다. 아스모데우스는 턱이 나가지 않는 게 신기한 수준으로 입을 벌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 해? 마실 거 안 가져오고.”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골드 드래곤 머리끄덩이를 잡고 온 대륙을 돌아다닌다는 미친 인간. 골드 드래곤이 목줄 잡혀서 노른자 땅에 장미 정원까지 만들어 바쳤다는 미친 인간. 골드 드래곤이랑 악마로 모자라서 사회적 약자인 몽마까지 뜯어 먹는 미친 인간.
“예솔아. 난 녹색 눈에 흰 머리가 좋은 것 같아.”
“그래서 자색 눈의 악마가 흰 머리야?”
“걘 처음부터 흰 머리였어. 아니지. 가장 처음의 내가 그 얼굴이 좋다고 말해서 그 얼굴인 거니까, 내 취향인 건 똑같나?”
미친 인간은 골드 드래곤을 옆구리에 끼고 아스모데우스의 영토를 드나들었다. 대체 왜 아무 데서나 벌러덩 눕는 건지. 몽마는 미친 인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인간 때문에 10년은 늙은 것 같다.
몽마는 원래 본래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10년 늙나 100년 늙나 그게 그거였지만, 기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아스모데우스는 미친 인간이 영토에 쳐들어올 때마다 한숨이 늘었다. 그건 골드 드래곤을 옆구리에 끼고 오든 안 끼고 오든 똑같았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소식. 악마와 계약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영주들을 봉인하고 다닌다는 것.
영주라 함은 악마 대신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들. 다들 죽음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로, 그만큼 강하면 온전하게 죽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영주들을 봉인하고 다니는 건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보였다. 영주라 한들 한낱 생명. 계약한 자색 눈에게 부탁하면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어째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아스모데우스는 다시 영토를 방문한 인간에게 물었다.
“왜 영주들을 봉인하는 거지? 악마의 힘을 빌리면 그들을 죽일 수 있을 텐데.”
간단한 질문이었다. 요새 거신족의 왕과 만나 간계를 꾸미고 있다는 인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입꼬리만 쭉 올릴 뿐이었다.
“그건 내 취향대로 모습을 바꾸면 알려 주지.”
아스모데우스는 그 얼굴이 비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금한데 별수 있겠는가. 아스모데우스는 즉각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아는 예솔이의 모습이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몽마는 신기하네. 앙큼 보이는 대체 어디 가고 프리티 걸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거라.”
“별거 아니야. 고향에 돌아가려면 해야 하는 일이지.”
이상한 열매를 입에 털어 넣은 인간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열매가 떫은 모양이었다.
“고향?”
고향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주제였다. 아스모데우스는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기 때문일까. 굉장히 이질적인 단어였다.
“그래. 고향. 외계인 가득한 외부 차원 말고, 인간이 사는 지구.”
고향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눈은 그 어떤 보석보다, 그 어떤 황금보다 반짝였다. 새벽녘의 별처럼, 그의 푸른 불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돌아갈 거야.”
탐욕으로 들끓는 것이 아닌, 애정을 담아 빛나는 눈동자. 욕망에 찌든 생물로 가득 찬 그의 영토에서 볼 수 없는 눈동자.
아스모데우스는 무심코 그 눈동자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말을 했다간 자색 눈의 악마를 보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것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모조리 손에 넣어 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 가지고 싶은 것은 막무가내로 빼앗을 수 없었다. 악마 하나도 못 이기는 아스모데우스였다. 그런 그가 악마 여럿을 거느린 인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인간은 어느새 서른이 넘는 숫자의 영주를 잡아 봉인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인간이 영토에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차례가 아니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너를 뭐라 부르면 좋지?”
“뭘?”
“너는 내게 이름을 주었으니까, 나도 너를 종족 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불렀으면 한다.”
미친 인간이라고 부를 땐 언제고 갑자기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건지. 미친 인간이라고 불렸던 인간은 어이가 없었다. 호감도가 대체 왜 상승한 거지? 그건 집 나간 편애도 몰랐다.
“전하라고 부르던가.”
“전하?”
“나는 왕이 될 상이거든. 누가 그랬어. 서른 살 안에 왕이 된다고 했지.”
어깨를 으쓱인 인간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아스모데우스는 뛰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 인간…….”
아무리 봐도 좀 미친 것 같았다. 진짜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미친 인간은 정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봉인된 영주의 숫자는 어느덧 쉰을 넘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말리지 않았고, 인간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인간이 아스모데우스를 찾아온 건 그를 제외한 모든 영주가 봉인되고 난 후였다.
그날은 유독 달이 밝은 날이었다. 달을 등지고 선 아스모데우스는 인간이 좋아하는 함예솔의 모습인 채였다.
“……재수가 없네.”
인간은 아스모데우스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더니 커튼을 북 뜯어서 백기를 만들고 흔드는 모습이 정말 미친 것 같았다.
“봉인해야 하는데 봉인하기가 싫네. 이걸 어쩐담.”
급조한 백기를 뒤로 휙 내던진 인간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일단 덤벼. 쓰러뜨리고 생각하게.”
아스모데우스는 어이가 없었다. 미친 인간…….
그래. 인간이 미쳤든 아니든 싸움은 싸움. 아스모데우스는 전력을 다해 인간과 싸웠다.
역시나 개털렸다.
“얘는 왜 발전이 없어? 그동안 놀았어?”
쓰러진 아스모데우스의 앞까지 다가온 인간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미친 인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죽음이 목전에 있었다. 죽음이라면 처음 불꽃을 피웠을 때부터 각오했던 것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네가 싫어.“
지나치게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아. 그 눈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슬픔에 젖은 그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동자. 고향과 동족을 이야기하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눈빛.
그 눈동자를 보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스모데우스는 어쩐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저 눈을 다시 보았으면 했다. 그 안에 담긴 고향과 동족을 향한 애정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을 향했으면 했다.
“내가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인간은 슬픈 눈빛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는 물었다.
“나를 알아?”
“……그래.”
“네가 나를 어떻게 알지? 나는 이름조차 없는 몽마일 뿐인데.”
“한때 네가 나의 친구였으니까.”
친구. 기묘한 울림이었다.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눈빛을 보내는 거라면, 다시 한번 친구가 되면 그 눈빛을 계속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
아스모데우스는 인간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친구는 물론 측근조차 가지지 않은 그였다. 친구라는 단어는 정말 사전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 친구 같은 말은 일상에서 쓸 일이 없었다. 동맹이라면 또 몰라도.
인간과 계약한 악마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걸 봉인하지 않고 뭐 하냐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악마는 여기나 저기나 똑같구나. 늘 한결같기도 하지.
쟤들은 곧 자기들이 봉인 당할 걸 알기나 할까? 기억을 구경하는 나는 팝콘이나 씹었다. 조용히 좀 해라.
악마가 한두 명이면 모를까, 일곱이나 되면 저렇게 시끄러워지는구나. 인간은 소란 속에서도 제법 길게 버텼다.
“난 종족 차별주의자라서, 인간 아니면 친구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뒤, 그 자리를 떠났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방금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있던 장소에는 넝마가 된 몽마 하나만 남았다. 봉인은 안 하고 가는 걸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아스모데우스는 생각했다.
인간이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