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세계 체류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나는 한 달 안에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벌써 한 해가 갔으니 말이다.
낙원교가 무너지던 날, 살아 있는 이예단을 불태우며 각오했다. 앞으로 마주할 것이 내 유일한 친구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기로.
그것이 산 채로 잿더미가 된 사람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나를 위해 죽었으니 나 또한 약속한 것을 지켜야겠지.
“하람 씨. 같이 가실래요?”
무의미한 조사를 받는 시간 동안 틈틈이 타워를 올라 두었다. 타워는 이제 최고층만 남겨 둔 상태였다. 언제라도 끝을 볼 수 있도록. 이 세계의 주인을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쿵! 쿵! 쿵!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괴물이 서울 시내를 짓밟으며 다가왔다. 그것이 걸음을 뗄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지금부터 이 세계의 끝을 볼 생각이거든요. 마지막을 보고 싶으시면 오시는 게?”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왕들은 하나같이 강력했다. 그들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은 권능이라 불리기 마땅했다.
이 세계를 벗어나려면 그런 왕 중의 하나인 색욕왕을 처리해야 했다. 그녀가 나를 순순히 보내 줄지, 아니면 끝까지 가둬 두려고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저 부딪혀 보는 거다. 영원히 이 세계에 고여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어때요? 같이 갈래요?”
PK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럼 안 데려갈 생각이었냐면서 따지고 들었다. 그 인간은 내 배려심도 모르지. 안 보고 싶을 수도 있잖아.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그래. 이렇게 말이야. 나는 눈동자를 굴려 하람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 화냈냐는 듯이 정적이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 안 해 주시겠죠?”
배려한다고 물어보긴 했는데 의외긴 하네. 그래도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세계가 멸망하는 걸 직관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나라면 궁금해서라도 가 볼 것 같았다. PK도 그런 느낌으로 오겠다고 한 것 같고.
남들은 이 세계가 가짜인지도 모르고 사라지겠지만, 그는 달랐다. 이 세계가 가짜인 것도 알았고, 오늘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저는 누구랑 다르게 친구가 있어서요.”
“그것참 대단하시네요.”
“마지막에 얼굴 볼 사람 정도는 있어요.”
하람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로만 싫다고 하지, 밀어붙이면 일단 나서 주는 사람다웠다.
“친구 없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건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말 슬프네요.”
저 성격에 친구가 있다고? 누가 저 성질머리를 받아 줬지?
나는 괜히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물론 하람이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네정좋이 옆에서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있다면서 지적하는 순간부터 내 연기는 망한 거였다.
“뭐 어쩌겠어요. 당신 친구 없는 게 제 탓도 아니고.”
정말 신랄한 말솜씨다. 낙원교 본진에 쳐들어갔을 때 저 말솜씨로 어그로를 끌었다면 이 세상 모든 괴물이 감탄했을 텐데.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긴 그렇죠.”
내가 친구도 없는 아싸인 게 하람 탓은 아니지. 나는 빠르게 동의했다. 내가 친구 없는 걸 남 탓한다고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대충 인정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그럼 가 볼게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하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람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고스트가 있었다.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 인사를 마친 하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갔다. 철천지원수도 세계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는 조금 더 다정하게 대화하지 않을까? 되게 매정하네.
하지만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하람을 다시 보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소리니까.
-이제 가요?
하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잠자코 있던 우리 집 유령이 불쑥 물었다.
“가야죠. 유주하 씨는 만날 사람 없어요?”
-어차피 대화도 못 해요.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은 있을 거 아니에요.”
-장례식장에서 많이 봤어요.
장례식이라면 한참 전에 있었던 거 아닌가. 나는 말없이 네정좋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네정좋은 변명하듯이 뒷말을 덧붙였다.
-우는 모습이 못생겼었어요.
“누가요?”
-가족이랑 같이 다니는 애요.
같이 다니는 애라면 레터? 차세형 말하는 거지?
밖에서도 친구라고 말 안 하더니, 여기서도 친구라고 말 안 한다. 레터 말로는 아주 오래된 소꿉친구라던데, 그렇게 길게 봤어도 친구로 인정을 안 해 주다니. 네정좋의 친구 기준은 대체 뭐지?
나는 네정좋을 빤히 응시하며 고민했다. 저 인간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어차피 음오아예 같은 생각밖에 안 하고 사는 인간이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이 세계의 주민이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무너지는 건물과 도망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걸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서울 시내를 쫙 밀어 버리는 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고스트한테 밟혀 죽은 사람 숫자를 세어 보면 학살자 타이틀 정도는 따지 않을까.
타워에 있는 창을 통해 밑을 내려다보니 고스트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인 각성자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아는 얼굴도 보인다. 저건 자연드림 아줌마, 옆에 있는 건 아줌마의 서초동 친위대, 그리고 저쪽에 있는 건 날강도.
고스트를 이용해 서울을 파괴한 관계로 이목이 저쪽에 다 쏠렸다. 목표가 대놓고 이 타워다 보니 타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대피한 후였다.
“감회가 새롭네.”
12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잡은 PK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죽을 때 되니까 맛 가기 시작한 건가. 나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물었다.
“죽을 때 되니까 감회가 새로워?”
“아니. 그것보다는 실감이 안 난다는 쪽이 맞겠다. 오늘 세계가 멸망한대. 너라면 믿을 수 있어?”
PK는 제법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받을걸?
평소에도 어지간히 미친 것 같았으니 더 미칠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요새 낙원교 사건 때문에 전국이 핫하던데, 잘하면 낙원교 끄나풀이 같은 거로 알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띵-.
12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이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본래라면 라운지가 있어야 할 층이다. 그러나 인간으로 붐벼야 할 라운지에는 이제 인간은 없었다.
“저건…….”
오직 한 존재만이 남아 있을 뿐.
한껏 꾸며 놓은 라운지 바깥으로 낯선 풍경이 보였다. 우리 세계가 아닌 것처럼 달이 두 개 뜬 밤하늘.
나는 두 개의 달을 등지고 서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풀어헤친 하얀 머리카락, 늘 풀잎같이 맑다고 생각했던 녹색 눈.
극야와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사람. 어린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나의 유일한 친구.
“연희야.”
함예솔의 모습을 한 존재가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격적인 해후를 나눌 시간인데, 불청객을 데려오면 어떡해.”
그녀의 시선이 PK에게 가서 닿았다. PK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네정좋은 보이지 않는 건가. 하긴 저자는 환영술사지, 사령술사가 아니니까.
“해후를 나눌 시간이 아니라 결전의 시간이겠지. 혼자 오기 쫄려서 같이 왔어.”
수없이 생각했다. 예솔이가 색욕왕이라면? 예솔이가 정말로 색욕왕이라면, 나는 그 앞에서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때 몽마가 말한 것은 분명히 예솔이었다. 내 근처에 녹색 눈을 가진 사람은 예솔이밖에 없었다. 인간관계가 좁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인 적이 있었던가. 동시에 원망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계속 모르고 지냈다면 어땠을까? 예솔이는 뜻하는 바를 이뤘을 테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휘둘렸겠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뭐야?”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가짜라고?
함께 보냈던 시간도, 순진한 시절에 약속했던 것들도, 온기와 애정이 묻어나는 미소도. 모두 가짜에 불과했다고?
가짜. 이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였다. 가짜들 사이에서 홀로 진짜였던 나는 그 단어가 주는 절망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 가짜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들.
예솔이를 가짜라고 치부한다면,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뚝 떼다 버려야 했다.
“그냥 계속 속이지 그랬어. 이런 세계에 날 끌고 들어올 게 아니라, 계속 속이면서 연기하지 그랬어. 네가 바라는 걸 이룰 때까지!”
화가 났다. 심장 근처가 뻐근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며 화끈한 감각을 남겼다.
대체 왜? 대체 왜 그동안 내 곁에 있었던 거지? 인간인 척 연기하면서 내 옆에 있어야 했던 이유가 뭐지?
극야 때문에? 아니. 그 시절의 나는 극야를 알지 못했다. 첫 번째 세계의 나도 그때는 극야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극야 때문에 예솔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예솔이는 무엇 때문에 내 곁에서 연기를 계속했던 걸까. 나는 숨을 고르며 예솔이를 빤히 노려보았다. 예솔이는 그런 나를 보며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연희야. 내가 보기에는 네가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아래로 주욱 내려갔다. 예솔이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보통 가엾고 딱한 것을 보았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너를 속이지 않았어. 우리가 나눈 시간을 생각해 봐.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니? 지금도 봐. 네가 멋대로 가져간 내 권능을 돌려주었잖아.”
“…….”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지 않아.”
극야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슬픔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톡 떨어뜨릴 것 같은 녹색 눈이 회한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이 오기를 고대했어.”
라운지의 유리창이 달빛에 반짝였다. 예솔이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예솔이의 걸음걸음마다 싸한 향기가 풍겼다. 극야에게서 맡아 본 그 향기. 눈이 내리는 폐허에서 맡았던 그 향기.
짙게 드리운 죽음의 향기가 실내에 진동했다. 내 앞까지 다가온 예솔이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줄곧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어.”
길고 예쁜 예솔이의 손가락이 내 손목 안쪽을 짚었다. 화끈거리는 감각이 손목 안쪽을 덮었다. 아. 여기라면 골드 드래곤 문양이 있었던 자리인데.
“이번에는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게 해 줘.”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손목 안쪽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암전하는 시야를 느끼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외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