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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66화 (166/175)

제166화

가족. 들어주기 무척이나 어려운 소원이었다. 차라리 강남에 빌딩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면 들어주기 쉬웠을 텐데.

가족? 가족이라고? 이렇게 애매한 소원이 다 있나. 가족에 포함되는 게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인가? 부모는 이미 망했으니 다른 걸 찾아봐야겠구나.

형제. 이건 부모처럼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다. 의형제면 몰라도 찐형제는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배우자. 차라리 이게 들어주기 편했다. 밖에 나가면 이 친구의 애인 후보부터 찾으러 다녀야 하나? 자식은 배우자가 생기면 둘이서 알아서 할 항목이었다.

“확답은 줄 수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나를 위해 죽어 달라고 말해 놓고 확답조차 주지 못하다니.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믿어도 되는 거예요?”

이예단은 흐리게 미소 짓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마법진 바깥으로 보이는 녹색 안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번 걸어 봐요. 후회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몽마가 자랑하는 특성은 생물을 조종하는 것. 나는 하람의 눈이 녹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조금 잠잠하던 그사이에 하람의 정신을 파고든 모양이다. 하람이 저기서 야구 방망이를 들고 돌진하는 걸 보면!

콰앙-!!

하람의 풀스윙이 쓰러진 PK에게 직격했다. 나는 어차피 건드릴 수 없으니 PK 먼저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건가?

바닥이 부서지며 흙먼지가 마구 튀었다. 나는 하람의 공격에 곤죽이 되었을 PK를 상상하며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믿을게요.”

쿨럭거리며 기침한 이예단이 상아색 눈을 번뜩였다.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아주 멀쩡한 PK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은 이예단과 같은 상아색이었다.

극야가 아까 말했지. 자식은 부모의 특성을 물려받을 확률이 제법 높다고.

그렇다면 이예단의 특성은 몽마의 특성과 같은 것인가? 그래서 하람과 PK가 조종당하며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거고?

두 사람이 격돌할 때마다 흙먼지가 마구 휘날렸다. 이예단은 성치 못한 몸을 붙들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특성 사용에 더 능숙한 것은 몽마 쪽이었으나, 싸우는 건 결국 하람과 PK. 그리고 PK는 상성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전투가 지나치게 팽팽했다. 간격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대리인을 내세워서 벌이는 싸움을 멈추고 몽마를 불러낼 방법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서는 PK가 하람을 이기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손이 남는 건 나뿐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가 손쓸 수 있는 것을 살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해골?”

공간 한구석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해골탑이었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은 사령술사의 기본이다. 그중 압도적인 수의 해골 병사를 이용해 일대를 싹 쓸어버리는 것은 헌터로 활동하던 극야의 주특기였다.

극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조금 전에 해골의 머리를 띄웠던 경험을 상기시켰다.

스켈레톤을 만드는 것은 과학실에서 인체 모형 조립하는 것과 비슷했다. 장기를 차곡차곡 끼워 넣던 것처럼 흩어진 뼈를 조각조각 맞추는 거다.

두개골 밑으로 척추, 쇄골, 흉골, 견갑골, 상완골. 이런, 갈비뼈가 안 보이네.

장난감 레고 조립하듯이 조각조각 짜 맞춘 스켈레톤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아닌 다른 것과 링크되는 기분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말을 아꼈다.

마법도 학문이라는 사실을 이럴 때면 종종 실감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거라면, 사령술사는 죽은 자의 신체를 알아야 하겠구나. 그것도 종족별로.

끼기기긱-.

차례차례 양산해 낸 언데드가 바닥을 긁으며 일어났다. 나는 나와 링크된 그것들을 향해 명령했다.

“가서 들이받아.”

각성자에 비하면 약하기 짝이 없는 언데드는 하람의 공격 한 방에 휙휙 나가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원래 물량 승부 아니던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서 고통도 못 느끼니 무작정 들이받기엔 이만한 게 또 없었다.

나는 무지성 해골을 계속해서 쭉쭉 뽑아냈다. 목표는 하람을 붙잡아 두는 것. 움직임 없이 특성을 사용할 수 있는 PK와 다르게 하람은 무기를 쥐어야 했다. 조종은 살아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콰과광-!!

두 각성자의 전투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이예단이 움직이는 PK는 정석대로 강력했고, 몽마가 움직이는 하람은 과감하고 변칙적인 공격을 가했다. 우리가 하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크게 반영된 방법이겠지.

나는 전투의 양상을 유심히 살피며 언데드를 찍어 냈다. 그것들은 두 사람의 공격에 휩쓸려 부서지고 또 부서졌지만, 언제나 물량 승부는 옳다는 말을 하고 싶다.

“커흑.”

두 사람의 전투가 끝난 것은 내가 일으켜 세운 해골들이 하람의 몸을 완전히 붙들어 놓은 시점이었다.

아까부터 몸 상태가 영 안 좋았던 이예단이 피를 토했다. 내가 숨을 돌리고, 네정좋이 이쪽으로 총총 다가온 그때. 하람과 PK가 실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그때,

“빌어먹을.”

녹색 눈의 몽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거 잘난 면상 보기 더럽게 힘드네.”

이제야 밖으로 기어 나온 몽마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였다. 나는 생고생을 하고 나서야 보게 된 그것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 정도 도발이면 죽은 사람도 관짝 문을 열고 나오겠어요.

옆에 붙어 선 네정좋이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말했다. 요즘엔 다 화장해서 관짝 문 열 뼈가 없을 텐데. 조상님 귀신이어야 가능한 말이네.

“너 같은 게 내 계획을 망치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어.”

몽마의 녹색 눈이 시퍼런 안광을 발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저런 눈빛일 것이다.

“그런 말 많이 들어 봤어. 내가 분위기 좀 깨거든.”

어느 상황에 투입되든 분위기 다 깨고 나오는 게 내 특기였다. 그래서 난 내 인생 장르가 코미디인 줄 알았지.

“털릴 대로 다 털렸지? 이제 끝을 보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코미디는 아닌 것 같지만.

내 인생이 정말 코미디였다면 다른 사람의 삶을 쥐고 뒤흔드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짊어진 짐의 무게를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내가 죽고 네가 밖으로 나가든, 네가 죽고 내가 밖으로 나가든 하나만 하자고.”

나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곳은 녹색 눈이 만들어 낸 세계였다. 세계의 창조주는 바깥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세계를 살필 겨를이 없었으나,

“웃기는 소리. 네가 죽으면 왕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너를 죽인단 말이냐.”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 걸음 했다. 나는 발밑에서 환하게 빛나는 녹색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나오기는. 집에 안 보내 주려고 하겠지.”

주시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히 편애를 견제하느라 이쪽에 미처 신경을 못 쓴다고 들었는데. 편애가 한 걸음 물러났나?

우리 집 악마가 왕 같은 거랑 싸워서 진다니. 악마같이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그게 말이 되냐. 왕이랑 붙어서 진 사람은 우리 집 악마 타이틀을 달 자격이 없다.

“네 왕이 날 여기에 잡아 둔 거잖아. 알아? 내가 네 면상을 왜 보고 있다고 생각해? 다 네 왕 때문이야.”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색욕왕의 권능을 쓸 때면 들리는 것과 같은 목소리. 나는 색욕왕이 속삭이는 말을 무시하며 지껄여댔다.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도발하니 몽마의 얼굴이 자연스레 붉으락푸르락하기를 반복했다.

“너는 모르고 있어.”

몽마는 화를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은 우리 종족을 버리고 너를 택했다. 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네 삶의 모든 것에 관여했지.”

분노가 절절히 담긴 몽마의 목소리.

「“줄곧 나의 것이 되라고 속삭였었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지금, 나의 권능을 되찾고 싶지 않느냐?”」

그리고 뇌 한구석을 울리는 색욕왕의 목소리.

두 개의 목소리가 교차해서 들렸다. 몽마와 색욕왕은 끊임없이 말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건 외부 차원에서도 똑같은지, 심지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왕은 긴 시간 너희 인간을 흉내 내었으나, 그 본질까지 바뀌지는 않는 법이다. 녹색 눈. 네 곁에 오래 머무른 녹색 눈을 떠올려 봐라.”

「“나의 왕관. 네게 불꽃을 돌려줄 테니 저것의 숨통을 끊어 놓아라.”」

“너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정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너를 쥐고 뒤흔들 수 있는 존재. 너의 유일한 무언가.”

「“화형을 집행해라.”」

“그게 바로 왕이다!! 너는 긴 시간 동안 속았고, 나는 왕에게 복수하고 왕의 자리를 갖기를 원한다. 나는 너를 죽일 이유가 없고, 너 또한 나를 죽일 이유가 없지!!”

「“나의 명을 따라서 이 우주의 모든 영광을 내게 바치면 네가 원하는 평화를 주겠노라.”」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허공에 손가락을 긋자 그 궤적을 따라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내가 빼앗아 쓰고 있었던 색욕왕의 권능, 화형이었다.

“내가 속고 있다고?”

색욕왕은 독촉했고, 몽마는 간절했으며, 극야는 침묵했다. 색욕왕이 권능까지 돌려주면서 저 몽마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나는 그를 불태우는 대신 질문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 너는 왕을 모르지. 나는 왕을 안다. 내가 무사히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면, 네 곁에 있는 왕이 누군지 알려 주겠다.”

몽마는 허공에 피어오른 작은 불꽃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이 왕의 권능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겠지.

내 곁에 있는 누군가. 내 곁에서 머무르며 내 삶에 관여한 자. 몽마들을 버리고 계속 내 곁에 있었던, 녹색 눈의 왕.

「“저것을 불태워. 배신자를 처단하고, 나를 만나러 와라.”」

나의 유일한 무언가.

「“모든 진실을 저런 것의 입으로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나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생각은 간혹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몽마는 내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고, 발밑의 녹색 마법진은 점점 더 환하게 빛을 발했다.

“망설이지 말아요.”

끙끙대며 바닥을 긴 이예단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약속했잖아요. 아버지를 죽여 준다고.”

빛나는 마법진 중앙에 선 몽마가 눈을 감았다. 이윽고 알 수 없는 언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죽여요.”

이예단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상아색 눈이 결연한 눈빛을 띠었다.

“의식이 시작됐어요. 이게 끝나면 돌이킬 수 없어요. 빨리.”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다. 어느 누가 이런 상황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이런 건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앞에서 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경의뿐이다. 나는 흐리게 웃는 이예단을 향해 물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믿어요?”

낙원교에서 사후 세계를 강조했던가. 이예단은 낙원교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구겼다.

“아니요.”

대답은 간결했다. 나는 눈을 감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믿어 보세요.”

인간도 괴물도 아닌 것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걸까? 죽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알지 못했다.

“그쪽에선 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손끝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바닥으로 번졌다. 살 타는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세계는 가짜인 걸 아는 데도, 이대로 끝인 걸 아는 데도 끝이 아니기를 빌었다. 환하게 빛나는 녹색 마법진은 이예단의 숨이 꺼짐과 동시에 빛을 잃었다.

매캐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나는 울부짖는 몽마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불꽃을 일으켰다. 색욕왕이 그토록 원했던 화형이었다.

뜨거운 불꽃이 지하를 잠식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감각에 눈앞이 흐렸다.

나는 다 타고 남은 잿더미 앞에 쪼그려 앉아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

정말로 나를 위해 죽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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