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하람 씨, 뒤를 봐요!”
이곳에 있을 녹색 눈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우리와 같이 땅으로 추락했을 몽마. 이 마법진의 주인이자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고 있는 사건의 진범.
나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탕-!
이예단이 얕은 신음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불이 켜졌다.
야구 방망이를 든 하람이 내 말에 따라 뒤쪽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휘잉.
타격음은 없고 공기 가르는 소리만 났다. 하람은 경계하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네정좋은 그런 하람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하람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시 모습을 감추었나?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이예단을 살폈다. 이예단은 상태가 퍽 안 좋아 보였다.
“가짜가 진짜가 된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황당무계한 소리였지만, 지하에 이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보통 이유 없이 땅 파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건…….”
입술을 몇 번 달싹인 이예단이 돌연 미간을 팍 좁혔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몽마 본인과 이예단뿐인데, 이예단은 상태가 안 좋아 보였으니까. PK가 쓰러진 지금,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고 말이야.
이예단은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그동안 줄곧 알고 싶었지. 낙원교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신도를 모으고, 돈을 벌고, 그들을 죽이고, 괴물을 만들면서까지. 그들의 교주가 이루고 싶어 했던 것.
진실이 코앞에 있었다. 나는 이예단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의식이 성공하면, 그 사람은 진짜가 될 거예요.”
진실을 듣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의식이요?”
나는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대체 뭐로 그린 거길래 지워지지도 않는 건지. 불길함이 마법진 위를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것 같았다.
“이 세계를 만든 사람을 아세요? 그때 말씀하신 타워는 이 세계를 만든 사람과 링크되어 있어요.”
“알아요. 괴물이 풀려난 것도 저희가 그 탑을 파헤쳤기 때문이니까요.”
타워는 감옥이고, 그들은 죄수라고 했지. 타워에서 풀려나온 괴물들은 색욕왕이 설계한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것이었고, 우리는 타워를 올라 세계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타워의 괴물들은 바깥 세계에도 실재하는 것들이에요. 누나가 밖에서 안으로 오신 것처럼요.”
그것들이 바깥에도 있다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예단을 내려다보았다. 이예단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해요. 이 세계의 주인은 바깥 세계에서 딸려 온 것들을 세계를 이루는 중심축인 타워에 유폐시켜 놓았어요. 그들이 바깥에 간섭할 수 없게, 이 세계에 영원히 묶여 있도록.”
타워라. 나는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극야가 말하기를 타워에 갇힌 괴물들은 이 세계의 오류였다. 그들은 특성이 없는 세계에 걸맞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가히 세계의 오류라고 불릴 만했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면 색욕왕은 세계를 만들던 차에 딸려 온 것들을 타워에 가두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진짜라는 거 아니에요? 왜 가짜가 진짜가 된다고 말하셨어요?”
바깥에서 온 나는 진짜인데, 그럼 저것들도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예단은 손가락 끝으로 마법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바깥의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안으로 들어온 것들은 이 세계에 귀속되니까요.”
“아하.”
그동안 극야가 바깥의 나는 무사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몇 번 말했었지. 그게 그 뜻이었구나.
육신이 사라져 의식만 남은 것들은 이곳에 귀속되는 모양이다. 하긴 돌아갈 육신이 없는데 바깥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겠어. 마땅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몽마는 의식을 통해서 바깥의 육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가요?”
이것 말고는 마땅한 추측이 없는 것 같은데. 진짜가 되려면 결국 바깥의 육신이 필요하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하람과 네정좋을 살폈다. 하람은 내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고, 네정좋은 하람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를 움직여 가위질하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아니요.”
쓰러져 있는 이예단은 흐리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다 슬퍼지는 미소였다.
“이건 두 영혼의 육체를 뒤바꾸는 의식이에요.”
두 영혼의 육체를 뒤바꾸는 의식? 나는 순간 멍하게 굳어 있었다.
육체를 뒤바꾼다고? 누구? 이예단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누굴 말하는 거지?
【“영혼을 뒤바꾸는 마법은 금기입니다.”】
타이밍 좋게 극야가 치고 들어왔다. 영혼 스페셜리스트가 하는 말이니 믿지 않는 게 더 손해였다.
【“복잡한 의식과 긴 준비 기간,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한 대마법이죠. 영혼이 몸과 맞지 않으면 그대로 튕겨 나가서 죽고 마니까요.”】
복잡한 의식이라면 지하를 만들고 이 마법진을 그린 이유일 테고, 낙원교 창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으니 긴 준비 기간이라는 조건도 충족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에너지. 사람들을 죄다 죽여 뽑아낸 생명력이 마법에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인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뽑아낸 생명력이 어디로 갔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까.
만화나 소설에서는 틈만 나면 몸이 바뀌길래 별거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이렇게나 복잡한 일일 줄이야. 하긴 쉬운 일이었다면 다른 사람과 몸을 바꾸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일이 생각보다 명쾌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저는 몰랐는데…… 바깥의 제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에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이예단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예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했었죠. 바깥으로 나가려면 바깥의 육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랬었지. 바깥의 육신이 살아 있어야만 이 안에 갇힌 정신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 설마.
“혹시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게-”
“저는.”
이예단은 내 말을 뚝 잘라먹고 말했다. 바지 밑단을 걷어서 드러낸 발목에는 족쇄 모양의 낙인이 있었다.
“이 의식의 제물이에요.”
쿨럭거리며 기침한 이예단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직 바깥에 육신이 남아 있는 사람. 우연의 일치겠지만, 신분도 이름도 무엇도 없기 때문에 바뀌어도 알아차릴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
극야가 이미 세상에서 지워 버린 사람이었다. 저 몽마가 이예단의 자리를 꿰찬다고 알아줄 사람 하나 없는. 모든 걸 잃고 마지막으로 남은 육신까지 잃게 될.
【“자식은 부모의 특성을 물려받을 확률이 제법 높죠. 육체 또한 마찬가지예요.”】
극야는 이번에도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의식의 제물이 혈연관계일 경우, 마법의 성공률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요지는 그거였다. 이예단이 제물로 선택된 이유는 몽마와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가장 가깝고,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맞바꿨을 때의 괴리가 심하지 않아서.
낙원교는 언제 세워진 종교지? 몽마가 인간과 이종 교배하여 자식을 낳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이예단은 몽마에게 육체를 넘기기 위해서 태어난 거고?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았다.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았다. 대체 어디부터 계산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몽마가 이 세계를 만들 때 휩쓸릴 확률, 바깥의 몽마도 이예단의 존재를 필요로 해서 그를 만들었을 확률, 바깥의 이예단이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육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확률,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 들어와서 색욕왕이 이쪽을 살필 여유가 없을 확률까지.
모든 것이 더해져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도달한 지금의 이 상황.
【“간혹 저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운명?”
그리고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 결국 잿더미가 되고 말 운명이라면 활활 타 보기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쉽고 억울할 뿐이니까.
“네가 여기서 제물이 되어 쓰러져 있는 게 네 운명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괴물과 인간의 혼혈. 필요에 의해 태어났고, 평생 쓰임새를 모르며 살다가 쓰임새를 다하면 죽고 말 운명.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나는 영원히 인간도 괴물도 되지 못할 가엾고 딱한 생물을 내려다보았다.
“운명…… 이요?”
불이 켜졌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어두컴컴한 지하였다. 혼란과 분노를 가득 담은 상아색 눈이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네가 보았던 악마가.”
이예단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은 생존 본능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네 삶을 비극적인 운명이라고 간추려 줬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처럼,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끝낼 거야? 네 아버지의 육체 스페어로 태어나서, 다 늙어빠진 몽마랑 몸이 뒤바뀌는 삶으로? 그러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 이 세계와 함께 사라지는 삶?”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세계의 그는 이 세계와 함께 사라지더라도, 바깥의 그가 남아 있잖아.
모든 걸 잃었으면 다시 쌓아 나가면 된다. 가진 것이 없으면 가지면 된다. 쓰임새를 잃었다면, 존재 의의를 찾으면 된다.
“어차피 무너질 세상이지. 너는 어떻게 해도 죽어.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보면 어때. 너도 몸을 빼앗기기는 싫잖아.”
이예단과 몸을 뒤바꾼 몽마는 밖에 나가면 분명 해가 될 거다. 이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의식 하나에 희생되어야 했던가.
나는 반대쪽 손에 턱을 괴고 쓰러진 이예단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나를 위해서 죽어.”
“…….”
“네 의지 없이 아버지를 위해 태어났으니, 이번에는 네 의지대로 나를 위해 죽어 봐.”
“…….”
“그럼 나는 네 죽음을 잊지 않고 바깥의 너를 찾을 테니까.”
사정이 정말 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이 딱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내가 반서준도 아니고 그래야 할 이유가 굳이 있겠는가? 그런 논리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딱한 사람 모두를 돕고 다녀야 하겠다. 내가 성인도 아니고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너를 찾아서…… 말해 줄 거야. 네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너의 존재가 내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만 나를 위해서 죽는다면 말이 좀 다르지.
“나는 악마가 아니지만, 그래도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남을 위해서 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남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기꺼이 남을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아니. 아마 못 할걸.
“네가 바라는 게 뭐야?”
나는 지금 나도 못 하는 걸 남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라도 최선을 다해 볼게. 여차하면 악마도 있어.”
물론 극야는 내가 부탁한다고 순순히 들어줄 악마는 아니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예단을 빤히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 달라는 부탁은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예단은 한참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나는 이해했다.
솔직히 너무 막 나간 것 같았다. 편애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디가 틀렸다면서 지적 퍼레이드를 벌였을 게 뻔했다. 극야가 붙어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잔소리 폭탄을 들을 뻔했다.
“저는…….”
그래도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사람에게는 제법 괜찮게 들렸던 것일까. 이예단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 갖고 싶어요.”
아주 흐린 미소를 지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