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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64화 (164/175)

제164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가 밑으로 푹 꺼졌다. 와씨, 이게 뭐임? 이렇게 갑자기 팀킬?

내 팔을 잡고 끌어 당긴 하람이 PK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빠질 것 같은 팔을 털며 PK를 살폈다. 눈이 라임색이 아니라 녹색이었다.

그래. 아까 전에 상대했던 몽마처럼 말이다.

“저거 조종당하는 모양인데요. 때려눕혀야겠는데?”

나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야구 방망이를 든 하람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려눕히면 되는 거죠?”

“네. 그런데 제 생각엔 상성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콰광-!! 그와 동시에 근접한 곳의 땅이 또 한번 무너졌다.

“안 좋을 것 같거든요.”

PK의 특성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를 철판 오징어로 만들 수 있었다. 공격이 두 번이나 빗나간 건 몽마의 조종미스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걸까.

뭐든 저걸 먼저 자빠뜨려야 하는 건 변함없다. 나는 손에 맺힌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하람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후였다.

PK 같은 가진 사람을 상대할 때는 판단력을 흐리는 게 중요하다. 결국 짓누르는 것도 보아야 짓누르는 거 아닌가.

상성상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정도. 공간을 타고 움직이는 네정좋과 가속으로 몹시 빠르게 움직이는 날강도.

다른 사람들은 더 세다면 이기겠지만, 상성상 우위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내 특성도 내가 세서 센 거지, 같은 특성을 가진 다른 사람까지 PK와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람은 악하다고 정의한 것을 상대할 때는 그 누구보다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PK는 방금까지 동료였다.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사람을 바로 악하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건 하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옆을 졸졸 쫓아오는 네정좋을 향해 부탁했다.

“하람 씨를 도와주실래요?”

-싫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거부는 못 하잖아요.”

-정말 나빴어요.

햄스터처럼 뺨을 부풀린 네정좋이 고개를 홱 돌렸다. PK에게 쪼르르 다가가 몸을 통과하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완전히 장악당한 건 아닌지 어깨를 움찔거리는 게 보였거든.

일단 지금 서둘러야 하는 것은 이예단을 깨우는 일이겠지. 나는 바닥에 그려진 녹색 마법진 위를 가로질러 그 중앙에 있는 이예단에게 손을 댔다.

파지직-!

이예단에게 손을 대기 무섭게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어디선가 크윽, 따위의 악당 신음이 들렸다. 와, 정말 악당이나 낼 법한 신음이었다. 왼손에는 고양이, 오른손에는 와인잔을 든 영화 속 악당 말이다.

“거기 있어요?”

PK가 이예단에게 손을 댄 후로 조종당했었나? 나는 목소리 볼륨을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말씀하세요.”】

답변은 굉장히 빠르게 왔다. 아무래도 스파크는 극야의 비호 덕에 튄 것 같았다. 그러면 아까 PK가 헛발질한 것도 극야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인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쓰러져 있는 이예단을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편애가 나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싸고 돌고 싶어한다면, 이쪽은 날 방목하다 못해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수준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긴 하는데, 의지가 되는 건 아닌 느낌. 편애랑 유독 친하게 지내서 그런가? 이런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하긴 쓰러진 사람을 깨우는 데까지 악마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는 없겠지. 예나 지금이나 쓰러진 사람을 깨우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흔들어서 깨우거나,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일어나게 하거나.

소란스러운 건 한창 싸우고 있는 PK와 하람이 있으니 문제없고. 이 정도 소음에도 깨지 않으면 직접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스파크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손 대볼까. 나는 다시 한번 이예단에게 손을 뻗었다.

치지직-!

이번에는 스파크가 아니라 불꽃이 튀었다. 이예단과 접촉한 손가락 끝이 화끈화끈하다. 손대지 말라는 확실한 경고였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면 늘 내 특성이 그립다. 이깟 불꽃 따위 다 씹고 무작정 돌진할 수 있는 내 특성은 말이다. 무지성으로 쏘다니기만 해도 되어서 편했지. 그래봤자 과거지만.

과거를 회상한다고 지금 되는 게 뭐가 있겠는가. 나는 마법진 위에 쪼그려 앉아서 방 한구석을 바라봤다. 산처럼 쌓인 해골탑. 하람과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하람이 우르르 몰려오는 저것들을 해치웠었지.

지금은 PK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람과 계약한 게 사령술사였나? 나도 마침 사령술사랑 계약했는데. 사령술사의 대표적 이미지가 해골 군단 일으키는 거잖아.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멍하니 방 한구석에 있는 뼈무덤을 응시했다. 부서진 스켈레톤이 재생할 때 어디부터 재생됐지? 일단 두개골이 올라왔지. 그 뒤로 척추가 올라왔고.

“으으…….”

방 한쪽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기의 대결은 쓰러진 사람을 깨울 만큼이나 요란했다. 나는 뼈무덤 바로 위 허공에 떠 있는 두개골과 척추뼈를 보며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가, 비틀비틀 일어나는 이예단을 발견하곤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둥실 떠올랐던 두개골과 척추뼈는 내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저씨,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가까스로 눈을 뜬 이예단이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이예단을 내려다보며 소리 높여 외쳤다.

“경찰 불렀거든요? 눈 감으시면 유치장 갑니다. 아시죠?”

“머리 울려요…….”

“거 뭉그적대지 말고 빨리 일어나세요. 졸린 건 알겠지만 잠잘 상황이 아니니까.”

피떡이 되도록 맞았는데 당연히 졸리겠지. 근데 지금 잠잘 상황이 아니다. 진짜로.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이예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닿은 어깨 위로 화끈한 열감이 올라오며 치지직 소리가 났다.

“아.”

이예단은 그 화끈함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인지 고개를 휙 들어올렸다. 놀라서 토끼처럼 커진 눈이 독특하게도 상아색이었다.

눈 색이 변하는 건 특성이 생겼을 때뿐인데. 나는 이예단의 눈 색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아색? 아는 사람 중에서 그런 홍채 색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없었다. 내가 마주친 사람 중에서도 없었다.

특성은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다양하지만, 겹치는 특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내 신체 강화나 날강도의 가속 같은 것은 가끔가다 보이는 특성이지. PK의 염력은 제법 흔한 특성이고.

상아색은 그런 특성 중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예단이 발현한 특성. 대체 뭘까? 궁금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걸 논할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의문 해소를 뒤로 미뤄두었다.

“합류한다더니 왜 여기서 피떡이 돼 있어요?”

손수건이라도 있나 주머니를 뒤적여 봤는데 그런 건 없었다. 하긴 내가 뭔 손수건이야. 물티슈도 아니고.

“그게,”

몸을 일으키려던 이예단이 갑자기 배를 감싸쥐고 웅크렸다. 그쪽도 얻어 맞았나? 전신을 고루고루 구타당한 모양이지. 딱했으나 도울 방법은 없었다. 부축해주려고 해도 손댈 수 없고, 힐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힘드시면 누워서 말하셔도 상관없어요. 근데 당신 아버지를 직접 죽이려면 일어나셔야 하긴 함.”

몽마는 추락 이후 모습을 감췄다. 그러고 보니 이예단의 아버지가 몽마가 되었는데, 이러면 아버지를 죽이는 건 힘들지 않나? 몽마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테니까.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은 이예단이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저거 꼴 보니까 갈비뼈 부러진 것 같은데. 가볍게 몇 대 골절 당한 게 아니라 좀 심한 것 같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환자를 보며 손을 휙휙 저었다. 딱 보니까 뼈 부러진 것 같은데 얌전히 누워 있으라는 뜻이었다.

“교주가 아버지 맞아요? 그거 보니까 몬스터던데. 몽마라고 불리는 종족인데, 좀 악질이거든요. 지능이 높아서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해요.”

지능이 높은 거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 몽마들의 왕인 색욕왕이 그들에게 죽음을 강요했다고 했던가. 그들이 비교적으로 얌전했던 건 색욕왕 덕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어쩌면 아버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게 되는 걸 수도 있어요. 그건 결국 몬스터니까.”

지금 가장 현실성 높은 건 몽마가 이예단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찼다는 스토리다. 나는 마법진이 그러진 바닥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러나 이예단은 단호했다.

“그게 제 아버지예요.”

그것도 몹시. 그리고 사람을 당황케 했다.

“예?”

그건 모로 보나 몽마인데, 그게 아버지라굽쇼? 이게 뭐임? 갑자기 이종 교배 문제가 나오는 출생의 비밀?

나는 충격적인 진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게…… 되나? 염색체 수가 맞나? 유전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거 아닌가?

빼곡한 의문이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현실은 가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게 진짜 아버지라고 쳐요.”

“치는 게 아니라 진짜예요.”

“네. 진짜 아버지라고 합시다. 그럼 그 아버지는 대체 뭘 하려고 이런 장소를 만든 건데요?”

지하 깊게 내려가서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피떡이 된 아들을 던져두었다. 지상에 시체 더미가 있는 것으로 모자라서 땅 밑에서는 뼈로 탑을 쌓았고.

그 몽마는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나는 녹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을 발로 쓸어 보았다. 당연히 마법진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때 이 세계가 가짜라고 하셨죠.”

여전히 배가 아픈지 그 위에 손을 올린 이예단이 입을 뗐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을까요? 누나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엉뚱한 질문이었으나, 이예단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냐고요?”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란 말인가. 이 세계는 가짜고, 그건 세계가 만들어질 때부터 정해져 있던 이야기였다. 활자가 현실이 되고, 그래픽이 살아 숨쉬는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한가?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데.

“없죠. 세계 자체가 다른 거잖아요.”

나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답변을 들은 이예단은 흐리게 웃었다.

“맞아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죠.”

이예단의 상아색 눈이 아직도 싸우고 있는 PK와 하람에게 가서 닿았다. 두 사람은 밖이나 안이나 타고난 실력이 비슷비슷했다. 상성 차가 있음에도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니. 네정좋을 붙여주기 잘했다.

쭉 이어지던 두 사람의 전투는 이예단의 시선이 PK에게 가서 닿으며 종결되었다. 나는 야구 방망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PK가 쓰러지는 모습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그가 쓰러지던 찰나에 확인한 눈색이 이예단과 같은 상아색이었다!

이예단의 특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방금 PK에게 특성을 쓴 것은 확실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예단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줄곧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예단은 나를 올려다보며 흐리게 웃었다. 야구 방망이를 쥔 하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탕-!

돌연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나는 하람의 뒤에서 요요히 빛나는 녹색 눈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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