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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63화 (163/175)

제163화

최종병기의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피아식별도 못하는 병기를 굳이 왜 투입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어차피 망한 거 내가 망하더라도 적진을 망하게 하겠다는 각오로 쓴 거겠지. 이건 그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고스트를 이용해 환영을 깨부수자마자 보인 것은 시체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폐허였다. 처음에 보았던 궁궐 같은 것은 온데간데 없었다.

“……마을 어디 갔어?”

여전히 하람의 뒤에 숨어 있는 PK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 마을 자체가 환영으로 만든 것이었나 봐.”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를 아시는지? 나는 이 폐허에서 생활했을 마을 주민들이 불쌍해졌다. 돈 다 갖다 바치고 폐허에서 구르다가 생명력을 쏙 뽑히다니. 게다가 영혼은 재활용해서 고스트로 만들었다. 이런 환경 친화적인 몬스터가 다 있나.

인간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재활용을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그 알뜰함에 하늘이 감명받을 지경이었다. 경비 아저씨가 좋아하시겠다.

나는 시체 더미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선의 끝에는 무너지듯 주저앉은 몽마가 있었다.

“이런…… 끔찍한.”

몽마는 핏발이 서 시뻘개진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몽마를 내려다보았다. 몽마가 이를 바드득 갈며 바닥을 쾅 내리쳤다.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많은 몬스터가……!”

“응. 몬스터 이제 없어.”

환영을 찢고 나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이 폐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몬스터 떼였다. 그것들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했고, 나는 고스트에게 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워어어-!!

이곳의 몬스터를 남김없이 해치우라고. 어휴, 우리 멍멍이 잘한다. 참 우렁차게 짖기도 하지.

고개를 돌리니 상황 파악 잘하는 하람이 고스트의 뒤로 간간이 넘어오는 몬스터를 때려잡고 있는 게 보였다. 겁 많은 PK는 하람의 뒤에 숨어서 특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람 얼굴 찌그러진 게 여기서도 보인다.

“젠장!”

삼류 악당처럼 소리친 몽마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싸움은 딱 봐도 승기를 잡은 것 같은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저 몽마는 그 많은 생명력을 대체 어디다 갖다 썼을까? 왜 아직도 본색을 드러내지 않지?

몽마를 이대로 죽이면 낙원교 일은 해결인가? 그렇다기엔 뒤가 좀 구린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몽마를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여유로운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겼어. 알아?”

미간을 구길 대로 구긴 몽마가 날 쏘아보았다. 나는 몽마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의심 가는 점이 좀 있단 말이지. 그동안 끌어모은 사람들의 생명력. 어디 갔어?”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말하는 몽마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흠. 그러고 보니 이예단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한 건 그쪽 아니었나.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인사성 밝은 유령이 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땅속으로도 갈 수 있어요?”

-유령이니까요.

“위험하니까 피해 있지, 여긴 왜 왔어요? 하긴 유령이니까 맞아도 아플 건 없겠네요.”

고스트가 만들어질 때 휘말리지 않으려고 도망간 네정좋이 돌아왔다. 나는 땅에 반쯤 들어가 있는 네정좋과 인사를 나눴다. 내 목소리를 듣는 몽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신기하지. 저건 네정좋을 볼 수 없을 텐데.

-땅 밑에 공간이 있어요.

수확 전의 무처럼 땅에 박혀있는 네정좋이 말했다.

-마법진 같은 거랑 사람도요.

네정좋이 물어온 정보는 지금 가장 필요했던 것이었다.

세상에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활약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네정좋을 죽게 내버려 둔 극야를 칭찬해야 할지 나무라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좋긴 좋은데 도리에 어긋난 것 같다.

“고마워요.”

네정좋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당장 땅을 파야 한다. 나는 몬스터와 싸우는 고스트는 내버려 두고 하람의 뒤에 숨어 있는 PK를 끌고 왔다.

“갑자기 왜?!”

“땅 파야 해.”

“난 땅 파란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PK가 질색하며 어깨를 떨었다. PK 뒤로 따라온 하람이 동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때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네정좋이 해설을 자처했다.

-군대 가면 땅 파요.

아. 그 소리였구나.

밖에서는 게이트가 터져서 군대 갈 틈도 없었겠지만, 이곳에는 게이트가 없으니 군대를 갔겠군.

헌터도 종종 땅을 파긴 하는데 그건 군대랑은 약간 다른 느낌이겠지. 나는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 밑에 있어요.

“여기 파 봐.”

-60m 정도 파주세요.

“60m 파래.”

60m면 대체 몇 층이지? 지하 9층?

범상치 않은 깊이였다. 난데없는 요청을 받은 PK가 툴툴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땅을 파서 뭘 하려고?”

“사건 해결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니까 파 봐. 그리고 네 옆에 유령 있다.”

말 한마디에 창백하게 질린 PK가 하람 쪽으로 붙었다. 하람은 이제 붙지 말라고 말하기도 지친 모양이었다. 저런 인간 처음 보시죠? 저도요.

인간 셋과 유령 하나가 모여서 속닥거리는 동안 몽마는 눈을 감고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고스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털린 몬스터들이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우리가 두억시니라고 불렀던 괴물은 상황을 보고 도망가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것들은 아무래도 지능이 없는 것 같았다.

지능이 없다기보단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가. 마치 언데드 같다. 죽어서 육체만 남은 것들처럼 조악한 움직임이다.

쿠구구궁-!!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꽉 깨문 PK가 이 부근의 땅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몽마가 눈을 번쩍 뜨고는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내려찍어!!!”

나는 목에 힘을 주어 외쳤다. 야구 방망이를 든 하람이 이쪽으로 달려드는 몽마를 막아섰다.

콰과광-!!!

하람과 몽마가 부딪히며 난 소리였을까, 아니면 PK가 지반을 부수는 소리였을까.

어느 쪽이든 몸이 거꾸로 돌아갈 만큼 큰 충격이 가해진 건 맞았다. 날아온 돌에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아프다. 나는 얼얼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아.”

나는 지금 추락하고 있었다.

다리를 움직여보고 깨닫게 된 사실이다. 우리는 폭삭 내려앉은 땅 밑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야-! 봄결아!!”

밑이 어찌나 깊은지 추락해도 추락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60m 타령을 했으니 딱 60m만큼 추락하겠군.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살아 있냐-!!”

너 죽었으면 우리 다 죽는다! 특성이 있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60m 추락하고서 살 자신이 없네. 아마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몸이 산산조각나지 않을까?

검은 공동 안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지나치게 스릴 넘치는 상황에 혀를 씹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조만간 동지가 되겠어요.

어느새 따라붙은 네정좋이 두 눈을 순진무구하게 깜빡였다. 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 얼굴을 향해 중지를 세워주었다. 죽어서도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은 참 볼만 했다.

-총각 귀신의 저주를 받을 거예요.

일그러진 얼굴로 이야기한 네정좋이 스르르 물러갔다.

나는 그로부터 몇 초 뒤에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는 PK의 목소리를 들었다. 음~ 멀쩡히 살아 있네. 역시 바퀴벌레보다 질긴 목숨줄의 소유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미친 듯한 낙하 속도는 천천히 감속되었다. 네정좋 덕에 PK가 정신을 차린 덕분이었다.

“하람 씨. 안경은 어디다 두고 오셨어요?”

착지한 바닥은 지하답지 않게 타일이 잘 깔려 있었다. 나는 안경을 잃고 잘생겨진 하람에게 물었다.

“추락할 때 잃어버린 것 같아요.”

“잘 잃어버리셨네요.”

-맞아요.

하람의 안경 없는 얼굴을 칭찬하고 있으니 외모 측정기 네정좋이 슬그머니 다가와 맞장구쳤다. 하람은 시비를 거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그럴 기운도 없는지 입술만 달싹거렸다. 빠른 포기를 배운 모양이다.

“불 있어?”

폐허 60m 아래의 지하는 횃불 몇 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어 어두침침했다. 나는 뒤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흘끔거리며 물었다.

“라이터는 있어.”

고작 몇 분 사이에 기운을 다 써 버린 PK가 목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목소리가 쉰 걸 보니 아까 비명을 지르느라 기운을 다 쓴 모양이다.

“라이터는 쓸모 없는데. 아닌가? 뭐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으니까 줘 봐.”

나는 지친 기색의 PK가 던져준 라이터를 들고 어두운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네정좋이 위치를 잘 찍어준 덕에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가 지하를 뚫고 인공적으로 만들어 둔 장소. 마치 카타콤과 같은 미로가 뒤로 보였다. 아마 정상적인 방법으로 침입을 시도했으면 길을 잃고 죽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땅을 무너뜨리고 진입했다. 누가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쓸 거라고 생각했겠어. 상식이 있으면 보통 안 하겠지.

라이터 하나로 앞을 밝히기엔 무리가 있는 장소. 나는 까마득하게 높은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앞이에요.

쿵. 그러다 얼마 걷지 않아 차가운 석문에 머리를 부딪혔다. 사람의 힘으로 밀기엔 무리가 있는 크기다.

하지만 이쪽에는 다재다능한 특성의 PK가 있지. 나는 라이터를 위로 휙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문이 안 열려.”

“비켜 봐.”

등 바로 뒤까지 다가온 PK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옆으로 물러났다.

끼기기긱-. 

목소리가 쉬었다고 특성까지 쉰 건 아닌가 보지. 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돌로 된 문이 아니라 철로 된 문처럼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 상황이든 무리에서 앞장서는 것은 일을 자초한 사람의 몫이다. 유대감이 단단한 팀이면 리더가 앞장서줄지도 모르지만, 일단 우린 아니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 문 뒤는 어두운 곳에서 적응한 눈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밝았다. 나는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찌푸리며 문 뒤에 자리한 것들을 보았다.

거대한 녹색의 마법진과 방 안을 밝히는 구체들, 구석에 버려져 있는 뼈 무덤과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거울.

“……악마 소환진?”

금방이라도 악마가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문 뒤로 펼쳐진 것들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델리키아 사건처럼 이번에도 악마가 엮여 있나? 이건 악마 숭배의 흔적?

악마 소환이나 인신 공양 같은 생각이 뇌리를 잠식했다. 마침 마법진 중앙에 제물도 있었다. 얼굴이 아주 익숙한 게, 자기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외친 어딘가의 불속성 효자 같은……

“야, 봄결아.”

불속성 효자 같은 게 아니라 불속성 효자가 맞는 것 같은데. 나는 PK의 팔을 툭툭 쳐 불렀다.

“저거 이예단 아니야?”

하람은 이예단을 모르지만 PK는 이예단을 알았다. 저번에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도발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직도 눈을 못 뜨고 있는 PK를 마구 쳤다. 내가 술 처먹고 들어올 때마다 엄마가 이랬지. 다 엄마한테서 배운 기술이었다.

“뭐? 이예단?”

아직 눈을 찌푸리고 있는 PK가 내 팔을 툭 쳐내며 물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재차 말했다.

“그래. 저거 이예단 아니냐고.”

누구한테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팅팅 부은 얼굴로 쓰러져 있는 저 사람 말이다. 귀는 찢어져 있고, 입술은 다 터져 있었으며, 목에는 손자국도 있었다. 어디서 심하게 구타라도 당한 듯한 꼴이었다.

눈을 덜 뜬 PK가 마법진 위로 올라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살폈다. 이예단의 어깨를 발로 밀어 넘긴 그는 손가락을 코 밑에다 가져다 대고 숨이 붙어있는지를 확인했다.

몇 초가 흘렀을까. 이예단의 생사를 확인한 그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예단도 맞고, 살아 있는 것도 맞다는 뜻 같았다.

집회가 시작하고 나서 합류하겠다던 애가 왜 저러고 있어? 나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마법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피해!!”

PK의 눈 색깔이 짙은 초록색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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