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싸우러 와서 말을 거는 건 무슨 심정일까요?
옆에 찰싹 붙어 선 네정좋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글쎄. 그걸 알면 내가 몽마를 했지 인간을 했겠냐. 물론 종족값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고, 스스로 정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들은 왕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설령 그것이 죽음을 요구하는 명령이라도 말이야.”
이야기하는 몽마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파티에는 무드 브레이커가 있었다.
까앙-!!
남몰래 눈짓을 주고받던 PK와 하람의 합동 공격은 순식간에 막혔다. 몽마는 손짓 한 방으로 하람의 공격을 튕겨내고 다시 폼을 잡았다. 하람은 저 멀리 날아가는 야구 방망이를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왕은 우리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게이트를 열었어. 우린 우리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게이트를 열어야 했다. 왕이 기다렸던 사람. 그래.”
몽마가 말을 끊음과 동시에 PK가 손뼉을 쳤다. 몽마의 머리가 다시 한번 터졌다.
“너 하나 때문에.”
사람처럼 생긴 생물의 머리가 무 뽑듯 쑥 자라나는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신기했다.
-쟤랑 아는 사이에요?
몽마의 시선은 하람도 PK도 아닌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팔을 휘휘 저어 속닥거리는 네정좋을 쫓아냈다. 어이가 좀 없었다.
“죄송한데 저희 초면입니다.”
자기네 왕이 잘못한 걸 왜 내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델리키아 때도 느낀 거지만, 저 동네 왕은 죄다 폭군인 모양이다. 다 자기 멋대로 살아서 신하가 불만을 품고 있잖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머리가 또 날아갔던 몽마가 다시 한번 머리를 정리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어그로 담당을 맡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노력하는 PK와 하람에게 남몰래 응원을 보냈다. 그래. 어그로 열심히 끌어줄 테니까 힘이라도 좀 빼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해도 나는 잘 모르는데. 마주친 몽마가 한두 명이어야 말이지. 너도 네가 잡아먹은 인간의 얼굴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손가락을 아래로 휙 내렸다. 갈라진 땅이 실시간으로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정말 많은 숫자의 사람이다. 저 몽마가 자기가 잡아 먹은 사람들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몽마라면 한 때 열심히 잡았다. 반가면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열고 들어오는 문이다. 즉 일방통행이다 이 말이다.
내가 색욕왕의 영토 정복도를 90% 이상 달성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그만큼 게이트를 많이 열고 들어와서 그렇다. 꼬우면 열지 말았어야지. 침공을 안 하면 서로 얼굴 볼 일 없었을 거 아니야?
먼저 선빵을 쳤으니까 대응한 것뿐이다. 내 입장은 그랬다.
“그럴 리가 없어!!”
근데 저쪽도 나름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도발을 적절하게 던진 건지 몽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화가 난 몽마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그의 머리는 일곱 번째 터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말해봤자 기억 못 해. 너도 못하는 걸 남한테 바라면 어떡하냐.”
학교 동창 얼굴도 기억 못하는 판에 잡아 죽인 몽마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말하는 자기도 알 거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린지.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으려면 우선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했다. 저 몽마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이성을 저 멀리 던져버린 모양이었다.
검은 손톱을 쫙 뽑은 몽마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PK의 기막힌 특성 컨트롤에 따라 정처 없이 흔들렸다. 위로 올라갔다가,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옆으로 몸을 옮겨 피했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평소에 하는 게 무작정 돌진하는 거라 상대가 육탄전 전문이면 금세 알 수 있다. 저 몽마는 폼부터 글러먹었다. 지금 당장 하람에게 주먹질 해보라고 해도 쟤보단 잘할 것 같았다.
-뭐 해요?
“고민.”
저 몽마가 날 어디서 봤길래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걸까. 발악하는 걸 보고 있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이 기다렸던 사람. 몽마들의 왕. 색욕왕.
-태평하게 고민하고 있어도 돼요?
나보다 더 태평한 네정좋이 머리를 붙잡고 말했다. 내 힘으로 떠 있는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지. PK가 아니면 당장 추락하는 게 내 처지다. 가만히 있긴 뭐하니까 양심상 고민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고생은 PK가 하고, 나는 추리를 하고.
휙휙 옮겨지는 것도 나름 재미는 있었다. 나는 머리 위를 스치는 손톱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어지럽다.
“나 토할 것 같은데 천천히 옮겨주면 안 돼?”
“죽고 싶으면 그러든가!!”
올라오는 구토감을 참고 한 건의는 제대로 빠꾸를 먹었다. 하긴 내가 해도 양심 없는 소리였다. 나는 노랗게 물든 하람의 새 야구 방망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색욕왕은 이 몽마가 하는 짓을 알고 있을까?
이 세계는 색욕왕이 날 가둬놓기 위해 만든 세계였다. 오직 나만을 위한 세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
이 세계를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색욕왕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왕을 원망하는 부하가 설친다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저 몽마가 낙원교를 통해 벌인 짓은 꽁꽁 숨기려고 노력해도 커버가 다 안 될 정도로 비대했다.
게다가 이 세계는 일정 범위까지만 구현되어 있다. 대한민국 바깥은 구현도 안 되어 있다고.
이곳은 색욕왕이 나 하나만을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다. 교도소장이 교도소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 왜?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그럼 왜 이 일을 묵인해주고 있었던 거지?
야구 방망이를 든 하람이 짧게 심호흡했다. 그의 야구 방망이에 모인 금빛 기운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올랐다.
콰앙-!!!
하람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무섭게 금빛으로 너울거리던 기운이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바깥의 하람은 검을 들고 저 기술을 썼던가. 야구 방망이로 쓰니까 참 없어 보인다.
하람의 특성을 제대로 맞은 몽마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머리만 터진 게 아니라 몸 전체가 소멸했다. 금세 다시 나타나겠지만, 이 정도면 충격을 꽤 받았겠지.
다른 두 사람 또한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둘 다 표정이 밝았다.
-해치웠나?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빨리 죽는 라스트 보스 따위는 없지.
“평생을 함께해 온 사람들이었다. 정기를 구하지 못해 배곯는 일이 잦았지만, 단 한 번도 왕을 원망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어.”
우리는 포스 있게 나타나서 빨리 죽는 것들을 페이크 보스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들이 왜 죽어야만 했지? 왕은 네까짓 게 뭐라고 우리를 버렸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몽마가 녹색 눈을 번뜩였다. 희번덕하게 치켜 뜬 눈을 보니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 번에 안 간 걸 보니까 페이크 보스 같은 건 아닌 모양인데.
2차전의 조짐을 느낀 우리 쪽 두 사람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피막 날개를 활짝 펼친 악마를 보며 말했다.
“너희 왕이 동족인 너희 대신에 왜 나 같은 걸 선택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
“불만 수리 요청은 내가 아니라 너희 왕한테 가서 해야지. 내 앞에서 백날천날 떠들어봤자 내가 뭘 하겠어? 너희 왕한테 나 말고 너희나 신경 쓰라고 얘기해주랴?”
극야 때문에 나도 모르는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좀 다르지. 진짜로 내 앞에서 왈왈대는 이유가 뭔데? 그냥 네 왕이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야. 왕한테 나대면 그대로 모가지니까 만만한 나한테 개기는 거 아님?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폼을 잡았다. 지금의 내가 저 몽마에게 비빌 수 없는 위치인 건 알았지만, 만만해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태왕 앞에서 혼자서도 깐죽거리던 게 나 아니던가. 더군다나 지금은 혼자도 아닌데.
물론 동료랍시고 데려온 것들은 내 파격적인 도발에 입을 떡 벌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뜨실 것 같아요.
여기 죽어서도 깐죽거림을 멈추지 못하는 유령이 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네정좋을 쫓아냈다. 그건 물에 빠지는 날이 오면 그때 가서 알아볼게.
“그 입……”
지금은 2차전이 먼저인 것 같으니까.
“닥치지 못해-!!”
몽마는 눈깔이 뒤집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길한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거 맞아요?”
“하하.”
“지금 여기서 다 죽게 생겼는데요. 지금 그렇게 도발하는 게 맞아요?”
“하하하. 저도 몰라요.”
오렌지 주스를 한 움큼 뱉어낸 듯한 표정의 하람이 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시퍼렇게 질린 PK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까부터 쭉 살펴봤는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있다. 환영이라면 금방 벗어날 수 있을 거다.
그럼 이제 문제는 우리가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인가. 계속 바보같이 육탄전을 벌인다면 할 만할 것 같기도 하고.
-저것 봐요.
물론 저 몽마도 머리가 있으니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아아아악-!!
끄으윽-!!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한 곳에 모여서 합쳐지고 있는 유령들. 스스로의 의지로 ‘낙원행’을 당한 망자들.
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괴물은 투명한 촉수를 꿈틀거리며 다른 유령마저 흡수하기 시작했다. 낙원행을 당한 유령이 아니라 지금 죽어 유령이 된 사람들 말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네정좋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어져요. 일단 저게 안 보이는 데까지 가세요.”
-네.
네정좋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클리셰대로라면 여기서 ‘널 두고 갈 수는 없어!’ 같은 대사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우리는 클리셰 타령하기에는 너무 얄팍한 관계긴 했다. 나는 네정좋을 멀리멀리 보내버리곤 위로 고개를 들었다.
영혼이 모이고 모여 괴물이 점차 거대해져가고 있었다. 원래 유령은 보이지도 않고 현세에 간섭하지도 못하는 게 특징인데, 그게 저렇게 커져버리면……
“좀 망한 것 같은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부서진 회장 안에 미약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뭘 보고 있어요?”
다른 건 다 봐도 유령은 못 보는 하람이 물었다. 나는 천장을 뚫을 기세로 커지고 있는 유령 합체 최종 변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인조 괴물이요.”
이제 저건 유령이 아니라 고스트라고 불러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