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네정좋이 보고 온 것이 낙원교든 아니든 우리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낙원교 신년 대집회에서 교주 머리통을 터뜨릴 계획을 말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이예단이 알려준 낙원교 본진과 네정좋이 다녀온 이상한 마을의 위치를 확인했다. 에이, 설마 정말로 그게 낙원교 본진이겠어? 아무리 사이비 종교라도 강원도 깊은 산속에 궁궐을 지어 놓는 게 말이 되냐고.
“좌표가 똑같네.”
지도를 손가락 끝으로 툭 두드린 PK가 말했다. 설마는 현실이 된다. 사람은 설마라는 단어를 생각조차 하면 안 돼. 그게 현실이 되어버리니까.
악당을 물리친 후에 ‘해치웠나?’ 하면 다시 부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을 조심히 해야 하는데.
나는 열이 훅 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머리를 테이블에 갖다 박았다.
쾅-!!
“왜 갑자기 자해를 해?”
난데없는 세리머니에 PK가 툴툴거렸다. 사람은 원래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오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법이라고. 특성이 돌아오면 시원하게 머리 박지도 못하니까 미리 해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가 되면 내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이 테이블이 아프겠지.
“상황이 복잡해진 것 같아.”
나는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제 돌아가서 쭉 생각해 봤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20년 씩 늙었다는 그 마을의 사람들과 누군가에 의해 통솔되고 있는 괴물들.
워낙 신기한 일이니만큼 이런 짓을 벌일 만한 누군가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색욕왕? 색욕왕이 뭐 하러 이런 일을 해.
녹색 눈의 왕은 이 세계의 관리자다. 한창 편애와 기싸움도 하고 있다고 했으니 그런 자잘한 일에는 신경 쓸 틈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누가? 색욕왕의 세계에서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
“너도 약 해?”
나는 부어오른 이마를 앞머리로 잘 덮어 가렸다. PK는 내 질문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했다가는 제 명에 못 살지.”
“줄담배는 피워도 약은 안 한다 이건가.”
“혈관에 구멍 나서 죽는 것보단 폐에 구멍 나서 죽는 게 낫다고 봐.”
그럼 결국 죽는 건 똑같다는 거 아니냐. 하긴 인간은 언젠가 다 죽지. 언제 어떻게 죽느냐만 조금씩 다를 뿐.
네정좋이 말한 하루에 20년 씩 늙는 사람들 말이지,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긴 아니고 바깥에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몽마는 크고 작은 골칫거리를 달고 오는 종족이다. 몽마의 개체수가 확 줄어든 지금은 던전에서 몽마를 보기도 힘들지만, 예전에는 몽마만 떴다 하면 다들 비명을 질렀다.
정신력이 약하면 약할수록 몽마의 정신 간섭이 쉬워지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정기를 빼앗기니까. 그들은 사람을 환영에 가두고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다. 바뀌는 모습은 보통 타깃의 이상형.
그 사람의 이상형으로 나타나 정기를 쪽쪽 빨아 먹고 가는 몽마들은 상대하기 참 힘든 종류의 몬스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걔들도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긴 하다. 저번에 탐욕왕의 영토에서 미친 소리를 들었었지. 연 70%의 금리로 몽마들한테 정기 대출을 해주고 있단 소리 말이야.
하지만 그건 걔네 입장이고, 빨리는 입장에서는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데. 몽마들이 작정하고 빨아가면 수명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이 먹는 것은 생물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랑 같이 다니는 유령이 하나 있어.”
나는 네정좋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운을 뗐다. PK는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아. 그 말 잘 듣는 유령.”
“그 유령 앞에서 그런 말 하면 또 장난칠걸.”
“어디 한 번 해보라고 해.”
PK의 눈빛이 복수심으로 활활 탔다. 이미 죽은 사람한테 어떻게 복수하겠다고 저러는 거람. 네정좋이 잠시 자리를 비웠기에 망정이지. 나는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아무튼 저번에 그 유령한테 낙원교 본진을 둘러보고 오라고 시켰거든.”
“낙원교 본진을? 거긴 특정한 날이 아니면 접근도 못하는 곳인데?”
“유령이잖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유령이 되었기에 얻은 이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정좋이 죽을 때 PK도 함께 있었던가. 그때 죽은 연예인 유주하가 조력자 유령이라는 걸 알면 놀라겠네.
하지만 유령의 정체가 얼마 전에 죽은 연예인이라는 건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낙원교 본진이었다.
“지금 거기에 괴물이 잔뜩 모여 있는 모양이야.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했나.”
“……괴물이?”
“응. 누군가가 괴물을 통솔하고 있어. 괴물들이 얌전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야.”
사실 요새 도시 박살나는 꼬락서니를 보면 대체 뭐가 얌전한 건가 싶지만, 우리가 풀어둔 괴물이 대체 몇 개던가. 이제 탑을 100층도 넘게 올랐으니 100개는 넘을 텐데?
밖에서는 웨이브만 터져도 난리가 났었는데, 여긴 게이트 개념도 없다. 전국에 괴물이 퍼져 있는 상태라고.
이 세계 사람들의 안전불감증에는 그저 리스펙을 보낼 수밖에. 밖이었으면 벌써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다.
자기 목숨 아까워서 몸 사리는 PK조차 이 상황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걸린다고 할까. 결국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만들어진 가짜일 뿐인가?
“갈 때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네.”
PK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나는 손에 턱을 괸 채로 대충 대답했다.
“뭐, 그렇지.”
괴물 여럿과 격전을 벌일 수도 있으니 각성자를 더 구해 가는 게 좋겠다. 기왕이면 우리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
“맞다. 그 마을 사람들은 죽으면 저승 가는 게 아니라 귀신이 되어서 구천을 떠돈다더라.”
“……뭐라고?”
PK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사람 드럼통에 넣어서 바다에 수장시키는 건 태연하게 저지르면서 귀신은 무서워하다니. 너 때문에 구천을 떠도는 귀신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가는 밤새 잠을 못 이루겠구나.
아니지. 그러면 오히려 갱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 갱생해봤자 쓸데도 없는 쓰레기지만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완전 귀신 천지라던데, 쫄보인 봄결이가 버틸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기저귀라도 챙겨가던가. 기절은 하지 말고. 내가 널 어떻게 들어.”
특성이 있을 때라면 모를까 특성이 없는 지금은 난감해진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등에 업는 것도 힘들겠는데. 의식을 잃은 사람을 옮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니까 말이다.
“난 안 가. 너 혼자 가.”
인상을 구길 대로 구긴 PK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열어 하람의 연락처를 찾았다.
“귀신한테 쫄아서 그러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체면도 없어?”
“없어. 무서운걸 뭐 어쩌라고.”
“정말 체면도 없구나.”
다른 건 몰라도 귀신이면 하람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아, 하람은 눈이 좋은 거지 무속인은 아니었던가? 속성으로 구마 의식이나 굿 같은 거 배워 오라고 하면 화내겠지? 그럼, 그럼. 당연히 화내겠지.
나는 씩씩대는 PK의 눈앞에 하람의 연락처를 들이밀었다. 휴대폰 화면이 시야로 불쑥 들어오자 그가 미간을 좁히는 게 보였다.
“내 생각엔 우리랑 같이 갈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아. 괴물도 많고, 귀신도 잔뜩 있을 테니까.”
“난 안 간다니까.”
“걱정 마! 퇴마사를 부를 거니까!”
하람이 퇴마를 할 수 있는가.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결국 하람의 존재가 PK를 안심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다.
그러고 보니 하람은 특성이 없을 때도 눈이 좋았지. 그러면 특성을 되찾은 지금은 귀신도 볼 수 있으려나?
어쩌면 네정좋이 생각보다 더 빨리 자리를 옮길 수도 있겠다. 이 동네 하람의 패션 센스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얼굴은 나보다 더 좋아하지 않을까.
“괴물과도 상성이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야. 이 사람도 각성자거든.”
“직업이 퇴마사인 거야, 아니면 특성이 퇴마와 관련 있는 거야?”
“후자라고 할 수 있지.”
재차 말하지만 하람이 퇴마를 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솔직히 그건 하람도 모를 것 같기는 한데.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도 약하지 말고 클린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도록.”
“그건 왜?”
“별건 아니고 낙원교의 흑막이 몽마인 것 같아.”
이 일의 흑막과 색욕왕이 관련 되어 있든 없든 이 일의 흑막이 몽마인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흑막이 몽마면 괴물들을 통솔하는 것도, 사람들이 순식간에 늙어 죽는 것도 말이 되지. 대체 언제부터 흑막으로 자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약 같은 걸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몽마한테 정기 빨릴 걸. 처음엔 홍콩 가는데 나중엔 그대로 죽어.”
몽마한테 걸려서 홍콩 갔다가 그대로 죽으면 얼마나 웃기게요? 예전에는 행죽추라고 죽을 때라도 행복하게 죽겠다! 하면서 일부러 몽마를 찾아다니던 인간들이 있었다. 자만추도 아니고 행죽추가 대체 뭐야. 우습게.
하지만 지금은 옛날도 아니고 심지어 여긴 바깥도 아니었다. 몽마한테 걸려서 홍콩 가면 대가리 깨서 현실로 복귀시켜줘야지. 거기서 죽으나 대가리 깨져서 죽으나 죽는 건 똑같잖아. 그럼 몽마한테 정기 안 주는 쪽이 훨씬 이롭지 않을까?
나는 휴대폰 자판을 눌러 하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충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네 말은 낙원교 본진이 괴물 소굴이 되어있다는 거네?”
“응. 그렇지. 거의 심령 스팟 수준? 괴담의 원천지 수준?”
“잘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는데.”
PK의 표정이 퍽 심각해졌다. 나는 1은 사라졌으나 메시지가 돌아오지 않는 채팅창을 응시하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네가 몽마한테 정기 빨려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귀신 때문에 심장 마비로 죽는 게 빠를까?”
“닥쳐.”
“아니지. 전날에 떨려서 심장 마비 오는 거 아니야?”
“닥치라고.”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PK가 다시 한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제 딴에는 위협하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하나도 안 무섭다.
안 그래도 신경쓸 거 많아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잘 됐지. 귀신 무서워하는 PK를 놀리고 있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어쨌든 바로 다음 주 수요일이잖아. 계속 쫄아 있으면 도움될 거 하나도 없으니까 심호흡하는 법이라도 배워 와.”
현장에서 도망치면 낙원교 흑막이 배꼽 잡고 구를 것 같지 않냐? 나는 굳어 있는 PK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금 느끼는 게 과도한 분노든 과도한 공포든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그 뒤로 PK와 간단한 잡담을 하다 헤어졌다. 평생 쌓을 업보 스택을 오늘 다 쌓은 기분이다. 속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획은 세웠어요?
자리를 비웠던 네정좋은 우리가 헤어진 후에야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네정좋에게 어깨를 으쓱여 대답했다.
-혹시 성대를 잃으셨어요?
불퉁한 얼굴의 네정좋이 난데없이 시비를 걸었다.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전 목이 안 잘려서 머리가 잘 붙어 있어요.”
-지금 머리 있다고 유세 떠시는 거예요?
어디 가서 뭘 하고 왔길래 화가 난 거지. 나는 계속 시비를 걸어오는 네정좋을 무시했다. 오늘은 그래도 좋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