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위기를 만들기 위해 납치당하면 어떨까?”
“미쳤어?”
특성을 발현하려면 제대로 위협을 당해야 했다. 나는 PK에게 넌지시 의견을 건넸다가 단번에 까였다.
“알겠어. 그럼 다른 쪽으로 가자.”
이 동네 한국이 아무리 험해졌다지만 그래도 치안 괜찮은 나라인데, 거기서 납치라니. 그쪽 일 종사자가 뜯어 말리니 얌전히 그만두도록 하자.
“그럼 번지점프라도 할까?”
“번지점프?”
“심장 쫄깃해지는 경험이 될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PK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딴에는 퍽 진지하게 한 말인데, 저쪽에서는 어지간히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네 놀이기구를 해달라고?”
“놀이기구가 아니야. 안전장치지.”
“그게 그거 아니야?”
그렇지만 고층에서 안전장치도 없이 맨 몸으로 떨어질 수는 없잖아. 나는 PK를 끌고 가 다이빙하고 착지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특성이 바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고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초반에는 기대를 갖고 바보 같은 짓을 반복했는데 후반 가니까 그저 귀찮아졌다. 나는 웃기지도 않은 번지점프를 적당한 선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
“우리 그냥 타워나 오를까?”
“찬성.”
빠른 포기를 가장 환영한 건 내 목숨을 온전히 쥐고 있던 PK였다. 특성을 발현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조절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걸 보면.
밤이 늦었으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타워로 향했다. 한밤중이야말로 사람들이 없어 타워 오르기 제격이다. 밤엔 경비만 뚫으면 되지만, 낮에는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하니까.
타워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구 평화가 먼저 아니겠는가.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나와 PK는 밤새 타워를 올랐다. 쓰러뜨린 괴물의 숫자가 두 손은 물론이고 두 발에도 꼽을 수 없는 숫자가 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거…… 내가 막타를 쳐야 하나 봐.”
극야와 계약 후에 얻은 영혼을 보는 능력. 이 세계에 존재하는 괴물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
단순히 보이는 부분을 타격하면 영혼에 손상이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혼을 보는 내가 직접 타격해야만 완전한 소멸을 이룰 수 있었다.
“아무래도 빨리 특성을 되찾아야겠는데.”
PK의 특성에 찌그러진 괴물이 스르륵 사라져갔다. 고된 강행군 때문인지 PK는 피로에 쩔어 있었다.
“이 정도 올랐으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각성했겠는데.”
“내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긴 하지.”
“잘난 척은.”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잘난 거야.”
나는 물 먹은 미역처럼 기운 빠진 PK를 툭 치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이 세계는 나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였다. 한 세계가 특정한 인물 하나만을 위해 굴러가려면 대체 어떤 위업을 세워야 할까?
죽지 않는 악마쯤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 전에 우리 집 악마가 된 극야를 떠올렸다.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세상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돌아가는 건 무슨 기분일까?
“오늘은 이쯤 하고 가자. 이따 밤에 다시 만나.”
나는 건물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으나,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그저 기우이기를. 보통 이런 생각을 하면 기우로 끝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우이기를.
나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짧게 소원을 빌었다.
* * *
그다지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나와 PK는 그동안 수십 마리의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았고, 세상은 조금 더 흉흉해졌다.
하지만 그 세상에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한 줄기 빛이 있었으니!
“오늘따라 빛이 나시네요, 하람 씨.”
“입에 발린 말 안 통해요.”
하람이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노란 광채를 두른 야구 방망이는 다리 16개 달린 거대 거미의 다리 두 개를 날려버렸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지금 힘없는 시민을 구하고 계시잖아요. 누가 보면 히어로라고 부르겠네요. 그쵸?”
“입 좀 다물어 봐요.”
깡-!!
하람이 분노의 스매시를 날리자 거미의 다리가 하나 더 날아갔다. 과연 적을 상대할 때는 하람의 특성과 견줄 수 있는 게 또 없지. 선과 악을 자기 자신이 판단하는 점에서 자기 적을 모두 악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끈적끈적한 거미줄에 달라붙은 신발에서 발을 빼냈다. 거리에는 하람 말고도 다른 각성자가 두어 명 더 있었지만,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건 단언컨대 하람이었다.
“파이팅!!”
거리의 모두가 하람이 고군분투하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미국 슈퍼 히어로 물에나 나올 상황이냐. 괴물의 도시 습격이라니.
바깥이었다면 이민 간다, 뭐 한다 진작 난리가 났을 텐데, 이 동네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더 태평했다. 안전 불감증도 어지간해야지, 이 정도면 그냥 뇌를 어디다 두고 온 것 같다니까?
이런 걸 보면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한쪽 신발을 버려둔 채로 절뚝절뚝 길을 걸었다. 양말에 닿는 맨 땅이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하람이 각성했으니 이젠 정말로 거의 다 각성했겠구나.
러브리스가 아직 각성했다는 소릴 안 했으니 S랭크 밑으로 몇 명 남은 것 같고. 그럼 나머지는 다 각성했나?
나는 괴물이 돌아다니는 거리를 태연하게 거닐었다. 예전 같았으면 허우대만 멀쩡한 유령이 기웃거리면서 무슨 말이라도 했을 텐데, 이제는 유령이 곁에 없다.
수상한 봉고차를 뒤쫓아갔던 우리 집 유령은 그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길을 잃은 걸까, 아니면 납치당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성불?
“혹시 네정좋 만나셨어요?”
나는 혹시라도 네정좋이 성불했을까 봐 질문을 툭 던졌다.
【“아니요.”】
우리 집 악마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대답했다. 누가 보면 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줄 알 정도로 빠른 대답이었다.
“그럼 성불은 아닌데.”
그 얼빠가 극야와의 만남이 아닌 다른 일로 성불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검은 봉고차를 따라간 곳에 극야와 비등하거나 그보다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가 있으면 모를까.
하지만 극야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아니어서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거다. 평범한 인간이 그 수준의 얼굴을 가지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가? 전생에 차원 수억 개를 구해야 하나?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는 네정좋이 성불하지 않았으리라 단정 지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지? 정말로 길이라도 잃었나?
콰과과광-!!!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화려한 불꽃이 붉은 빛깔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하람이 상대하고 있는 거미보다 훨씬 작은 거미가 불에 타들어가는 게 보였다.
여기 어디에 불을 내뿜는 각성자가 있나 보네. 나는 근처 전봇대에 기대어 서서 꽁꽁 언 발을 바닥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지금도 발에 감각이 없긴 한데, 쉬지 않고 더 걸었다간 영영 발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애완 유령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을 내어 고민할 만한 일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멍청해보여도 정말로 멍청한 건 아니다. 평소에 같이 다니는 레터나 러브리스가 너무 똑똑해서 그 반작용으로 바보 같아 보일 뿐이지.
오히려 본능적인 감각은 다른 둘보다 훨씬 뛰어날 텐데. 예전에 레터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운운하면서 네정좋의 본능에 대해 거창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나는 다른 거면 몰라도 본능 면에서는 레터의 장황한 설명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번 같이 다녀보니까 알겠단 말이지.
키에에엑-!!
작아도 나보다는 훨씬 큰 거미가 16개의 다리를 뽐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거미를 피해 신속하게 움직이며 생각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을 때, 네정좋이 길을 잃은 건 아니고…… 아마 둘 중 하나 아닐까?
1번.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갖추고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외계인을 보았다.
2번. 그쪽에 나 말고도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나보다 외모가 뛰어난.
생각해본답시고 생각해본 건데 레파토리가 은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나 알기 쉬운 사람인 걸 어쩌겠어. 이런 취급당하지 싫으면 평소에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어야지.
퍼엉-!!
날 뒤쫓아오던 거미가 날아오는 불씨를 맞고 펑 터졌다. 나는 까맣게 탄 거미의 잔해에서 일렁이는 거미의 영혼을 신발로 눌러 밟았다.
잿더미가 된 육신 위에서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던 불길이 완전히 꺼졌다. 거대한 몬스터면 몰라도 작은 것들은 내 선에서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튼 네정좋이 사라진지 벌써 5일 째다. 5일이면 허구한 날 뛰어대는 윗집이 조용해도 신경 쓰이는데, 애완 유령이 돌아오지 않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나는 엉망이 된 거리를 쭉 둘러보았다. 거리가 엉망이 되고 도로가 거미줄로 덮여 찐득거려도 사람들은 제각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출근하겠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니.
나라면 차라리 지하철을 타겠어. 나는 엉망이 된 지상을 피해 지하철 역 안으로 진입했다.
지하는 난리가 난 지상과 다르게 아주 평온했다. 누가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줄 알겠다.
지하철역에는 크고 작은 가게가 즐비해 있다. 나는 역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캔커피를 사서 나왔다. 팝콘도 살까 잠시 고민했는데, 야구 방망이 휘두르는 하람 옆에서 그걸 먹고 있다간 몬스터 다리 대신 내 머리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특별한 재료 없이 에그 샐러드만 들어간 샌드위치는 아주 무난한 맛이었다. 나는 출구 계단 근처에 비스듬히 서서 기계적으로 음식물을 씹었다. 저 위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계속 저 모양 저 꼴이면 올라가긴 글렀다.
딱히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먹는 데만 집중해서인지 유달리 식사 속도가 빨랐다. 나는 쓰레기를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캔커피를 땄다.
-저는 코코아가 좋아요.
어깨에서 익숙한 한기가 느껴진 건 그 때였다.
-이제 먹을 수는 없지만요.
5일이나 코빼기도 안 보여서 사람 걱정을 시킨 유령이 나타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네정좋을 향해 캔 커피를 휙 뿌렸다.
-뿌려도 안 맞아요.
지나가는 사람이 허공에 커피를 뿌리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커피를 피해 일단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대체 어디 갔던 거예요?”
그 봉고차가 뭐길래 며칠 간 실종을?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음…….
머리를 이상하게 맞춘 유령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구석으로 들어가며 재차 물었다.
“그 봉고차는 뭐였어요?”
-안에 괴물이 들었어요.
“예?”
며칠 만에 돌아온 네정좋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게 말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봉고차가 멈춰선 곳은 한 마을이었어요.
고저없는 목소리가 평소의 네정좋과 같았다. 지나치게 담담해서 괜히 사람 머쓱해지는 그 목소리 말이다.
-이상할 정도로 색다른 풍경의 마을이요.
분명히 평소의 네정좋과 다름없는데…… 이상하지. 나는 왜 그가 불안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걸까?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