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특성을 발현한 PK는 그대로 랍스터를 뭉개버렸다. 시원하게 박살 난 껍질 사이로 거대 랍스터의 속살이 보였다.
-맛있겠다.
유령이 된 후로 취식이 불가능해진 네정좋이 입맛을 쩝 다셨다. 저건 아무리 봐도 못 먹을 것처럼 생겼는데. 속살이 검잖아.
특성을 완전히 발현한 PK 안쪽의 불꽃이 익히 아는 라임빛으로 타올랐다. 눈 색도 어느 순간 라임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콰직!!
괴물의 껍질이 꽈드득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다. 두꺼운 꼬리부터 단단한 머리까지 남김없이 찌그러지며 공처럼 말리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선명한 빛깔의 불꽃이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저게 저렇게 강렬하게 불타는구나. 나는 PK 안의 불꽃을 바라보며 감탄을 삼켰다.
쿠웅-!!!
완전히 뭉개진 괴물이 바다로 넘어가며 물보라를 튀겼다. 랍스터를 처리한 PK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라임색 눈이 보였다.
“너…….”
일그러진 얼굴이 마귀가 따로 없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슬 뒷걸음질 했다.
“특성 생겼네. 축하해.”
“널 믿으라며.”
“그래. 날 믿어서 생겼잖아.”
원래 각성은 죽기 직전에 하는 거 몰라? 눈앞에 주마등 쫙 펼쳐지면서 ‘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서 각성하는 거잖아.
“사자는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린대. 내 맘 알지?”
물론 사자가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다. 애초에 사자는 절벽이 있는 지역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쓸 만한 우화는 이것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나는 필사적으로 내 심정을 어필했다.
“네가 사자야? 장난해?”
하지만 어중간한 어필은 어필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도리어 화만 부른 것 같았다. 이거 참 어렵네.
잘못 처신했다가는 괴물이 아니라 PK한테 죽겠는데? 나는 내 옆에서 멍하니 랍스터를 쳐다보고 있는 네정좋을 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뭘요?
“아까처럼 쟬 통과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집 악마에 이어 우리 집 유령이 된 네정좋이었다. 자기도 얹혀산다는 생각은 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참 양심적이었다.
PK는 허공을 보고 속닥거리는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귀신같은 하람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귀신같은 감을 가진 인간답다고 할까.
“너 지금-”
PK가 입을 열기 무섭게 네정좋이 PK의 몸을 통과했다. PK는 그 행동에 소름이 바짝 돋았는지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파드득 떨었다.
“미안! 그래도 내 덕에 각성했잖아!”
나는 동네 떠나가라 소리치며 후다닥 도주했다. PK와 몸이 겹쳐져 있는 네정좋이 날 보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려 주었다. 몰랐는데 너 뜨거운 의리를 가진 유령이었구나. 나도 네정좋을 보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아까 경찰을 부른 탓일까.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쳐야겠네. 나는 뒤에 남겨둔 PK를 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세상에는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있는 법이다.
* * *
“그 시간에 항구에는 왜 계셨던 겁니까?”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있다고 세상 살기 쉬운 건 아니죠. 나는 PK를 버리고 도망친 죄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별건 아니고 조사 차원에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껍질이 박살나고 공처럼 말린 괴물이 바다에 쓰러져 있는데 수상하지 않고 배겨?
특성이 생긴 PK는 무사히 도망갔는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늦은 시간에 경찰서로 끌려가 뜬금없이 아련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고백했다가 차여서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밤늦게 항구에 있을 이유를 생각하는 건 정말 어렵다. 나는 실연의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열렬히 연기했다. 우연희 하면 연기. 연기 하면 우연희.
-표정이 로봇 같아요. 고기반찬 없는 밥상을 생각해요.
이 분야 프로인 네정좋이 한몫 거들어준 탓에 내 연기는 누가 봐도 믿을 정도로 완벽해졌다. 평소에 A급이었다면 지금은 S급이라고 할까.
우수에 찬 시선부터 아련한 목소리까지, 역대급 인생 연기. 이번에는 지나치게 연기를 잘한 나머지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워했다.
“세상에…….”
괴물을 물리치러 같이 파견 나온 이름 모를 각성자가 탄식하며 등을 두드려줬다.
나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찍어내며 슬퍼했다. 양심에 찔리진 않았다. 정말로 차이긴 차였잖아. 반서준은 이용당했군요.
“너무 슬퍼하지 마, 아가씨!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네.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각성자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명언을 남겼다. 자세히 보니 사헌 길드 등산모임에서 한번 봤던 얼굴이다. 세상이 이렇게나 좁았나 싶다.
-혹시 정말로 차였어요?
요즘 따라 질문이 많은 네정좋이 실례되는 소리를 했다. 나는 네정좋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조사에 임했다.
“그럼 괴물이 원래 그 모습은 아니었던 겁니까?”
“네. 원래는 거대 랍스터였어요. 앞발이랑 꼬리가 아주 단단한 랍스터요.”
“직접 물리치신 건 아니시고요?”
“전 각성자가 아니거든요. 신고한 후에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괴물이 찌그러지더니 바다에 처박혔어요.”
나는 열과 성을 다해 거짓 진술을 했다. 항구에 일부러 PK를 데려가서 등을 떠밀었다고 말했다가는 인생 종 치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두부 먹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괴물이 찌그러졌다고요?”
“네. 콱! 소리를 내면서 찌그러졌어요.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괴물을 물리친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십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밤이었고, 근처가 너무 어두워서요.”
PK의 인상착의를 멋대로 말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생길 게 뻔했다. 나는 곧이곧대로 말하는 대신 키가 작은 여성을 묘사했다. 누가 봐도 PK는 아닌 것 같은 사람 말이다.
당시 상황과 인상착의를 들은 그들은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나이가 좀 있는 여성. 키가 작고 파마머리.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추정…….”
“현장 보니까 적어도 A급이야. 가속 특성 있는 걔랑 실력이 비슷한 것 같아. 사려? 윤사려인가 하는 그 애.”
“특성도 염력이나 중력 조작으로 추정됩니다. 말려 있었으니까 전자가 더 유력해요.”
어중이떠중이는 많아도 제대로 된 각성자는 없다더니. 그들은 새로운 각성자의 등장에 어지간히 흥분한 모양이었다.
-바보들.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의 네정좋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나머지 질문에도 착실히 대답한 후에 경찰서에서 나왔다.
지하철은 물론이고 버스도 다 끊긴 시각이었다.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지구대가 아닌, 각성자가 상주하는 큰 경찰서에 온 덕에 항구에서는 꽤 멀어졌다.
괴물 목격 진술 같은 건 조금 더 큰 곳에서 하는구나. 경찰청까지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집에는 어떻게 가게요? 여긴 서울도 아니잖아요.
내 뒤를 졸졸 따라 나온 네정좋이 물었다. 그렇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서울에는 항구가 없으니까.
“글쎄. 돌아가서 차 태워달라고 할까?”
그러면 이제 차여서 항구까지 왔다가 경찰차 타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이 되는 거다. 거 내가 아는 누구한테 말했다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할 것 같은데.
나는 불이 거의 다 꺼져 깜깜한 시내를 걷다가 어느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이 근처에서 그나마 가장 밝은 곳이었다.
-대책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대책 없어 보이는 유령이 나를 나무랐다. 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나는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고 주소록에 들어갔다.
“얘한테 전화하면 받을까?”
-저라면 안 받아요.
제대로 저장해 놓은 PK의 전화번호를 가리키며 말하자 네정좋이 고개를 저었다. 너 참 칼 같구나. 뜨거운 의리의 유령 어디 감?
그래도 이 상황에서 믿을 건 PK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지. 나는 PK에게 전화를 걸고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자잘하게 늘어선 가게와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 그리고 중간의 도로.
차 하나 없는 휑한 도로 끝에서 검은 봉고차가 등장했다. 나는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봉고차를 보며 말했다.
“저게 뭘까요?”
-납치범?
네정좋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대답했다. 바로 떨어지는 머리를 휙 잡아채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유령에 잘 적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까맣게 썬팅 된 창은 안에 있는 것이 하나도 안 보일 만큼 두터웠으나, 계절은 마침 겨울이었다.
-손자국이 찍혀 있어요. 지금도 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봉고차의 트렁크에서 잇달아 쿵쿵 소리가 났다. 나는 네정좋을 보며 소곤거렸다.
“괜찮다면 확인하고 올래요?”
극야는 왜 네정좋을 내게 남겼을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나만 볼 수 있는 유령. 물리적인 법칙이 통하지 않으며, 나랑만 소통할 수 있는 유령.
극야는 뜻 없이 네정좋의 유령을 남기고 갈 사람이 아니다. 네정좋의 특성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가 죽지 않도록 막았을 거다.
하지만 네정좋은 죽었고, 유령의 형태로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그가 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명확했다.
-그럴게요.
네정좋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나는 봉고차를 뒤따라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또한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보세요.”]
동시에 PK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멀어지는 네정좋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경찰서에서 나 끌고 오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겨울밤에 바다와 가까운 지역이라 그런지 말도 안 되게 추웠다. 나는 꽁꽁 얼어서 감각이 없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나 좀 구하러 와줘. 조만간 얼어 죽을 것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얼어 죽으면 전 세계적 손해라니까. 세계 수준이 아니지. 전 차원적 손해라니까?
응답하지 않는 악마는 필요 없다. 인류가 발전하는 데 악마가 기여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PK가 특성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특성을 되찾을 차례였다.
타워를 올라 특성을 되찾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는 이번 일로 특성을 되찾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나한테 복수할 아주 획기적인 방법이 있어. 들어볼래?”
일부러 위기에 처하는 게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네정좋이 사라진 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딘데.”]
PK는 일단 내 말을 들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