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예전에 편애랑 악마 계약에 관하여 말한 적 있다. 편애와의 계약 후에 남의 생각을 듣고 살기 싫다고 투덜거리면서 나눈 대화였지.
편애와 마지막으로 대화하고 난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우리가 나눈 대화 전부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개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색 눈보다는 낫지.”】
남의 생각 읽기라니. 패시브가 너무 더러운 거 아니냐는 항의에 그런 말이 나왔었지.
【“걔랑 계약하면 망자가 보여. 귀신 좋아하면 어필해 보든가.”】
극야와 계약하면 망자가 보인다고. 자색 눈의 영역은 죽음이니 그것과 관련된 패시브가 생길 거라고.
편애 왈 적용할 수 있는 패시브는 단 하나이므로, 남의 생각을 듣고 싶지 않으면 다른 악마와 계약하라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악마라고 해 봤자 극야밖에 없지 않던가. 나는 다른 악마와의 계약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극야랑 계약하면 망자 본다며? 전 귀신을 보면서 살고 싶지는 않은데요. 밥 먹다가 체하겠다.
망자를 보고 산다니. 이 무슨 하람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 눈 좋은 하람도 망자를 보진 않았다고! 내 눈 그렇게 끔찍한 걸 보게 되어도 괜찮은 건가?!
“……그런 생각을 했었나.”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고 있을 거다.
극야와의 계약으로 보게 되는 망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최초의 인류부터 현대에 죽은 사람들까지 보게 되면 지구가 터지다 못해 내 뇌가 터지는 게 아닌가?
【“바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편애는 멍청한 사색에 잠긴 날 보며 일침을 날렸다.
【“죽은 자는 기본적으로 저승에 가.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그럼 망자를 어떻게 봐? 할로윈에만 내려와?”
【“하지만 세상에는 늘 예외가 있는 법이잖아. 간혹 저승에 가지 않고 여기에 남는 영혼도 있어.”】
“왜 남는데?”
【“이승에 미련이 남아서.”】
무슨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귀신 사연 같았다. ‘흑흑, 낭군님. 부디 소녀의 한을 풀어 주소서. 저승에 가고 싶어도 한이 너무 깊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나오는 귀신 말이다.
“그렇구만.”
그럼 이승에 남은 귀신이 한 트럭이겠네. 한 트럭 가지고 되나? 안 될 듯. 한 초호화 유람선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될 것 같았다. 수천 개는 되어야 비비겠는걸?
아무튼 나는 편애와의 문답을 통해 한국 고유의 정서인 한이 저쪽 차원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족 정서가 세계화도 아니고 차원화 되다니. 국뽕 유튜버들이 알면 차원 단위 국뽕 한 사발 먹여 주겠군.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넘겼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극야와 계약을 하게 될지.
극야와의 계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내가 색욕왕의 함정에 빠져 이 동네로 오게 될 거라고.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넋 나간 친구 앞에 쭈그리고 앉은 네정좋이 팔을 위로 들어 휘적거렸다. 반투명한 그의 몸이 살아있는 레터의 몸을 통과했다.
-맞다.
손뼉을 짝 하고 친 네정좋이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가스 불 안 잠갔어.
그건 진짜 큰일 날 소리 아닌가?
나는 넋 나간 레터 앞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옆구리에 네정좋의 머리를 끼운 채였다.
“여보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사람 머리가 주는 파급력은 무엇보다 컸다. 레터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눈 감은 네정좋의 머리를 보며 벌벌 떨었다.
-우와.
몇 분 전까지 머리의 주인이었던 누군가는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기 머리가 잘려서 남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걸 저렇게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니. 정말 굉장한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었다.
“곧 경찰이 올 것 같은데.”
총을 도로 집어넣은 PK가 텅 빈 영화관 내부를 훑으며 말했다. 영화관에서 괴물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상영관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빠져나간 후였다.
“경찰 오면 귀찮아지는데.”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네정좋의 머리를 바닥에 곱게 내려놓았다. 쓰러져 있는 몸뚱이에 붙여 줄 수는 없어도 이 정도면 굴러가지는 않을 거다.
머리를 바닥에 놓기 무섭게 옆에서 기웃거리던 네정좋이 머리 앞으로 다가왔다. 충격이라곤 조금도 받지 않은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위로해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일단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요.”
자기 머리 앞에 쭈그려 앉은 네정좋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머리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그런 네정좋을 무시하고 레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하 씨가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실제로 네정좋은 저기서 자기 머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 불 안 잠그고 나오신 모양이니까 집에 빨리 돌아가서 확인하시고요.”
다른 말이었다면 대충 흘려넘길 텐데, 가스 불이라니. 주의를 주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저희 집 가스 불 잠그고 나왔는데요.”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레터가 뻣뻣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건 그때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이었지. 평소에 같이 살 리가 없구나.
상황이 너무 급박하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한 수였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어 말을 정정했다.
“죄송해요. 가스 불은 없던 얘기로 해 주세요.”
자기 머리 앞에 앉아 있는 유령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나를 빤히 응시했다. 괜히 가스 불 얘기를 꺼낸 것 같았다.
나는 황급하게 백스텝을 밟아 사건 현장에서 물러났다. 경찰 조사를 받았다가는 그대로 감방에 갈 PK 또한 내 뒤를 따랐다.
현장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의 레터만이 남았다.
-제 말 들려요?
유령을 포함해서도 레터만이 남았다.
-연기 진짜 못 하는 거 알아요?
졸지에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 * *
“6,500원입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손님이 카드를 슥 내밀었다.
나는 카드를 받아 손님 앞에 있는 카드 단말기에 쑤셔 넣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이런 손님이야말로 알바생 입장에서 가장 화나는 손님이었다.
“봉투 드릴까요?”
귀에 이어폰 꽂고 휴대폰 만지작거리느라 질문에도 묵묵부답이다.
-봉투 드릴까요?
카운터 안쪽에서 우리를 쭉 지켜보던 네정좋이 카운터를 스르륵 뚫고 나갔다. 이어서 손님의 몸을 통과하자 손님이 어깨를 파드득 떨며 한쪽 이어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봉투 드릴까요?”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물었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 이어폰을 주운 손님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어디 가서 냉수라도 맞고 온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금세 손님을 정신 차리게 한 네정좋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편의점 안을 돌아다녔다.
-이 근처엔 유령이 많이 없어요.
끔찍한 소릴 하는 것치곤 퍽 해맑은 얼굴이다. 나는 편의점을 나가는 손님의 뒤통수에다 대고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그런지 이번에도 듣지 못한 눈치였다. 이제 계산할 것도 없는데 듣든지 말든지. 평소에는 그래도 몇 번이나 다시 말해야 했는데 네정좋 덕분에 편하게 처리했다.
“장례식장에는 다녀왔어요?”
나는 충전기에 꽂아 둔 휴대폰을 쥐며 물었다. 네정좋은 습관처럼 고개를 기울였다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머리를 받쳐 들며 대답했다.
-제 장례식장에 누가 오는지 알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누가 왔는데요?”
-모르는 사람들이요.
저 사람의 인간관계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아니지. 이미 죽었으니 인간관계를 걱정할 단계가 아닌가? 나는 뺨을 긁적거리며 고민했다.
“지금도 장례식장에 있어야 하지 않아요?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니, 제가 안 괜찮다는 소리인데요.”
안 그래도 망자를 보게 된 것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옆에서 얼쩡거리기나 하고 말이다. 게다가 어제 현장에서 도망치기 전에 레터한테 말하고 왔단 말이야. 언제나 네정좋이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레터가 듣기에는 그게 무슨 헛소린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자기 입으로 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친구가 자기 죽음에 충격받았는데 위로라도 하러 가 주겠지.
-힘내세요.
근데 이 유령은 자기 친구를 따라가긴 무슨 그대로 날 따라왔다.
-절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유령이 된 그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 극야가 그때 한 말을 되짚어 보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특성을 얻어 탑을 오르는 것은 내가 극야와 계약을 하면서 해결되었고, 네정좋 문제도 네정좋이 죽어 유령이 되면서 해결되었다!
자기 입으로는 질투가 어쩌구저쩌구하더니 결국 나랑 계약하고 네정좋을 유령으로 만들려고 거기서 안 나타난 거구나.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 남으려면 미련이 남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아주 강한 미련이.
저 생각 없고 미련 없고 미래 없어 보이는 네정좋에게 저승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미련이 있다니. 그게 대체 뭐지?
-늦게 자면 피부에 안 좋아요.
……라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제 피부 건강까지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극야를 못 만난 것 때문에 이승에 남은 것 같다. 그래서 극야가 네정좋을 안 만나 준 것 아니냐고.
그게 아니면 만나지 않을 필요가 있나? 굳이? 전투력 측정기도 아니고 외모 측정기인 네정좋은 그 누구보다 부리기 쉬운 상대일 텐데?
-피부 건강은 젊어서부터 챙겨야 해요.
본능이 남들보다 뛰어난 네정좋은 그를 볼 수 있는 게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눈에 띄게 온순해졌다.
레터와 13년 지기라더니, 레터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구나. 정말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아는 인간이다. 자기 주제 파악을 이렇게나 빠르게 마치는 걸 보면.
나는 이제 피부 건강까지 챙겨 주는 네정좋을 대충 무시하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경찰 조사야 어제 마쳤는데 이유 없이 불안했다.
[준비 완료]▶
PK가 잡혀갔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인가. 오늘 타워를 오르기로 했는데 잡혀가기라도 했다가는 PK의 인생과 동시에 내 계획도 박살 난다.
그래도 제대로 메시지가 도착한 걸 보면 알아서 잘 피한 것 같고?
나는 휴대폰을 다시 엎어 두고 멍하니 편의점 문을 바라보았다. 희끄무레한 색감의 네정좋이 잘려서 고정이 안 되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애를 쓴다.
“어서 오세요.”
그래도 유령이랑 같이 카운터 보고 있으니까 덜 심심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