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특성 발전은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라지만, 이렇게나 빨리 발전하는 게 가능한가?
나는 두 사람의 뒤를 밟으며 사색에 빠졌다. 사실 내 주변에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있어 봤자 극야 정도.
하지만 이 일은 극야의 소행이라기엔 방식이 깔끔하지 않다. 극야가 뭐하러 내 옷자락을 자르면서 관심을 요구하겠는가. 그냥 앞에 딱! 나타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그러면 이 장난은 누구의 소행인 걸까? 나는 PK가 말한 ‘두 명’에서 감을 잡았다. 게다가 한 명은 꽁꽁 싸매고 있다잖아.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지.
“저걸 잡아다가 혼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큰 소리로 땅땅 외치더니만,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구나. 그것도 특성 발전까지 해 와서.
“사람 묻고 싶어?”
혼자서 심각하게 중얼거렸더니 옆에 있는 PK가 묻는다. 묻긴 뭘 묻어. 나는 널 묻고 싶다.
“널 묻기 전에 조용히 해.”
“날 어떻게 묻으려고? 내가 널 묻는 게 빠르겠다.”
“그랬다간 악마를 보게 될걸.”
악마도 그냥 악마가 아니지. 이 동네 주인공 악마다. 회귀자로도 모자라 흑막 타이틀까지 달았는데 얼굴마저 세계관 최강인 악마. 나열하고 보니까 현실감 없어서 웃기다.
“악마? 괴물?”
극야를 모르는 PK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나는 PK에게 극야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가졌으나, 설명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런 게 있어. 알면 다쳐.”
상식 외의 존재를 설명하기란 이다지도 힘든 법이다. 그게 이 세계에 없는 것이면 더더욱.
“뭐야. 김 빠지게.”
눈을 가늘게 좁힌 PK가 툴툴거렸다. 우리는 그새 목표물과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목표물의 저항 또한 상당했다. 그는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툭-.
나는 내 앞으로 떨어진 사탕을 흘끗 바라보았다. 사탕 장사라도 하는 건지 이번에는 다른 맛이다. 사탕도 한 종류만 먹으면 심심하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안타깝지만 낚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사건의 진상을 안 이상 더는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나와 PK는 떨어지는 사탕을 무시하고 직진했다. 사탕이 통하지 않으니 동전을, 동전이 통하지 않으니 지폐를.
오만 원권 지폐마저 무시하고 지나가자 이번에는 비둘기를.
살아있는 비둘기가 눈앞으로 추락하는 걸 보게 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아악!! 이게 뭐야!!”
비둘기를 무시하고 걸음을 서두르자 지나온 장소에서 비명이 들렸다. 실내에 비둘기를 반입하면 어떡해. 아무리 급해도 정도껏 해야지.
“끄아아악-!!”
비둘기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지 연이어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을 듣고 눈썹을 꿈틀거린 PK가 겉옷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코끝에 희미한 혈향이 스쳤다. 나는 내 앞으로 추락한 비둘기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탕-!!!
이어서 격발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괴물이야.”
총을 밖으로 꺼낸 PK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천장에 매달린 괴물이 머리 두 개를 손에 든 채로 히죽 웃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사람의 머리는 기이할 정도로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달콤한 매점 음식 냄새에 불쾌한 피 냄새가 섞였다. PK는 이쪽으로 손을 뻗어 오는 괴물에게 총을 쐈다. 총알은 괴물의 손에 정확히 틀어박혔지만, 큰 데미지는 주지 못한 것 같았다.
평소에는 눈앞으로 비둘기가 떨어지는 것에도 놀라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눈앞으로 떨어져도 놀랄 수 없었다. 놀라서 팔짝 뛰는 순간 내 목이 날아갈 테니까.
이쪽으로 다가오는 괴물의 손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당장 저 손에 맞설 방법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극야를 부르는 것?
총을 들고 있는 PK에게 의지하고, 극야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특성이 없는 나는 이렇게 무력하기만 한 존재인가?
【“이름을 불러주세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른다면, 나는 언제든 당신의 곁으로 갈 거야.”】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뭐 해, 뛰어!!”
PK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쥐었다.
탕-!!
괴물의 머리를 겨누고 발사된 탄환이 괴물에게 닿지 못했다. 괴물은 여전히 히죽 웃는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나는 뻗어 오는 손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당장의 급박한 순간을 위해 내 인생 전부를 저당잡는 계약을 한다면,”
다가오는 괴물의 손목에 미세한 금이 갔다. PK가 얼굴을 구긴 채로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건 멍청한 건가?”
금이 간 괴물의 손목이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검게 뚫린 손목 안쪽의 모양새는 그것이 인간을 모방한 생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어딜 봐도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다.
철퍽-.
바닥에 고인 검은 물 위로 괴물의 손이 떨어졌다. 괴물은 잘린 손목을 보며 웃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괴물의 시선 끝에는 마스크를 턱 끝까지 내린 네정좋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네정좋 뒤에 숨어 있는 레터는 덤이다.
“당장의 급박한 순간은 지금을 말하는 거지?”
새로운 목표물을 찾은 괴물이 네정좋을 향해 달려갔다. 네정좋은 상식을 초월한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상상 이상의 반응이다.
“그렇지.”
네정좋은 공간을 자르거나 이물질을 관통시켜 데미지를 입히는 식으로 괴물과 대치했다. 레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넨 볼펜을 괴물의 목에 쑤셔 박는다거나, 아까 손목을 자른 것처럼 직접 자르거나.
날 쫓아다니며 사탕을 던진 범인은 예상대로 네정좋이었다. 나는 비둘기 테러범에서 영웅이 된 네정좋의 활약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직도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PK는 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말했다.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혹자는 남은 인생을 저당 잡으면서까지 살아남아야 하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철컥.
탄창을 갈아 끼운 PK가 괴물의 머리통을 다시 노렸다.
“나라면 일단 살아남고 보겠어. 결국 기회도 살아 있어야 주어지는 거니까.”
탕-!!
격발과 동시에 총성이 고막을 때렸다. 귀가 먹먹해지자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당신의 소원을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어.”】
예전에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백화점 안 영화관이었지만, 어쩐지 바닷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함께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가요.”】
흐리게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묘하게 정중하고 묘하게 건방진 태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야! 야!! 유주하!!!”
잘린 손을 붙인 괴물이 네정좋을 향해 돌진했다. 뒤에 서 있던 레터가 기겁하며 그를 잡아끌었다.
미간을 좁힌 네정좋이 괴물의 목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공간이 반으로 접히며 괴물의 목이 토막 났다.
“피해!!!”
아니. 토막 나는 건 괴물이 아니라 네정좋 쪽이었던가.
괴물이 반절 잘린 목을 덜렁거리며 단면을 보여 주었다. 동시에 혀가 길게 뽑혀 나오고, 눈앞으로 피가 튀었다.
“안 돼!!!”
창백하게 질린 레터가 목이 없는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잘린 목이 바닥을 구른다.
공도 아닌 주제에 기막히게 잘 굴러온 머리가 내 앞에 놓였다. 나는 잘린 머리를 집어 들고 입을 열었다.
“인생 저당 잡히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은 당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이미 저당 잡힌 상태겠지.”
잘리기 전에 눈조차 감지 못한 머리였다. 남의 머리를 들고 혼잣말하는 인간이라니. 어느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터였다.
“나는 힘이 필요해.”
이런 같잖은 일에 휘말려서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지금이 끔찍했다.
“다시는 무력하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기만 하고 싶지 않아.”
누가 그랬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가지고 있다가 잃은 것이 더 허망하다고.
악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되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처음의 내가 어떤 이유로 극야와 함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부대로.”】
아마 그 시절의 내가 바란 것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
패닉에 빠진 레터가 다가오는 괴물을 보며 입을 벌렸다.
PK가 괴물을 향해 연신 총을 쏴 댔지만, 인간을 잔뜩 먹고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괴물에겐 총이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자. 끝없는 겨울의 주인.”】
수식어가 냉랭한 것과 다르게 만개한 봄꽃처럼 온화한 목소리였다.
【“인생을 저당 잡힌 건 당신이 아니라 나야.”】
세상이 느리게 일렁거렸다. 뿌옇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홀로 선명한 보랏빛이 보였다.
모든 생물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숨 쉬는 것을 생물이라고 불렀다.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이라는 긴 여행에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은 죽음 너머를 그토록 궁금해했다.
나는 죽음 너머를 보았다.
【“당신의 삶에 내 전부를 걸었으니까.”】
허공에서 나타난 극야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날개뼈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가 길었을 적에 저기까지 머리를 길렀던가.
검은 물과 피가 고여 얼룩덜룩해진 바닥에 한쪽 색이 바뀐 눈이 비쳤다. 그 순간, 캄캄한 밤처럼 모든 빛이 사라지고 오직 어둠만이 남았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우리는 레터를 위협하던 괴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괴물은 온데간데없지만, 나는 아직도 유주하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죽음의 너머에는 오직 악마밖에 없었다.
낙원교의 인간들이 저 악마를 끔찍하게 따르는 이유는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 오직 저것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뭐야.”
넋 나간 얼굴의 PK가 괴물이 있었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영화관 안을 가득 채운 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었어.”
“……괴물이?”
“응.”
“어떻게?”
방금까지만 해도 우릴 위협하던 괴물이 갑자기 죽었다니. 단번에 믿기 힘들 만한 이야기긴 했다.
“악마랑 계약했어.”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PK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너 그런 거 믿어? 사탄 숭배자 같은 거야?”
“차라리 사탄 숭배자면 편했겠다. 걔들은 내 소원이라도 들어줄 거 아니야.”
“네 소원이 뭔데?”
“서울에 내 집 마련.”
PK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레터 쪽을 빤히 응시했다.
-바보.
거기엔 레터의 뒤통수를 팍팍 때리고 있는 네정좋이 있었다. 목과 머리가 분리된, 다소 곤란한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