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머플러를 아래로 쭉 내린 반서준이 입술을 달싹거리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굉장히 말하고 싶지만,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서준 씨 말대로 위험한 일이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위험하다고 그냥 모른 체할 수는 없잖아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인걸요.”
망설이고 있다면 부추기면 되지. 나는 반서준을 자극하기 위해 혼자 열심히 떠들어댔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돕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잖아요. 위험에 처할 거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거고.”
이곳의 반서준이 선하고 정의롭지 않은 인물이라면 어쩌지. 말하는 동안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는 지금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 서준 씨를 도왔던 것처럼 그 사람을 돕는 것뿐이에요.”
다 말하고 나니까 양심에 찔리는데. 이거 너무 착한 척한 거 아닌가?
나는 기본적으로 내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 남을 돕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PK와 오래 알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이런 면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 동네 반서준은 나를 히어로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바깥의 반서준도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간에 문제가 있었던 탓에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닌가. 아직도 눈에 콩깍지가 씌여 있었던가?
“역시 이런 말은 곤란한가요? 곤란하시다면 잊으셔도 돼요.”
반서준에게 도움을 받는 게 베스트긴 한데, 여기서 까여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재차 말하지만 사람은 스페어를 가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지.
반서준이 안 되면 하람을 구슬려 비눗방울한테 접근해보자. 저번에 대화하다가 얼핏 들은 말에 따르면 무슨 재벌 3세라던데.
재벌 3세라니. 이게 무슨 현대 판타지도 아니고. 여러모로 이 동네 장르에서 살짝 비껴나간 사람이다. 너무 소설 주인공 같은 포지션이라 접촉하기 싫어졌다.
“연희 씨.”
계속 머뭇거리던 반서준이 고개를 살짝 내리고 입을 열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는 사람이 사지로 뛰어든다는 말에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내지 않아요.”
아주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물론 민간인이 범죄와 얽힌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접근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도 않죠.”
“하지만 서준 씨랑 저는 목숨을 걸 정도로 깊은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잖아요.”
“그럼 연희 씨가 돕고 있다는 그분이랑은 연희 씨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깊은 관계인가요?”
반서준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아니죠?”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거야…… 그렇지. PK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목숨을 걸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7년간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에 있었다. 라면값도 더치페이 하는 피의 비즈니스 관계였다니까.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면서 혹시라도 생길 일에 대비해 번호를 달라고 하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자기 입장을 자각하고 계신 게 맞아요?”
반서준은 굉장히 친절한 목소리로 사람을 팼다.
“제가 정말로 평범한 경찰이었다면 연희 씨의 말을 믿지 않았겠죠. 연희 씨가 하신 말씀은 허무맹랑해요. 물증 하나 없이 믿기 힘든 것들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제 말을 믿어주시겠다는 소리인 거죠?”
“낙원교와 얽힌 일이니 믿을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정말 부드럽고 완곡한 말투였다. 나는 처음 보는 반서준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내가 아는 반서준이 맞나. 얘가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반서준의 인성 파탄을 A4용지 10장 분량으로 정리한 누군가의 베스트 글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반서준이 실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겠지. 나는 그 사람에게 이 자리에 있는 반서준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희 씨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실 필요가 있어요.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민간인 신분이잖아요.”
사람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던가. 역시 직접적으로 생사가 오가는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구나. ……그래도 너무 바뀐 거 아닌가.
사회생활 못하는 하람에 이어 사회생활 잘하는 반서준이라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물론 연희 씨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남을 도와도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하신 거겠죠. 하지만 세상일은 마음 같이 흘러가지 않아요. 과거의 제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나는 반서준이 하는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서준은 몹시 완곡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낙원교와 관련된 일에서는 손 떼시는 게 좋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제 번호도 알려드릴게요.”
“……그건 좀 곤란한데요.”
“부탁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낙원교 쪽은 저도 섣불리 손댈 수 없어요. 휘말리면 그대로 아웃이니까.”
낙원교는 대체 뭐 하는 집단이길래 민중의 지팡이조차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진짜로 권력층이랑 유착관계인가?
PK를 털어봤자 마약 사가는 애들이라는 것밖에 모르던데. 이 인간은 어디서든 쓸모가 없다니까. 나는 우산 손잡이를 흔들어 위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반서준은 내 휴대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번호를 내어줄 거면 처음에는 왜 거절한 거지?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반서준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참고로 나는 궁금한 걸 해결하지 못하면 밤에 잠을 못 자는 타입의 인간이다.
“그런데 서준 씨.”
“네?”
“번호 이렇게 쉽게 주실 거면서 처음에는 왜 곤란하다고 하신 건가요?”
내 돌직구에 반서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그의 표정을 보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역시 제가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죠.”
“예?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끝까지 배려는 해주시네요. 애써서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제가 마음의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게 중요하겠어요? 갑자기 데이트 공격을 시도한 제 잘못이죠!”
휴대폰을 건네는 반서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엉망진창인 표정을 보니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번호를 얻었어도 평소에 연락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제가 취향이 아니셔서 번호 주기도 싫어하셨는데, 지금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하기 위해 번호를 주신 거잖아요. 꼭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만 연락할게요. 일이 대충 정리됐다 싶으면 번호를 지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어얼대로 서준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반서준은 멘탈이 완전히 박살 났는지 로봇처럼 웃었다. 곤죽이 된 표정이 참 장관이었다.
“저희가 그래도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걸 데이트 공격으로 날려버렸네요.”
“그,”
“조만간 알바를 관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치안 안 좋은 동네라서 걱정이 많았는데, 잘됐네요. 서로 불편한 것보다 안 보고 행복한 쪽이 좋지 않겠어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제가 이렇게 말을 자르고 떠들어대는 데도 어울려주시다니.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지금 이 장소를 떠나지 않고 제 말을 계속 들어주시는 것도 다 서준 씨가 친절하셔서 그런 거겠죠.”
“…….”
나는 세상에서 제일 눈치 없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반서준이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제법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행동 하나하나 분노가 묻어났다. 누구 하나 패고싶어하는 얼굴인데? 이제야 내가 아는 반서준 같다.
이 장소를 조사해 보려면 선객인 반서준을 이곳에서 쫓아내야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입을 털었다. 거의 레터에 필적하는 신들린 말솜씨였다.
레터로 말하자면 내 앞에서 슈퍼주니어와 베갯머리송사 드립을 친 진짜 또라이었고, 사람 빡치게 하는 말솜씨로 여러 사람 뒷목을 잡게 한 죽음의 주둥아리맨이었다.
“아. 그런데 낙원교는 어떻게 아세요?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공권력과의 유착관계?”
“…….”
“설마 이 동네 경찰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반서준을 이 장소에서 쫓아내는 일은 고되고도 보람찼다. 반서준은 듣다 못해 패배 선언을 날리고 도망쳤다. 내 이미지 박살 나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린다.
어쩌면 다음에 만날 때는 바깥과 비슷한 태도를 취할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떠나는 반서준의 뒤에 대고 목청 크게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도망가던 반서준이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는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걸 답변해주다니, 의외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밖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천성이 저런 사람이 그따위로…….
아닌가. 반대로 이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나는 새삼 사회가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 * *
타워를 오르기 위해서는 특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성을 얻으려면 타워를 올라야 한다.
우리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나와 PK는 딜레마 속에서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혹시 기관총 같은 건 없어? 그걸로 벌집 만들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네가 벌집 될걸.”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나온 몬스터가 총알을 튕겨냈던가. 잘못하면 내가 죽겠네. 이제는 정말로 특성이 필요하다.
작전 회의는 착실하게 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하람에게 얻은 위치 정보를 모아 두억시니의 이동 패턴을 만들었다. 그 괴물은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특이 개체였다.
“괴물은 이제 찾고자 하면 확실히 찾을 수 있어. 하지만 이대로 갔다가는 우리가 죽을 텐데, 어쩔래?”
“당연히 네가 말한 특성인가 그것부터 찾아야지. 근처에 가진 사람이 있나 찾아보겠다면서?”
“찾아야 봤지. 없어서 문제지.”
있어봤자 쓸모없는 랭크의 네정좋 정도인가. 토요일에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고 갔지. 그래봤자 무슨 짓을 저지르겠냐마는.
그쪽은 공인이라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삼색 볼펜을 쥐고 지도 위에 낙서를 끼적거렸다. 극야는 왜 그런 말을 남기고 갔을까. 내가 속 타서 죽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걸까.
당이 부족한 것 같은데 간식이라도 사올까. 나는 괴물을 그린 그림 위에 빨간색으로 리본을 그리며 생각했다.
툭-.
그림 위로 동그란 물체가 떨어졌다. 개별 포장지에 쌓인 사탕이었다. 그것도 익숙한 청포도 맛.
“안 그래도 당 부족했는데 기막힌 타이밍. 땡큐.”
PK가 던져준 건가. 나는 사탕 껍질을 벗겨 입 안에 쏙 집어 넣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PK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탕 네가 준 거 아냐? 청포도 맛 이거.”
“아닌데? 난 사탕 같은 거 안 들고 다녀.”
PK가 주머니를 탈탈 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입 안에 든 사탕을 혀로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건 누가 준 건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PK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