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빨리 선수치는 자가 미남을 얻는다는 말은 위의 말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반서준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머플러를 두르고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추워서 붉어진 거랑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라서 말이다. 내가 눈썰미는 좀 있지.
사건 수사로 흘러가다가 갑자기 데이트라.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상황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반서준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 않나.
“싫어요?”
나는 반서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습관처럼 우산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니 우산 위에 쌓여있던 눈이 아래로 투둑 떨어졌다.
“아니요, 그냥……”
반서준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라서요…….”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살다보면 나 같은 사람한테 데이트 신청도 받고 그러는 거지.
바깥이었으면 반서준에게 있어 세기의 영광인데, 여기서는 또 반대다. 이렇게나 평범한 내가 언제 반서준 같은 미남한테 데이트 신청해보겠어.
반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네정좋이 무려 형으로 부르는 사람이다. 그 지독한 얼빠는 13년지기 자기 친구도 친구라고 인정 안 하는 사람이라고.
네정좋은 지금 대체 뭐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어제 당당하게 선전포고한 걸 생각해 보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우산 손잡이를 까딱거리며 반서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반서준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인 모양이었다.
“대답 안 해주시려고요?”
당황한 건 알겠는데 너무 시간을 끌면 나만 머쓱하다. 나는 반서준을 재촉하며 주변을 살폈다. 역시 특별한 건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내놓은 종량제 쓰레기 봉투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 끝이 붉은 낡은 빗자루와 망가진 의자.
주변을 살피는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긴 반서준이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는 내 주의를 돌리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건 또 상상 못한 대답인데.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와, 저 지금 차인 거죠?”
“그런 게 아니라…….”
반서준이 우산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쩔쩔매는 모습이 웃겼다.
하긴 바깥이랑 여기랑 취향이 다를 수도 있지. 바깥의 반서준이랑은 자주 마주쳤으니 명분이 확실했다. 이쪽에서는 따로 만난 적 있던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진심으로 데이트하려고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대화를 거부했으니 작전은 폐기다. 사람은 언제나 스페어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 나는 다음 작전을 위해 실실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번호라도 주실래요? 이것도 곤란한가?”
“번호요?”
반서준의 시선이 내 휴대폰에 닿았다. 그는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머뭇거렸다.
“제가 취향이 아니신 건 잘 알겠어요.”
나는 선수 쳐서 말했다. 그 말에 반서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런 식으로 배려 안 해주셔도 돼요! 서준 씨도 제 취향 아닌 거로 하면 되니까요!”
정말 취향이 아니라서 찬 건지 아니면 따로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데이트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그렇게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날 볼 필요가 없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봐주는 쪽이 나야 더 좋지만.
“번호는 그런 불순한 의도로 달라고 한 게 아니었어요.”
“불순한 의도…… 인가요.”
“이렇게 싫어하시잖아요? 충분히 불순한 의도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나는 실실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고개를 살짝 떨군 반서준이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차인 건 난데 상처는 왜 자기가 받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사람인 척하고 있었으니까.
“예전에 있었던 일 기억하시죠?”
그래도 더 놀렸다가는 저쪽에서 급발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벌어졌던 사건이요. 지금 생각해봐도 범인을 어떻게 처리했나 싶은 그 사건.”
“네. 물론 기억합니다. 솜씨 좋게 범인을 넘어뜨리고 흉기를 빼앗아 제압하셨죠.”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반서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아니, 뭘 어떻게 제압했나 계속 궁금했는데, 무기 없이 맨몸으로 싸웠던 거라고? 진짜로?
들어도 들어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과거가 바깥과 비슷한 전개로 흘렀어야 하니 대체재를 끼워넣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건 도를 넘은 것 아닌가.
“그으으렇죠. 제가 그랬었죠, 하하하!”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 웃었다. 난 특성 없으면 완전 허접한데, 저게 말이 되나. 색욕왕 두개골 까보고 싶다.
“제가 슬프게도 곤란한 일에 자주 휘말리는 편이어서요. 이번에도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번호를 얻어둘까 했어요. 서준 씨는 민중의 지팡이잖아요. 그렇죠?”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내 추측이 맞다면 반서준은 나와 함께 가장 마지막 즈음에 특성을 얻게 되겠지. 번호는 혹시라도 그가 특성을 되찾을까봐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이는 데 손을 빌려달라고 한 이예단은 얼마 후에 있을 신년 대집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 좋은 건 특성을 되찾은 PK가 집회에서 천벌처럼 교주의 머리를 터뜨려 죽이는 건데, 그 전에 특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건 탑에서 씨름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낙원교 급의 문제는 교주 처리가 끝이 아니었다. 그 동네 약쟁이 광신도들 뒷수습은 대체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 필요한 게 바로 공권력 아닐까?
“이상한 일이라고요? 어떤 일이죠?”
표정을 홱 바꾼 반서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별건 아니고……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가 하나 있어요.”
나는 턱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납치하고 감금하는 거로 모자라 마약과 환각제를 복용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마약이랑 환각제 이야기는 유통을 맡은 PK가 해준 거니 추측이 아니라 진실이다.
“일단 몸 사리면서 파보고 있긴 한데, 문제가 생기면 연락할 사람이 필요해서요.”
남들 모르게 무시무시한 짓을 하고 다니는 낙원교가 공권력과 유착관계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유착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줄이 있긴 하겠지. 아니면 지금까지 눈 감아주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반서준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다. 나는 반서준이라면 틀림없이 낙원교 인간들을 잘 처리해줄 거라고 믿었다.
낙원교 약쟁이들 후처리로 가장 깔끔한 건 그 인간들이 싹 다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거다. 형 집행하고 중독 치료 같은 거 받으면 정신이 얼추 돌아오겠지. 설마 복수하겠다고 날뛰어도 그때 가면 내가 이곳에 없을 거다. 애초에 날 노리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번호 주실 생각 없으세요?”
나는 정보 제공자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다. 대한민국을 뒤흔들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 사건은 반서준이 밝혀낸 게 될 테니까.
말도 안 되게 허황된 이야기였다. 반서준의 표정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했다.
“그 사이비 종교의 이름이 뭔가요?”
“아, 낙원교라고 아세요?”
“……낙원교요?”
반서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런 반응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놀라주기도 귀찮았다. 아무래도 낙원교에 대해서 좀 아는 모양인가 보네. 하긴 범죄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가족이 그곳에 끌려간 상태입니까?”
아깐 장르가 두근두근 멜로물이더니 갑자기 취조물로 바뀌었다.
“아니요.”
“살해 협박을 받은 상태입니까?”
“아니요?”
“포교당하신 상태인가요?”
“설마요.”
반서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처음엔 그래도 날 걱정하는 것 같더니 끝에 가서는 날 한 대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곳과는 어떻게 엮이게 되신 건지 물어도 될까요?”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거다. 나는 입을 털어야 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요즘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사실 제가 숨은 괴물을 볼 수 있는 데다가 괴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거든요?”
사실 숨은 몬스터를 보고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건 하람이지만, 하람이 나한테 협조하고 있으니 내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하람 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밖에서 갚겠습니다. 제가 내킬 때 말이에요.
“낙원교에서 괴물을 이용해 사람들의 믿음을 모았다는 거 아세요? 그리고 낙원교 교리가 알면 알수록 수상해서요.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제 하늘을 날면서 가속킥을 박는 사람도 생겼는데, 괴물을 보는 사람 같은 건 이상하지도 않지. 허공에다 대고 벼락이여! 하면서 인터넷 방송 구독자 모으는 사람도 있다. 강철 손톱을 갖게 된 사람도 있고, 액체 인간이 된 사람도 있는데 이게 뭐가 이상하다고.
“괴물의 위치를 특정하실 수 있다고요.”
반서준 역시 그 점 자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눈이 쌓인 건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네. 사실 이 근처에도 괴물이 있어서 조사차 온 거예요. 괴물은 보통 한 자리에 머물지 않거든요. 한번 일을 저지르면 다음 희생양을 찾아 움직이곤 하죠.”
병원을 배회하며 사람을 학살한 두억시니처럼 말이다.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 괴물은 수많은 각성자의 어택에도 죽지 않았다. 네임드가 되어 아직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PK의 협조를 얻는 대가로 한결이의 복수를 돕기로 했다. 그러면 결국 두억시니라는 이름이 붙은 그 괴물을 찾아야 한다는 소린데, 요즘엔 풀려난 몬스터가 하도 많아서 특정 몬스터를 찾기가 힘들었다.
하람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위치 몇 곳을 짚어주는 정도고 말이다.
[좀 봤는데 괴물이 너무 많아져서 한 장소로 특정하긴 힘들어요] ▶
[몇 군데 찍어드릴 테니까 알아서 찾으세요] ▶
눈이 특출나게 좋은 하람마저도 괴물 찾기를 어려워하는 게 요즘 세상이다. 각 개체마다 고유의 색이 있는데 그게 죄다 섞여서 검은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보는 쪽에 재능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저는 어떤 괴물을 찾고 있어요. 낙원교는 그 괴물과 얽힌 집단이고요.”
눈 내리는 밖에 오래 서 있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나는 줄곧 우산을 들고 있었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끝이 차갑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괴물을 찾고 계시다고요? 어째서요?”
한없이 진지한 얼굴의 반서준이 살짝 내리깐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선량한 사람처럼 웃었다.
“아는 아이가 있었는데, 괴물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 애의 보호자가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싶어 하길래 그걸 돕고 있어요.”
미안, PK. 네 사연을 좀 팔게. 근데 널 돕기 위해서 뛰고 있는 건 맞잖아. 여기도 괴물을 찾으러 온 거고.
밖에서 느낀 건데, 반서준은 유독 선한 사람 앞에서 맥을 못 추리는 면이 있었다. 날 존경했던 이유도 내가 히어로처럼 등장해 그를 대가 없이 도와주었던 것 때문이었지. 나중에 그 이미지를 다 깨먹어서 틱틱대기 시작했지만.
바깥의 반서준은 그랬는데, 이곳의 반서준은 어떨까?
과거의 그 사건을 변함없이 겪었으니 바깥의 반서준과 비슷할까?
나는 한껏 기대하며 반서준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