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46화 (146/175)

제146화

[“방금 그 사람 말이에요.”]

보기 드물게 들쑥날쑥한 톤의 목소리였다.

멍한 얼굴로 고저 없이 말하는 네정좋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전화 너머의 상기된 얼굴이 눈에 선했다.

[“저를 아는 거죠?”]

정말로 낯선 목소리였다. 내가 네정좋의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나는 네정좋 옆에 있을 레터조차 이런 목소리를 처음 들어봤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어…….”

극야를 부르기 전에 전화를 안 끊었던가? 극야를 부르는 수밖에, 하고 생각한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와 동시에 극야가 나왔던가? 그 뒤에 바로 물어봤었고?

[“대답해주세요. 그 사람은 저를 아는 거죠?”]

우물쭈물거리고 있으니 수화기 너머에서 독촉이 들어왔다. 통화가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는 건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몽땅 다 들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럼 내가 네정좋한테 사후세계 보여주라고 말한 것도 들었나?

대화를 다 들었다면 네가정말좋아라는 닉네임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대놓고 사후세계 관광을 시켜주라고 조른 꼴이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예, 뭐……. 안다고 할 수 있죠.”

이제 길게 설명하기도 귀찮다. 이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된 게 대체 몇 명째냐고.

환영 세계 탈출을 위해 그동안 열심히 입을 털었다. 이예단, 하람, 그리고 PK까지. 그들에게는 사연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해야 했지만, 굳이 네정좋과 레터에게까지 협조를 구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처음에 접촉한 게 그들인 만큼 그들도 타워가 가짜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계가 가짜라는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특성이 S급이라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돌아간 거예요? 거기 어디예요?”]

“대로변이요.”

[“위치 찍어주세요.”]

“방금 간 사람이라 바로 못 불러요. 포기하세요.”

밖에서 죽음 너머를 본 충격으로 F급에서 S급이 된 거라면 여기서도 동일한 충격을 받아야 S급이 되겠지.

타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워 안의 몬스터를 물리칠 수 없다. 내가 괜히 하람이랑 이예단한테 매달린 게 아니다. 외알 안경의 힘으로 한 명은 파티에 끼워 넣을 수 있지만, 두 명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F급 리모컨 마스터 네정좋보다는 이미 여러 번 굴러본 PK 쪽이 낫지. 똑같은 충격 요법을 쓸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 훌륭한 동료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아까 저희가 나눈 대화 들으셨죠? 유주하 씨 얼굴 보고 가라고 했더니 그냥 가겠다고 한 거.”

[“들었어요.”]

“저쪽에서 마음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그냥 포기하세요.”

나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가로지르며 말했다. 솔직히 나 정도면 할 거 다 해줬지. 꾸준하게 연락도 했고, 극야한테 만나러 가는 게 어떠냐고 말도 꺼내줬다.

그런데 저쪽에서 싫다는 걸 어쩌겠어. 러브리스도 찾으러 가지 않는 걸 보니 특성 없는 낙원 사람들은 그에게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정말 정 없는 악마였다.

[“싫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과자 봉지를 더듬는 소리 같았다.

“싫으면 어쩔 건데요.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구셔야겠어요?”

네정좋이 과자를 먹는 건지, 아니면 이 촌극을 구경하고 있을 레터가 과자를 먹는 건지.

[“전 구질구질한 남자예요.”]

“그 얼굴로?”

[“오늘부터 구질구질해지기로 했어요.”]

“장르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집착남은 어반 판타지가 아니라 로판에서나 인기라니까. 나는 미간을 팍 구기며 볼륨을 내렸다. 과자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극야가 만나주나 봐라. 극야는 로판 여주랑 다르게 신출귀몰하다고. 북부대공 페이스가 뒤쫓는다고 해서 잡혀주지 않는다.

물론 이 동네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라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판타지다. 회귀자인 주인공 말고는 죄다 소모품이지.

“용건 더 없으니까 끊을게요.”

극야 백날 찾아봐라. 그런다고 극야가 나오나. 나는 그대로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통화를 끊은 일을 나중에 절절히 후회하게 된다.

* * *

길거리에 출몰하는 몬스터와 그걸 잡으러 출동하는 각성자들이 생긴 세계다.

우리나라에서 첫 랭크가 S였던 사람은 세 명. 나와 극야, 그리고 반서준. 나머지는 모두 아래에서 위로 랭크업한 사람들이다.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수소문해 본 결과 지금 시점에서 특성을 되찾은 건 시작이 D랭크 이하인 사람들.

헌터 인구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꺼번에 특성을 되찾는다면? 세상은 당연히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여보세요. 엄마? 카페에 사람 많아?”

[“그럼. 화이트 크리스마스잖아.”]

올해의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몇 시에 들어와?”

[“한 여섯 시? 약속이라도 있니?”]

“그런 거 없는데.”

크리스마스 약속은 본진인 바깥에서도 없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점장님한테 크리스마스에 알바하고 싶다고 조를 걸 그랬나.

이런 날은 타워도 사람으로 빽빽해서 일하러 가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어깨 춥고 슬픈 날이 아닐 수 없다.

[“없으면 집에 일찍 들어가서 바닥 청소 좀 해놔.”]

“생각해 보니까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아.”

[“연희 네가? 누구?”]

이렇게나 쓸쓸한 날에 집안 청소라니.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람.

나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숨어 사건 현장을 살폈다. 타워에서 풀려난 몬스터는 크리스마스에도 거리에 나타나 시민의 안전을 위협했다.

수능 날이라고 지진이 발생하지 않는 일은 없지 않던가. 영어 듣기 시간에 비행기는 몸을 사려주지만, 지진은 자연재해니까 어쩔 수 없지.

이곳의 몬스터도 그런 거였다. 자연재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것. 그렇기에 언제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

“어, 그러니까……”

이틀 전에 이 근처에서 몬스터의 습격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남은 흔적이 없네. 딱히 파손되거나 망가진 부분도 없고.

“그러니까, 누구냐면……”

나는 몬스터가 나왔다고 뉴스에 떴던 곳 근처를 뱅글뱅글 돌며 말을 끌었다. 누구 이름을 대지? 예솔이? 예솔이라면 크리스마스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고 이미 말했다.

그럼 요새 가장 만만한 하람? 그건 곤란한데. 크리스마스라고 한창 게임에 접속해 있을 사람 이름을 대긴 좀 그래.

PK? 한결이를 보러 간다고 했으니 패스. 레나? 레나는 인싸라서 연말 약속이 미친 듯이 밀려 있다고 들었다.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패스.

러브리스? 그날 이후로 연락도 안 했다. 네정좋과 레터? 둘이서 크리스마스 특집 대하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을까? 이예단? 걔는 낙원교 집회가 곧이라서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내가 이렇게 친구가 없었던가.

나는 닥쳐온 현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긴 옛날부터 친구가 없긴 했어. 떡볶이 기프티콘 보낼 때를 생각해보라. 보내고 나니 다 낙원 길드 사람들 아니었나.

후일담으로 극야가 그 기프티콘을 볼 때마다 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편애 말하기를 고양이가 사냥해 온 참새 보는 캔따개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럴 때 편애를 불러내면 참 좋은데 이럴 때만 편애가 없네. 나는 우리 집 악마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는 우산을 고쳐 쥐었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도착한 현장 근처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저거다.”

[“방금 뭐라고 말했니? 너무 작아서 못 들었어.”]

“나 오늘 편의점 단골손님이랑 약속 있어.”

살짝 기울인 우산 너머로 검은 머플러를 두른 반서준의 얼굴이 보인다. 반서준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거 없는 건물 근처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편의점 단골손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엄마가 의문을 표했다. 나는 아주 단호하게 엄마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남자야.”

[“우리 딸 힘내.”]

“응.”

엄마는 나보다 더 단호하게 통화를 끊어버렸다. 힘내라는 말에서 뭘 생각한 건지 다 티가 났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라고 성별을 말한 거기도 하고. 왜, 반서준의 성별이 남자긴 하잖아.

나는 우산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반서준에게 다가갔다. 흠 없이 멀쩡한 건물 근처를 서성이던 반서준이 내 발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경계심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내 오렌지 우산을 보자마자 사르륵 풀렸다. 내 우산이 대놓고 무해하게 생기긴 했지.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인사하려고 들렀어요.”

나는 오렌지 모양 우산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반대쪽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반서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르바이트 하러 안 가시나 봐요.”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요. 그리고, 어, 그러니까…….”

옅게 미소 짓는 얼굴의 반서준이 말을 끄는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반서준 앞에 서서 미간을 좁히고 말을 끌었다. 생각해보니 직접 이름을 들은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속으로 반서준, 반서준 하고 부르긴 해도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물론 저쪽은 공무원이니까 날 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반서준에게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멋대로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이름을 알았냐고 추궁당하려나? 나는 반서준을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예전에 이름을 말씀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을 못하실 수도 있겠네요.”

이쪽 반서준은 유한 거로 모자라 눈치도 빠르고 배려심도 깊었다. 밖에서 틱틱대던 반서준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반서준이랑 동일 인물 맞냐. 딴 인간들은 밖이 더 친절한데 얘는 여기서 더 친절하네.

“제 이름을 반서준이에요.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네, 서준 씨. 서준 씨도 오늘은 일 안 하시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오늘은 알바 안 하러 가요.”

타이밍 좋게 저쪽에서 이름을 말해준 덕에 미스 안 났다. 나는 웃는 얼굴로 대화를 이었다. 저쪽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크리스마스라고 일 안 하기는 무슨. 여기서 서성거리는 거 보면 딱 봐도 일하고 있구만.

하지만 이런 건 티내지 않는 게 바람직한 시민의 모습.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어 말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요. 국가가 공인한 빨간 날.”

“네, 그렇죠. 저는 잔업이 남아 있지만요.”

“언제나 바쁘시네요. 오늘도 평소처럼 바쁘신가요?”

반서준의 잔업이 뭘까? 분명히 몬스터와 관련 있겠지? 뉴스에 나온 그 사건 말이다. 몬스터를 물리치려고 했더니 각성자와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

“그건 잘 모르겠네요.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깜짝 질문을 받은 반서준이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아무래도 내 추측이 맞는 모양이다. 나는 사건에 얽힌 정보를 조금 더 캐내기 위한 비장의 수를 던졌다.

“그럼 당장 하셔야 하는 일은 없는 거죠?”

“일단은요.”

“그럼 제게 시간을 내주시면 어때요?”

반서준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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