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보통 예전에 악했다가 선해진 사람이 악한 모습을 보이거나 반대로 선했다가 악해진 사람이 선한 모습을 보일 때 쓰곤 하는 말이다.
나는 바깥에서도 사회악이고 여기에서도 사회악인 인간과 손을 잡았다. 사회악인 점이 걸리긴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정말 최적의 조건을 가진 동료였다. 솔직히 이제 와서 사회악을 논하는 것도 웃기긴 해. 내가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를 얼마나 신경 썼다고.
“하람 씨. 요즘 눈 괜찮으세요? 괴물이 하도 불어나서 다크 아우라가 곱절로 늘었을 텐데.”
얼마 전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더니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눈이 안 내린다. 나는 하늘을 나는 괴조 형상의 몬스터와 그 몬스터를 걷어차는 사람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요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엊그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세요?”]
“그거야 전 모르죠.”
[“괴물의 습격으로 옆동이 날아갔어요.”]
“오…….”
용케 자기 집은 안 날아갔네. 옆동이 날아간 거면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을 텐데. 천운이 따로 없다.
“그래서 괴물은 어떻게 됐어요? 하람 씨네 동은 안 날아간 걸 보니 누가 잡았어요?”
[“네. 어떤 사람이 비비탄총으로 때려잡았어요.”]
그냥 총도 아니고 비비탄총으로? 예전에 날강도가 똑같은 짓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쪽도 특성이 가속인가?
“힘드셨겠네요. 길게 해 드릴 말은 딱히 없고 힘내세요.”
[“지금 일어나는 상황 모두 당신 짓이죠?”]
“그럼 누구 짓이겠어요. 당연한 소릴 하시네.”
강남역 노른자 땅에 세워진 건물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악역이 히어로의 발차기를 맞고 날아갔다. 한 번에 죽지 않은 괴조는 반대쪽 건물로 날아가 또 다른 노른자 땅에 박힌 건물을 부쉈다. 저기서 싸우는 각성자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PK와 극적으로 타협하고 다음 날, 우리는 바로 타워로 쳐들어갔다.
PK는 안 그래 보여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다른 걸 다 제쳐두고 그것 먼저 해결하는 타입이었다.
우리는 그날 2층으로 모자라 3층, 이어서 4층, 그리고 5층까지 고속으로 돌파했다. 5층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총알이 다 떨어져서였다.
타워는 안에 갇힌 몬스터에게 감옥으로 작용하다 보니 밖이랑은 다르게 총이 통했다. 한번 시작한 거 끝장을 보자.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타워를 오르고 또 올랐다. 총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올 때까지 올랐다.
우리가 멈춰선 건 30층에 다다른 직후였다. 그 위로는 특성이 없으면 상대할 수가 없겠더라고.
“하람 씨.”
[“왜요?”]
“근처에 각성한 사람 없어요?”
우리가 타워를 오르고 오르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괴물이 세상에 풀렸다. 그리고 동시에 특성을 되찾은 사람도 생겼다. 사람들은 그들을 각성자라고 불렀다.
지금은 몬스터가 그리 많지 않으니 그걸 전문적으로 사냥할 이유가 없지. 따라서 헌터라고 부르지 않는 거고. 괴물에게 정확한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타워에서 풀려 나온 괴물들은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했지만, 정부가 나서 각성자를 모으고 지원하는 등 발빠른 대처를 보여준 탓에 큰 피해는 없었다. 이번 대통령이 대처를 엄청 잘해서 그런지 다들 우리나라는 왜 재선이 안 되냐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인터넷에 청원에 동참해 달라는 링크가 흔히 나도는데, 굳이 재선이 가능하게 법을 뜯어 고칠 필요가 있을까? 조만간 망할 세상인데 말이다.
[“근처엔 없을걸요? 이런 건 저보다 류예나한테 물어보세요.”]
“굳이 예나 씨한테 물어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걔는 발이 넓으니까요.”]
하긴 싸가지 없는 하람보다는 성격 좋은 레나가 더 친구 많겠지. 무슨 소리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럼 하람 씨는 아직 각성하지 않으셨다는 소리네요. 알겠어요.”
레나 특성은 전투 계열이 아니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는데. 나나 PK가 특성을 되찾았으면 쓸모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특성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연락을 누구한테 돌렸더라. 각성자와 몬스터의 치열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하람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각성자가 필요한 상황이 있어서요.”
PK가 빨리 특성을 되찾아야 낙원교에 접근해볼 텐데. 어디까지 올라야 특성을 되찾을 수 있지? 50층? 70층? 100층?
쿠궁-!!
각성자에게 발차기를 얻어맞은 괴물이 도로 한복판에 처박혔다. 괴물은 물리쳤어도 인명 피해가 나왔겠네. 어쩔 수 없지. 여긴 던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나는 하람과의 통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다음 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정좋은 전화를 안 받는 관계로 러브리스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 한결이 병실에서 뵈었던 사람인데요.”
주말이라 그런지 러브리스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엉망이 된 거리를 빙 돌아 걸으며 전화를 이어 나갔다.
“별건 아니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특별한 능력이 생기거나 하지 않으셨나요?”
[“특별한 능력이요?”]
“주변 온도가 내려간다거나, 갑자기 얼음이 생긴다거나, 차가운 음료수가 식지 않는다거나. 그런 상황 없었을까요?”
러브리스는 냉기를 다루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가 생겼다면 보통 저런 류의 변화였겠지. 저번에 봤을 때 인간 냉장고를 자처했던 것 같다.
[“아, 이번에 각성자들이 나타난 것 때문에 물어보시는 건가요?”]
“대충 비슷해요.”
[“죄송한데 저는 각성자가 아니라서요.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요.”]
러브리스도 당첨은 아닌가. 나는 뺨을 긁적거리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특성이 돌아오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 랜덤인가?
처음에는 약한 순서부터라고 생각했는데, 화룡 아줌마가 인터뷰한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고.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는 반서준한테도 연락해보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다. 월요일에 편의점에 나가는 수밖에. 이번에 만나면 번호를 따 놔야겠다.
괜히 수작질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 쪽으로는 관심 하나도 없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네정좋에게 전화를 걸며 거리를 걸었다. 한낮의 소동에 경찰이 출동했는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뚜르르-.
전화 신호음이 반복해서 울렸다. 하람이랑 러브리스도 컬러링이 있던데 얘는 없네. 정말 전화 거는 맛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극야를 발견했다는 연락이라도 왔을까 봐 냉큼 받던 사람이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안 받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캘린더 앱을 켜서 날짜를 확인했다. 24일 토요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특별한 날이라서 따로 스케줄을 잡은 건가. 어쩐지 오늘따라 거리에 사람이 많더라니. 다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그런 거였다.
‘오늘 케이크 가져올까? 네가 좋아하는 걸로?’
‘케이크? 왜?’
‘오늘 말고 내일 가져와? 내일 먹을 거야?’
‘응?’
아침에 엄마랑 했던 대화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누구 생일도 아닌데 갑자기 케이크 소리를 하길래 뭔가 했는데,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였구나.
가져온다고 한 걸 보니 이미 케이크를 예약했나 보다. 내일은 집에서 영화 틀고 꼼짝도 안 해야지. 오늘 들어가는 길에 샴페인이나 사 갈까.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신호음이 연이어 지나간다.
[“안녕하세요.”]
네가정말좋아는 시간을 있는 대로 질질 끈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유주하 씨 맞죠?”
[“네.”]
“용건이 있어서 전화드렸는데 통화 가능하세요?”
도로를 꽉 채운 경찰차 뒤로 견인차가 줄지어 달려왔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바쁘게 일하시네. 공무원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휴대폰을 머리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시끄러운 경찰차 사이렌 소리 사이로 네정좋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바쁘니까 빨리 말씀해주세요.”]
“일하시는 중이에요?”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사극 드라마 재방송해요.”]
수화기 너머로 애절한 드라마 OST가 들렸다.
[“안 돼!!! 유배 안 보내겠다면서, 이 XX!!”]
미쳐 날뛰는 레터의 목소리도 들렸다. 오…… 정말 굉장한 드라마를 보고 있나 본데?
그러고 보니 레터의 취미가 사극 드라마 보기였던 것 같다. 예전에 게이트 시뮬레이터 안에서 네정좋도 같이 본다는 말을 들었었지.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여기서도 여전할 줄이야. 나는 블루투스 이어폰 케이스를 열며 물었다.
“혹시 특별한 능력 같은 거 생기셨어요?”
[“특별한 능력이요?”]
“공간 이동 같은 거? 물체를 손 안 대고 이동 시키거나 그런 거?”
네정좋의 공간 특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특성이었다. 이동이 편한 건 물론이고 공간을 자르거나 체내에 이물질을 들여보내는 식으로도 공격이 가능하다.
하람이나 러브리스, 그리고 PK처럼 직접적인 공격계 특성은 아니어도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한 능력이라 있으면 좋았다. 위력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못해도 70층까지는 손쉽게 돌파하지 않을까?
[“음.”]
수화기 너머에서 레터의 욕지거리가 신명나게 울렸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왕이 원망스러운 모양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라고 울부짖는 모습에서 광기가 엿보였다.
[“비슷한 게 있긴 해요.”]
그리고 레터가 울부짖든 말든 티비 볼륨이나 엄청 높인 네정좋. 나는 처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들리는 OST를 흥얼거리며 물었다.
“뭔데요?”
[“연필을 책상 아래로 이동시키는 능력이요.”]
“예?”
[“바닥에 있는 리모컨을 소파 위로 이동시키는 능력도 있어요.”]
이동이라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는 내가 아는 그 특성이 맞는 것 같은데, 스케일이 내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가설 한 가지.
이거 설마…… 처음 각성했을 때 랭크 기준으로 특성을 돌려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네정좋만 특성을 가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정좋은 F급에서 S급이 된 헌터계의 전설이었으니까.
[“이만 끊고 드라마 봐도 될까요?”]
다른 건 모르겠고 그저 망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F급이던 네정좋을 S급까지 키운 건 극야던가. 극야를 불러서 다시 한번 네정좋 키울 생각 없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요. 그…… 자색 눈의 남자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는 일단 극야를 언급해서 통화 중단을 막았다. 마지막 희망까지 날아가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극야를 불러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