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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43화 (143/175)

제143화

묘지. 이곳에는 누구의 무덤이 있었을까?

나는 궁금해 하면서도 끝내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동행한 지 고작 한 달 된 사이였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게 편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때의 의문을 잊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이 세상은 가짜야. 이번에 터진 일은 7년 전에 터졌어야 할 일이었어.”

그 묘지에는 한결이가 묻혀 있었구나. 나와 만나기 전에 PK가 그곳에 묻어 줬구나.

PK와는 오래 안 사이다. 우리는 필요할 때 서로 돕는 우리의 관계를 비즈니스 관계라고 칭했다.

“이 세계는 가짜라고 말했지? 진짜 세계는 따로 있어. 나는 진짜 세계인 바깥에서 온 사람이고, 이 세계를 무너뜨려서 바깥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래서 나는 PK의 개인적인 사정을 깊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 PK에게 동생이 있는 것, 동생이 전쟁 때 죽은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 세계를 바란 것까지 모두 여기 와서 알게 된 일이었다.

“진짜 세계에서는 7년 전에 그 괴물이 쏟아져 나왔어. 그와 동시에 괴물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지. 우리는 그 힘을 특성이라고 불렀어.”

그동안 PK와 알고 지내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더 그랬다. PK는 바깥에서도 위험한 일을 했지. 나는 PK가 죽어서 돌아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줄곧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세계는 특성이 없는 세계를 바란 누군가가 만들어 낸 세계야. 특성이 없으면 괴물도 없어야 하지만, 세계 자체가 특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7년씩이나 본 사람이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더라도, 죽어서 돌아왔을 때 무덤덤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괴물을 죽이려면 특성이 필요해. 나는 특성을 되찾아 이 세계를 나갈 거고, 그럼 이 세계는 무너질 거야.”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동생을 잃은 PK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동생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내게 접근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네가 그 괴물에게 복수하려면 세계 멸망을 도와야 한다 이거지. 어때, 믿을 거야?”

선명한 색깔을 잃어 칙칙해진 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렇게 서 있다가는 조만간 눈사람이 되겠는걸. 나는 그의 굳은 모습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그래, 과거에는 저런 모습을 본 적도 있었지. 날이 갈수록 뻔뻔해져서 보기 힘든 모습이 되었지만.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낙원교랑은 관계없어.”

눈 펑펑 쏟아지는 날에 의심스러워하는 PK를 보고 있으니 조금 억울해졌다. 낙원교는 대체 뭐하는 집단이길래 진실을 말해도 미치광이 취급당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그쪽도 뭔가 있긴 있었다. 자세히 파고들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얼굴 위로 푹푹 내리꽂혔다. 나는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손부채질했다. 빨갛게 언 손가락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춥다.

빨리 대답을 해줘야 자리를 옮기든 집에 돌아가든 할 텐데 말이다. 대목인 연말에 골목길에 서서 이게 뭐하는 짓이람. 나는 입김을 후 불어 손을 녹였다. 하긴 내가 PK의 입장이라면 내가 상당히 의심스러울 것 같긴 했다.

신상만 보면 부모 등골 빨아먹다 이제야 정신 차린 전직 고시생. 그런데 주변에 낙원교 교주 아들 있음. 무림 고수에 필적하는 화려한 과거 전적 있음.

약도 안 했는데 이 세상이 가짜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데다가 괴물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 동생을 죽인 괴물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세계 멸망을 도와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

되짚어 보니 믿는 게 더 이상하다. 확실히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물증이 없으면 믿기 힘들겠지. 나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을 뒤적거렸다. 안경 닦이로 곱게 감싼 물건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이걸 써 봐.”

나는 안경 닦이 채로 물건을 건넸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후회한 뒤로 꾸준히 챙겨 다녔다. 언제 PK에게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오늘처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건넨 물건을 받은 PK가 안경 닦이를 펼쳐 외알 안경을 꺼냈다. 나는 외알 안경을 눈에 가져다 대는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골목길 앞이라서 타워가 안 보인다.

PK는 나를 일단 믿어보기로 한 건지 순순히 날 따라왔다. 나는 PK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타워라면 서울 어디서든 잘 보였다. 높은 곳에서 더 잘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타워가 잘 보이는 곳까지 나와 타워를 보았다.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빛나는 거리 한가운데서 보아도 그 타워는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뽐냈다.

“저건…….”

타워의 본 모습을 본 PK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무게를 잡고 말했다.

“저게 이 세상의 오류야. 낙원교의 미치광이들이 저 건물에서 집회를 가진 이유는 저 건물이 이 세상의 핵심이기 때문이야.”

낙원교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낙원교의 교주라는 이예단의 아버지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세계의 진실을 꿰뚫고 있는 걸까.

나는 가시지 않는 의문을 삼켰다.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이예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을 죽일 테니까.

외알 안경을 든 PK가 하늘 높게 솟은 기괴한 마천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뿌연 안경알 너머로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 세상이 가짜라고?”

눈동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였다.

“네가 떠나면 이 세상은 사라지는 거야? 흔적도 없이?”

“아마도.”

“그럼 나는 뭐야?”

외알 안경을 눈에서 떨어뜨린 PK가 물었다. 발갛게 언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 인생도, 한결이도,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라고?”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우는 PK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환상은 아니고 복제된 세계 같은 거야. 진짜 너는 바깥에 실재해.”

“너는 이 세계가 바깥과는 다르다고 했잖아. 그럼 바깥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

PK는 허탈한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는 이 세계가 곧 멸망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다른 두 명과는 달랐다. 하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한 사람이었고, 이예단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바깥의 PK는 죽음을 각오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애초에 남이 죽는다고 자기도 따라 죽을 위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보통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들으면 누구나 PK 같이 행동하겠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다.

“복수를 해도 세상이 멸망하고, 복수를 하지 않아도 세상이 멸망하고.”

“…….”

“어차피 끝날 인생인데, 뭐라도 해보고 죽지 그래.”

눈가를 문질러 닦은 PK가 내게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그 시선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기왕 끝이 정해진 거, 나한테 투자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 들어봤어?”

“……내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게 해주겠다고?”

“아니. 세상이 멸망한다니까. 세상이 사라졌는데 이름을 어떻게 남겨?”

가죽도 이름도 세상이 남아있어야 남길 수 있는 거다. PK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갔는지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대신 기억은 해 줄 수 있지. 바깥에 네 무덤을 만들어줄게. 원한다면 1년에 한 번 술도 뿌려주고.”

“바깥에도 내가 있다면서.”

“맞아. 정말로 그랬다가는 바깥의 네가 어이없어하겠지. 근데 이렇게 시간 끌고 있다가는 바깥의 네가 죽을걸. 진짜로 무덤을 만들어줘야 할 수도 있어.”

물론 PK는 색욕왕 쪽에 붙었으니 안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딜 가든 자기 목숨은 기막히게 챙기는 인간이라니까. 생명력이 아주 바선생이다.

나는 굳어 있는 PK의 손에서 안경 닦이와 외알 안경을 빼앗아왔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좁혔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왜 없어? 한결이의 복수를 하고 말고가 네 손에 달려 있는데.”

복수가 달려 있는데 이걸 안 하고 배겨? PK는 무덤조차 남기지 못한 한결이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애는 허무할 정도로 빨리 가버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나는 색색의 조명이 가득한 밤거리 한가운데 서서 PK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결이를 사랑했던 것은 진심이었는지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하면 나만 손해를 보게 되는데.”

“네가 수전노인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너는 7년 동안이나 오는 길에 라면을 사오라고 했다고.”

한결이마저 잃은 PK는 무엇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는가? 나는 여전히 지옥에서 살아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투자해야 하는 상품이 있는 법이지. 안목은 지금의 너보다 바깥의 네가 더 뛰어난 모양이야.”

나는 턱을 위로 들며 씩 웃었다. 투자 타령은 PK를 처음 만난 날에 그가 내게 한 소리였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끝이 정해진 네 삶조차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갈 길을 잃었다면 길을 찾으면 된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복수를 하면 된다. 때로는 끝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달리게 만든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결국 잿더미가 되고 말 운명이라면 활활 타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회는 언제나 하지 않았던 것에만 찾아온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칙칙한 갈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틀렸어.”

PK는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네가 날 필요로 하는 거잖아.”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나와 함께 타워를 올라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입에 발린 말을 열심히 떠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안 좋았다. PK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혀를 잘 굴리는 인간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눈이 내렸다. 쌓인 양을 보니 내일 출근하는 사람들이 절규할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휴대폰 화면을 켜 보니 벌써 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늦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새로 쌓인 눈을 밟자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PK는 말없이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나는 현관 앞에서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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