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한겨울의 밤거리에 번쩍이는 조명과 신나는 캐롤이 즐비하다. 눈이 펑펑 쏟아진 밤거리는 굉장히 춥고 미끄러웠지만,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긴 눈이 내리는 12월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시기였다. 가게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조명을 내걸었고, 과한 곳은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바닥에 사뿐사뿐 내려앉은 눈을 밟을 때마다 운동화가 쭉 미끄러졌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간 바로 넘어질 것 같다. 나는 차가운 휴대폰을 쥐고 조심조심 걸었다. 참 험난한 퇴근길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뭐해?]
◀[만날래?]
[미안! 그날은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
일의 진전이 지나치게 느렸다. 나는 예솔이에게 크리스마스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장렬하게 차였다. 그래.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평소에 일에 치여 만나지 못하니까 크리스마스에라도 만나볼까 했는데, 과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눈 쌓인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이 밝다. 사람 머리를 씹어 먹는 괴물이 돌아다니는데도 크리스마스는 흥겹나 봐. 하긴 자기 근처에 피해 본 사람이 없다면 그저 남일일 뿐이지.
괴물을 잡겠다고 떠난 PK는 일주일이 다 가도록 소식이 없었다.
괴물이 아직 돌아다니는 걸 보니 죽이지는 못한 모양인데, 그럼 자기가 죽었나? 그런 것치고는 낙원교가 아직 멀쩡한데.
이예단은 저번에 PK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칭했다. 전화에서 들은 내용까지 합쳐 생각해보면 낙원교에 약을 대는 건 PK.
PK가 중간에 죽어 사라진 거라면 그 약쟁이 집단이 미쳐 날뛰어야 맞지 않나. 자기가 죽을 걸 알고 미리 안배를 해두었나?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시린 손을 비비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델리키아 때도 일이 틀어질까 봐 나한테 미리 말했었지. 끝까지 사회에 도움 안 되는 사람이다.
PK가 살아 돌아온다면 총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는 동료가 생기는 거였는데 안타깝게 됐네. 밖에서는 비즈니스 관계라도 되지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니 상관할 처지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돌아가면 지금도 극야 어딨냐고 징징거리는 네정좋에게 닥치라는 메시지나 보내야겠다. 불러도 안 나타나는데 난들 어떡하냐. 걔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악마도 아닌데.
부지런히 걷고 있으니 얼마 안 가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깜빡깜빡 점멸하는 가로등만이 앞을 밝혔다.
가로등 밑으로 길게 진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가로등 밑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돌아왔네.”
마스크를 쓰고 있던 PK가 마스크를 밑으로 쭉 내렸다. 뺨에 길고 흉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일단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출근할 때부터 내리던 눈이었으니 몇 시간은 족히 내린 눈이었다.
나는 PK의 머리 위에 하얗게 쌓인 눈을 흘끗거렸다. 여기에 얼마나 오래 서 있던 거지? 얼음과자가 따로 없었다.
“괴물은 죽였어?”
그 괴물이라면 오늘도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했지. 나는 괴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아니.”
PK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밑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게 보였다.
“곰 머리통도 날리는 총을 쏴도 안 죽고, 코끼리도 쓰러뜨리는 마취총도 안 먹히던데. 그렇다고 칼이 드는 것도 아니고.”
“보통 그렇지. 그건 괴물이잖아.”
몬스터는 코끼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마취총이 안 들지. 그런 게 통했으면 바깥의 헌터들은 진작에 실직자가 되었을 거라니까? 우리 차원에 넘어오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왕의 군단에 속해 있는 엘리트들이었으니 말이다.
“네가 얼마나 현실주의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냉동 참치처럼 꽝꽝 언 PK가 말없이 날 응시했다. 나는 내 머리 위에 쌓이고 있는 눈을 털며 말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할 테지만, 그걸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네 선택이야. 하지만 장담하지. 날 믿고 따라오면 이 세계에서라도 네가 복수할 수 있게 해줄게.”
복수라는 말에 PK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나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동생은 7년 전에 죽었어.”
* * *
눈은 아니고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넌 어디서 왔어?”
우리가 건너고 있는 장소는 웨이브를 막지 못해 외부 차원과 반쯤 동화된 곳이었다. 나는 근처에 떨어진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가방의 주인은 학생이었는지 가방 안에는 우산 말고도 노트나 필통 따위가 들어 있었다.
“나? 천안 출신인데.”
마찬가지로 시체 더미를 뒤지던 PK가 우산을 펼치며 말했다. 딸기가 그려진 귀여운 우산이었다.
“누가 네 출신지 궁금하대? 내 말은 네가 어디서 왔냐고. 괴물 쏟아질 때 어디에 있었어?”
엄마는 이변이 생겼을 때 분명히 집에 있었을 거다. 쟤가 집에 있었으면 잘 탈출해서 나온 거니까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남의 가방에 꽉꽉 들어찬 노트와 필통을 휙 던져버리곤 앞주머니를 살폈다. 휴대폰 보조 배터리가 들어 있었다. 나이스.
“난 밖에 있었어. 중고 거래하는 중이었거든.”
“그 다음에는?”
“병원에 갔어.”
“왜?”
“그냥. 병원에는 의료 용품이 있을 거 아니야.”
PK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대체 어디서 찾은 건지 모를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있었다. 저건 왜 들고 있는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가 뭘 하는지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휴대폰에 스피커를 연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만났을 때 파스 같은 걸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다 병원에 들러서인가? 나는 우산을 고쳐 쥐며 말했다.
“하긴 병원 근처에는 약국이 있을 테니까.”
“큰 병원은 마트랑 식당도 있어.”
“그 정도 되면 병원이 아니라 주상복합 아파트 아니야?”
“병실을 집으로 생각해보면 비슷하긴 하네.”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을 마친 PK가 노래를 틀었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빵빵한 노래 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근처에 울려 퍼졌다.
빗줄기 사이에서 짐승의 노란 눈이 보였다.
“야! 뭐하는 거야? 빨리 음악 꺼!!”
“노래를 왜 꺼. 일부러 어그로 끈 거야.”
“어그로 끌어서 대체 뭐하려고?”
“여기 말이야, 변하기 전에 어느 장소였는지 알아?”
거대한 늑대 형상의 몬스터가 우리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들판이었다.
여기가 이전에 무슨 장소였는지 내가 알 바인가? 나는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가로로 들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온 몬스터가 우산을 향해 뛰어들었다. 우산은 단숨에 반토막이 났다.
나는 반 토막 난 우산을 버리고 몬스터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날렸다. PK는 뒤로 넘어가는 몬스터를 보며 크게 웃었다. 저 미친놈이 대체 뭐하는 거야?
들판에는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몰려드는 몬스터 떼의 기척을 느끼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먹을 맞고 넘어진 몬스터가 다시 일어나 달려든다. 저런 것들은 죽이지 않으면 끊임없이 일어나 덤벼들었다.
나는 몬스터를 발로 차 넘어뜨린 뒤에 그것의 위에 올라타 목을 꺾었다. PK는 여전히 시체 사이에 서서 몰려오는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 안 꺼?!”
체력 비축하고 이동해도 모자랄 판에 비오는 날에 개싸움이라니. 이게 맞냐? 나는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질렀다.
“우리 여기 정리 좀 하고 갈까?”
혼자만 우산을 쓰고 있는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비에 젖어 들러붙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어 올렸다. 조만간 머리를 자르던가 해야지. 트리트먼트도 없는 상황에서 긴 머리를 유지하면 개털밖에 더 되겠어?
“정리하자고? 왜?”
“아까 여기가 원래 어디였는지 아냐고 물었잖아. 알아?”
“나야 모르지. 애초에 남양주에는 처음 와봤는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서울에는 거대한 게이트가 생겼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죄다 서울에서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 남은 사람들은 오직 우리 같은 사람뿐이다. 이상한 힘을 쓰는 사람들 말이다.
나와 PK는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서울을 빠져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엄마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PK라고 부르라면서 이름도 안 가르쳐주는 쟤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상품이고, 미리 투자해 놓는 게 자기 인생에 좋다는 이유였다.
그래, 상품이든 뭐든 동행인이 있으면 나쁠 건 없지. 그것도 한가락 하는 동행인이면 말이다.
“멋대로 따라와 놓고 이러면 어떡해? 날 돕겠다면서. 이게 돕는 거야? 사람들은 보통 이런 행동을 피해를 끼친다고 말하거든?”
하지만 몬스터 어그로 끌어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만들면 문제가 있는데? 나는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아, 걱정하지 마. 너한테 해결하라고 안 해.”
PK가 말함과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리 두 사람을 위로 들어올린 PK는 내게 1인용 우산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들고 있어.”
나는 PK가 건넨 우산을 높게 들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우산이었다. 어린이용 우산은 아니지만, 디자인만 신경 쓴 나머지 크기를 고려하지 못한 우산 같았다.
크르릉-.
몰려든 몬스터들이 아래에서 으르렁거렸다. 공중으로 떠오르지 못하는 그들은 괜히 죽은 인간의 시체를 물어뜯으며 분풀이를 했다.
“여기서 뭐하라고? 몬스터 떼 구경하라고?”
PK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미동도 없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아니. 잠시만 기다려 봐.”
그는 재촉하는 내가 성가셨는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사람을 우산 셔틀로 부려먹고 바라는 게 많네. 나는 반쯤 젖은 그의 어깨를 흘끗 보고는 우산을 더 기울여줬다. 난 이미 젖었으니까 아직 덜 젖은 사람을 살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
노래에 이끌린 몬스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져갔다. PK는 그 수가 쉰은 족히 되어 보이는 때에 음악 연결을 끊었다.
쾅-!!!
거인이 발구르기를 한 것처럼 땅이 움푹 패였다. 가득 모였던 몬스터들은 빈대떡처럼 눌려 으스러져 있었다.
“네 능력이 뭐였지?”
나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절명해버린 몬스터 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PK는 내 손에서 우산을 가져가며 답했다.
“염력 비슷한 거?”
“PK가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의 약자야?”
“글쎄?”
땅에 내려온 PK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몬스터의 잔해물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뭐가 됐든 돌발 행동은 예고를 하고 해. 일단 동행하고 있잖아.”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PK는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헤실헤실 웃었다. 같이 다닌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종잡기 어려운 사람이다.
외부 차원으로부터 침식된 공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두 공간이 뒤섞여서 이상한 공간이 될 뿐.
나는 침식이 멈춘 들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는 예전에 뭐가 있었어?”
PK는 두 번이나 이곳이 예전에 어디었는지 아냐고 물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잔해물을 줍던 PK가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금 슬프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