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옷을 잘 챙겨 입어도 밖으로 나가면 으슬으슬한 시기가 왔다. 나는 모자에 마스크까지 챙겨 쓰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방문할 장소가 있었다.
PK가 낙원교와 얽혀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저번 주에 알았다. 목요일에 낙원교 집회. 이 인간은 나한테 이걸 왜 들려준 걸까. 드디어 감방에 갈 마음이 생겼나?
밖에서도 여러모로 철저했던 PK 성격에 그런 중요한 정보를 실수로 흘리지는 않았을 거다. 결국 내게 그런 정보를 흘린 것은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는 것.
정말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나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보폭을 좁혔다. 누가 물을 뿌렸는지 땅이 얼어 있었다.
꽁꽁 언 땅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가로질러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있으니 넓은 부지에 우뚝 서 있는 병원 건물이 보인다. 한결이가 입원해 있고, 러브리스를 만났던 그 병원이다.
◀[저기요 유주하 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직무유기]▶
◀[그 사람이 안 나타나는 걸 저보고 어쩌라고요]
[저는 밤새 흘린 눈물로 한강을 만들 수 있어요]▶
극야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네가정말좋아와는 아직도 연락을 했다.
말 한마디 보낼 때마다 극야 언제 데려오냐고 징징대는 꼴이 어릴 적 사촌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꼬우면 직접 찾으시던가요]
[제 앞에 안 나타나요]▶
◀[그러게 착하게 사셨어야죠]
[그분 존함에 맹세코 선량하게 살았어요]▶
네정좋은 나도 모르는 극야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선량함을 어필했다. 바깥의 그를 아는 나한테는 코빼기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연락을 한 이유는]
[찾았나요?]
▶
◀[그건 아니고]
[자꾸 쓸데없는 일로 연락하지 마세요]▶
밖에서는 들이대지 못해서 안달난 인간처럼 굴더니만, 안에서는 싸가지가 없구나.
나는 네정좋의 범상치 않은 인성을 새삼 실감했다.
◀[똑같이 그 사람을 보는 사람을 찾아서요]
◀[혹시 만나보실래요?]
러브리스를 찾은 김에 두 사람을 붙여두면 둘이서 뭔가 해내지 않을까?
나는 독립성이 넘치던 낙원 길드 사람들을 생각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아뇨]▶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저 바빠요]▶
그러나 네정좋은 단호했다.
러브리스랑은 바깥에서부터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이 대답은 네정좋의 본능적 거부일까, 아니면 내재된 인성질일까.
실제로 일이 바쁜 걸 수도 있겠다. 나야 비정규직 편의점 알바생이지만, 저쪽은 직업이 있으니까.
낙원을 대표하는 두 사람을 모아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내 야망은 그렇게 시작도 못하고 막을 내렸다.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다시 찾은 병원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요새 병원을 습격하는 괴물이 이 근처를 배회해서 그런 것 같다. 이 병원은 다시 습격당한 곳은 아니지만, 또 목표가 될까 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서 뒹굴다가 알바 시간 맞춰서 편의점에 가는 건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전화를 받았다.
[“어제 말 안 한 게 있는데, 혹시 그 괴물 찾고 있어요?”]
“예? 괴물요?”
[“어제 말했잖아요. 밖에 괴물이 떠돌고 있다고. 요즘 일어나는 사건도 그 괴물 때문이라면서요.”]
전화가 걸려온 건 오늘 아침이었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걸려온 전화에 끙끙대며 일어났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침에도 변함없는 하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도 모호한 시간이었다. 오전 5시면 새벽 아닌가?
[“보다보면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장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잠실역에 있는 그 흉물스러운 타워.”]
“눈이 정말 좋긴 하시네요. 하긴 그게 하람 씨의 유일한 장점이죠.”
[“아침부터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오전 5시부터 전화를 걸어 놓고 싸우지 않기를 바라다니. 지금 나보고 싸우자는 건가?
나는 밀려오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저번부터 전화 거는 시간이 왜 이래? 오후 11시로 모자라서 오전 5시라니. 예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헷갈렸다.
[“얼마 전부터 검은 기운이 다른 곳에서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냥 저기에도 안 좋은 게 있겠구나 하고 접근하지 않는 걸로 끝냈는데, 듣고 보니 괴물의 움직임과 일치하는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지금 하시는 말씀은 그 괴물이 머무는 장소를 알 수 있다는 거죠?”
[“이게 억측이 아니라면요.”]
정말 눈 좋은 것 하나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수준이다. 이 정도 능력이면 파산해도 문제 없겠는데? 금세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다수의 사람을 위해 경찰에 알려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어제 자료를 찾아보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라서요. 관심 없어서 잘 몰랐는데 보기 시작한 날과 사고가 터진 날이 얼추 비슷해요. 병원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가요.”
[“그리고 진작에 알았더라도 경찰에 알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확실한 이유 없이 제보했다가는 범인 취급을 받겠죠.”]
“코리안 샤먼 같은 이유를 대도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도 우리 근처에는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짜 미쳤어요?”]
“어후, 당연히 농담이죠. 진정하세요.”
하람의 반응이 격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재미없는 조크를 던진 척했다. 실제로 진심은 아니었다. 이 동네 하람은 여러모로 놀리는 맛이 있었다.
[“……아무튼, 괴물을 찾고 있다면 그 병원에 가보세요.”]
“그 병원이요?”
[“저희가 처음 만난 병원이요. 그쪽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거든요.”]
할 말을 마친 하람은 공부하러 가야 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하람과 만났던 병원이라면 한결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인데, 그 병원을 다시 찾아야 할까?
무턱대고 그 병원에 다시 가기엔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그 근처는 PK 출몰 지역이다.
내게 일부러 수상한 정보를 흘린 PK를 대면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극야라는 안전장치가 있어도 PK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극야라면 내가 드럼통 다이빙을 겪고 있을 때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예전엔 긴가민가했는데, ‘전하만 망하는 거죠^^’를 듣고 난 후에 확신했다. 진짜로 그럴 것 같다.
근데 그렇다고 안 가기에는 그쪽에 한결이가 있는데. 이대로 둔다면 한결이는 그 괴물의 손에 명을 달리할지도 몰랐다. 저번에도 괴물에게 노려졌던 아이 아니던가.
내게 특성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망설였을까? 아니. 한결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 애는 PK의 동생이고, 그 인간이 색욕왕에게 협조하는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특성이 없다. 극야를 부른다면 내 목숨 정도는 건질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힘의 부재가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왔던 때가 있었나? 없었지. 기껏해야 금전 부족 정도였으니.
사색이 길어졌다. 길어진 밤이 물러가며 해가 뜬다. 나는 희미하게 밝아져 오는 하늘을 보며 결심했다.
일단 뭐든 해보기로.
* * *
뭐, 원래 낙원교를 팠던 것도 막막한 상황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던 게 아니었던가.
나는 병원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병원은 여전했다. 크게 눈에 띄는 구석은 없었다.
일단 한결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곳까지 왔다. 괴물과 맞서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실패했을 때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내가 PK를 만난 건 PK가 한결이를 잃은 후다.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을 PK와 함께했는데 그동안 눈치채지도 못했다면 한결이를 잃은 후가 맞겠지.
애초에 한결이를 잃지 않았다면 PK가 혼자 움직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한결이를 찾고 있던 거라면 진작 말해주었을 거다. 찾으러 가야 하니까.
띵-.
병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섰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으, 으으…….”
엘리베이터 안쪽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환자가 작게 신음했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점점이 뿌려진 붉은 핏방울. 상황을 깨닫자 익숙한 피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끙끙대며 신음하던 환자가 돌연 앞으로 고꾸라졌다. 철퍽하고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아아악-!! 사람이, 여기 사람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이 악에 받힌 비명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이쪽으로 쏠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쓰러졌어요!!”
“누가 직원 좀 불러!!”
“응급 환자라고 해, 빨리!!”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몇 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였지?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로비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응급실로 뛰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비상계단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너무 늦고 말 거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나는 휴대폰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병원]
◀[병원급함]
◀[한결이위험]
드럼통 유기? 내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지금 상황? 내게 의심스러운 정보를 알린 PK의 수상함?
다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결이의 죽음을 목도한 PK가 무슨 짓을 할지, 나는 그게 두려웠다.
온갖 곳에 개인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나와 다르게 PK는 자신의 정보를 흘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제법 오래 알고 지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여기 갇히기 전에는 이름조차 몰랐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은 그냥 부끄러워서 숨긴 것 같지만.
언제나 능청스러운 그 인간은 한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로 스케일 큰 사고를 치고도 태도 변화가 없었다. 물론 내게 수습을 시키게 되었다고 미안해했다면 그것도 이상했을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나는 그동안 PK와 얼굴 맞대고 지내면서 그 인간이 크게 화내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신나서 히죽대는 꼴이야 많이 봤지. PK는 신이 나거나 즐거운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숨기는 건 오직 부정적인 감정뿐이었다. 망해도 웃고 슬퍼도 웃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닥쳐올 때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주둥이야 열심히 털어댔지만.
나는 PK가 분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화가 난 그가 보일 반응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평소에 화내지 않는 사람은 화가 나면 정말 크게 터진다.
PK의 경우에는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터지면 문제가 될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단을 뛰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