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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35화 (135/175)

제135화

병원은 언제 와도 기운 빠지는 곳이다.

어렸을 때는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가 정말 싫었다. 단순히 소독약 냄새가 싫었던 건지, 아니면 병원 특유의 분주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싫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특성을 발현한 이후에는 병원에 온 횟수가 손에 꼽히지만, 나는 아직도 병원을 싫어했다.

병원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주가 생각나는 알콜 솜 냄새, 난리 난 응급실과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응급실 침대, 그리고 텅 빈 위장과 끝나지 않는 검사.

큰 병원을 찾을 일이 흔치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지하에 푸드코트랑 빵집이 있는 건 좋다. 나는 병원 로비를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했다. 저번에 그 불고기 덮밥 괜찮았는데 밥이라도 먹고 갈까.

레나가 말하기를 이 병원 푸드코트의 존재 의의가 돈까스라고 했는데, 아니면 돈까스?

돈까스 사준다는 말에 홀려 치과에 끌려갔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병원과 돈까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먼저 자리를 비킨 러브리스가 지하에 있는 빵집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고 갔다.

나는 지하를 향해 걸으며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 남자를 찾으시고 싶다고요? 왜요?”

네가정말좋아도 극야를 꼭 찾고 싶다고 말했었지. 러브리스도 똑같은 반응이다. 나는 낙원 사람들이 왜 극야를 찾고 싶어하는지 궁금했다.

이성으로 단단히 무장한 러브리스도 네정좋이랑 똑같은 이야기를 할까? 그저 운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네정좋은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네정좋의 알아듣기 힘든 말보다 조금 더 간결하고 정확한 대답이 필요했다.

러브리스는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당신하고 똑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남자를 본 사람이요.”

나는 머뭇거리는 러브리스를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그 남자를 찾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 남자를 본 사람들은 다들 그 남자를 찾고 싶어 했죠. 저는 궁금해요.”

청보랏빛 눈이 아닌, 갈색 눈을 가진 러브리스는 극야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당신이 그 남자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극야는 예나 지금이나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나는 그동안 극야라는 인물을 열심히 파헤쳤고, 약간의 정보를 얻었다. 그는 회귀자고, 과거 나와 계약한 악마였으며, 세계를 끝없이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극야의 장기말인 낙원 길드원들. 특히 중심에 있는 네정좋과 러브리스.

그들이 말한 몇 번째 신하는 극야와 관련 있는 말인가? 나는 이것 또한 이 안에서 알아내고자 했다. 진짜 이예단의 존재도 알게 되었는데, 이것도 파보면 나오지 않겠어?

“그건,”

한 손으로 다른 팔을 잡은 러브리스가 우물쭈물 거렸다. 내가 아는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나는 러브리스를 재촉하지 않고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러브리스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나는 계속 고민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 사람은 내 생각보다 더 까라면 까는 것을 잘했다. 학교 다닐 때도 분명 꽉 닫힌 모범생이었겠지.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러브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남자는 그동안 잊고 살았어요. 어릴 때 한번 보았던 사람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방금 말씀하실 때 떠오르더군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남자가요. 그러면서 그 남자를 잊은 제가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그 남자는……”

러브리스가 고개를 바로 들었다. 러브리스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 삶의 전부거든요.”

삶의 전부. 현대 사회에서는 쉬이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물론 과거에도 삶의 전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본래 자기 삶은 자기 것 아니던가.

남한테 삶을 맡기지 않은 이상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지. 가족이나 연인이면 또 몰라도.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러브리스가 말한 삶의 전부든 네정좋이 말한 운명이든 결코 평범한 말들은 아니다. 나는 네정좋보다 말솜씨가 뛰어난 러브리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누군가가 속삭이고 있어요. ‘그 남자는 내 삶의 전부야. 나의 주인이고, 그 어떤 세상이든 내가 모셔야 할 사람이야…’.”

“속삭이고 있다고요?”

“네. 속삭이고 있어요. 그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을 따라야 한다고, 그게 옳은 삶이라고,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러브리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다.

“제가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도 누가 소리치고 있어요. 다시는 잊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 남자를 만나게 되면 꼭 연락해주세요. 제 연락처를 드릴게요.”

아까 국어책 읽는 것처럼 목소리 뻣뻣했던 건 러브리스의 이성이 그 상황을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인가?

나는 러브리스와 번호를 교환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다.

대부분 간단한 이야기였다. 한결이와 그 애의 보호자 PK, 이 병원 지하에 있는 빵집의 추천 리스트, 극야가 입은 코트가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다, 뭐 이런 것.

러브리스는 이 상황을 운명이라고 여기며 무작정 극야를 찾던 네정좋과는 다르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극야의 마수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혹시 여기 보고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안 보고 있는 모양이다.

저쪽에서도 밥 먹고 있나? 나는 인파를 헤치며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밥 먹을 거니까 카드를 미리 빼놓는 게 좋다. 괜히 사람 몰렸을 때 카드 찾겠다고 시간 끌면 매너 꽝이다.

나는 손가락만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카드를 찾았다. 우리는 극야에 목을 매는 네정좋과 러브리스를 통해서 그들 사이에 무슨 계약 같은 게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데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극야에 목을 매겠어? 생각해보면 네정좋과 함께 있던 레터는 극야를 못 본 눈치였다. 둘 중에서는 네정좋만 극야를 보았다.

“극야 바보 멍청이.”

나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연발했다. 욕을 들어도 반응이 없다면 확실히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주변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나는 바뀐 것 하나 없는 세상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극야 별거 아니네. 이래서야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오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동시에 파지직 소리와 함께 건물 안을 밝히던 조명이 모조리 꺼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날 향해 있었다.

“……취소할게요.”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오금이 저린 광경이다.

나는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른 심장 소리를 느끼며 재빨리 백기를 흔들었다. 안 그랬다간 이 세계 장르가 갱스터 느와르에서 공포 스릴러로 바뀔 것 같았다.

백기를 흔들기 무섭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불은 다시 켜졌고, 사람들은 언제 날 쳐다보았냐는 듯이 자기 할 일을 했다. 아까의 상황이랑 괴리감이 너무 심했다. 나는 조용히 팔뚝을 주물렀다. 소름 돋았다.

“말조심할 테니까 다음에는 조금 약하게 반응해주세요.”

나는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극야를 향해 정중하게 요구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까 그 시선 두 번 받는 것보다 아이돌 데뷔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쪽은 좋든 나쁘든 감정이 담겨 있는 시선이잖아. 아까 그건 로봇이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상상해 보라. 무감각한 눈 수십 쌍이 나를 주목하는 상황을. 포브스 선정 올해의 악몽 1위로 선정될 판이다.

직접 이 세계에 나타나는 것부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이 세계 사람들을 움직이는 식으로 간섭하는 것.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극야는 이 환영의 주인인 색욕왕을 누르고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었다.

내 정신의 수호자라고 말하는 녹색 눈의 악마는 대체 어디 간 거람. 나는 푸드코트 앞에서 돈까스를 계산했다. 우리 집 악마는 알고 보면 입만 산 악마일지도 모른다. 이러다간 수호자가 아니라 키링으로 불러야겠는데?

색욕왕의 녹색 눈은 편애로부터 비롯되었을 텐데, 어째서 편애는 이 세계에 간섭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가장 큰 의문을 품은 채로 돈까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돈까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짧은 대기 시간이 장점인 것 같은 이 집 돈까스는 요새 인기 있는 두툼함이 아닌, 가성비 좋은 얇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도 밤에 오지?]

[올 때 부침용 두부랑 참치 캔 사와]▶

[살코기로 사오고 영수증 가져오면 엄마가 돈 줄게]▶첫 번째 돈까스 조각을 입에 넣기 무섭게 엄마한테 메시지가 왔다. 나는 손에 든 젓가락을 접시에 냉큼 내려놓고 답신했다.

◀[바나나 우유도 사주면 안 돼?]

심부름할 때 간식 하나씩 끼워넣지 않으면 심심하지. 나는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시 젓가락을 쥐었다.

[네 개짜리 말고 하나만 사와]▶

◀[ㅇ.ㅇ]

응, 하고 치려던 게 잘못 눌러서 ㅇ.ㅇ이 되었다. 에이, 이 정도면 엄마도 이해할 거다. 가끔 ㅇㅇ 해도 뭐라고 안 하는데.

식사를 마치면 마트에 들렀다가 집에 가야겠다.

시간은 넉넉하니까 잠깐 들러도 알바 시간에 지각하진 않을 거다. 그동안 알던 사람을 또 마주치지는 않겠지? 나는 돈까스 소스를 휘적거리며 고민했다.

반서준부터 러브리스까지. 이 세계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을 다 서울에서, 특히 이 근처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봤다.

물론 우리나라가 서울 공화국이기는 하지. 하지만 서울도 이 근처뿐인 건 아니지 않나.

세상에 우연이 그렇게나 많은 게 말이 돼?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특히 레나랑 하람, 그리고 PK 말이다.

한결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병원에 안 왔을 테니 레나를 못 만났을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하람을 못 만났을 거다.

PK도 한결이의 오빠라서 만나게 된 거니 한결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못 만났겠지. 러브리스 또한 한결이의 담임 선생님이니 한결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못 만났을 거다.

한결이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구조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만남을 조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 의심스러운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식사를 마쳤다.

누가 그들을 만나게 하고 있는 걸까? 색욕왕?

그런 거라면 목적은 내가 이 세계에 쭉 남아 있게 하는 건가? 그들을 만나게 한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색욕왕의 의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식기를 반납하고 병원을 나왔다.

사오라고 했던 게 바나나 우유랑 고등어였던가……. 아무거나 사 가서 등짝을 맞느니 마트에 가서 다시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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