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러브리스가 왜 한결이의 병실에 있는가.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러브리스 또한 ‘보았느냐’ 였다.
옷자락을 잡힌 러브리스가 고개를 기울여 내 손을 내려다봤다. 아, 이대로 있으면 옷이 늘어나겠구나.
나는 그녀의 옷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러브리스는 그대로 내 뒤쪽으로 손을 뻗더니, 병실 문을 닫았다.
“하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요?”
러브리스의 갈색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나는 러브리스에게서 네가정말좋아의 편린을 보았다.
“이 정도 되는 키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러브리스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올려 키를 표시했다. 그녀의 손등이 있는 위치가 극야의 키와 똑같았다.
“네! 맞아요!”
“스쳐 지나가면서 봐도 잊기 힘들 정도로 천사 같이 생긴 남자, 맞죠?”
“네!!”
나는 러브리스의 말에 열렬히 반응했다. 그래, 생긴 건 천사인데 종족값은 악마고 성격은 둘 다 아닌 그 사람 말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러브리스라면 극야를 봤을 줄 알았다.
이 세계에서 머물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바깥의 세계가 주가 된다. 특성이 없어 다들 다른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바뀌지 않았다는 소리다.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이예단으로 예를 들어 보자. 이예단은 과거의 어린 시절에 극야가 찾아왔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반서준. 편의점에 매일 같이 출석 도장을 찍는 그 경찰과는 말문을 조금 텄다. 나는 백수 취준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반서준에게 물었다.
“경찰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
“경찰이요? 시험을 치시거나 경찰대에 입학하시면…….”
“그게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설마 공무원이라 되신 건 아니죠?”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지자 반서준도 마주 웃었다. 저 동네 반서준은 농담 던져도 살벌하기만 하던데, 얘는 농담도 받을 줄 아네.
“공무원이 좋아 보여서 경찰 시험이라도 치시려고요?”
“에이~ 그럴 바엔 하던 거 계속 하죠. 그냥 취업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만약 특정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지금쯤 그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고요.”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게이트가 터져버렸으니까. 학과 맞춰서 직업을 가지려고 했어도 시험 준비해야하는 건 똑같고.
대답을 들은 반서준이 커피 캔을 쥔 채로 곰곰이 생각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경찰이 된 게 공무원이기 때문은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한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요?”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마약 중독자가 흉기난동을 벌인 사건이 있었어요.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하실지 잘 모르겠네요.”
반서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반서준이 대학교 1학년이었던 시기면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겠네. 이곳의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토익은 땄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나면서 그때가 그리워졌다.
“처음에는 분명히 흉기 난동 사건이었는데, 대치가 길어지다 보니 살인 사건이 되었죠. 지나가던 시민이 범인을 쓰러뜨려서 한동안 유명해졌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이 동네 출신이 아니라서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여 모른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반서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는 그때 도움을 받고 목숨을 건졌어요. 그 뒤에 경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험을 봤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바깥의 반서준이 헌터가 된 이유랑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영수증을 건네며 사건을 해결했다는 정체불명의 무림 고수에게 감탄을 보냈다.
지나가는 시민이 칼 든 사람을 쓰러뜨렸으면 그게 바로 무림 고수지. 손으로 칼날 딱 잡고 말이야.
이번에는 내가 구하지 않았지만, 이쪽 반서준도 잘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잘 가라고 인사라도 해줄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
그러나 반서준의 눈빛을 본 순간, 고개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몹시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나는 그제야 반서준의 이야기 속 무림 고수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반서준은 잠깐의 침묵 후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슬퍼 보인다.
‘정신 나갈 것 같아…….’
반서준이 떠난 뒤, 나는 꽉 닫힌 편의점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색욕왕이 날 무림 고수로 만들어 놨다. 개연성을 어디다 갖다 팔아먹은 거야?
델리키아를 물리쳤던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어쩐지 반서준이 맨날 와서 얼굴 도장 찍더라.
……근데 흉기 난동에 이어 살인까지 한 범죄자는 대체 어떻게 때려잡은 거지? 그런 짓을 해놓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반서준을 볼 때마다 과거를 아는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깨닫게 된 것은 결국 이 세계의 틀이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괜찮으시다면 그 남자를 언제 어디서 봤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러브리스에게 말했다. 저번에 네가정말좋아가 극야를 보았다고 했었지. 그 뒤로 계속 생각했다.
“네정좋이랑 러브리스는 낙원에 어떻게 들어간 걸까? 벚꽃나비처럼 그 둘도 스카웃? 극야가 직접 스카웃 했겠지?”
【“저번에 그렇다고 들었어.”】
“오, 어떻게?”
【“한 명은 얼굴에 홀려서 들어왔고, 한 명은 위험할 때 구해줘서 들어왔다던데? 근데 러브리스는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
“무슨 말?”
바깥과 틀이 같아서 과거의 큼지막한 사건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라면, 【“자기가 어렸을 때 죽을 뻔한 걸 자색 눈이 구해준 적 있다던데?”】
“뭐? 그걸 어떻게 구해줘? 그때도 우리 차원에 있었대?”
【“그거야 난 모르지. 봉인 상태였어.”】
러브리스는 과연 어렸을 때 극야를 보았을까?
“이야기 해드리는 건 어렵지 않죠. 그런데 저도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이곳은 특성과 마법이 배제된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 마법의 근원이 간섭할 수 있는가?’ 는 내 개인적인 의문. 이예단도, 네정좋도 극야를 보았다면, 극야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델리키아는 통째로 삭제되어버렸는데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남을 무림 고수뻘 용감한 시민으로 만들어 버린 세계였다. 정말 궁금했는데 마침 러브리스를 만나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러브리스의 반응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지금 팔에 끼신 봉투에 들어있는 건 슬라임인가요?”
“아, 네.”
“한결이가 깨어나면 학교에 슬라임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설득해주시겠어요?”
러브리스가 내 손목에 걸려 있는 문구점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예상 외의 대화 주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종종 장난감을 입에 집어넣는 아이들이 있어서요. 저희 반에 있는 한 아이가 자꾸 슬라임을 먹으려고 해요. 한결이에게 가져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말을 잘 안 듣네요.”
러브리스의 시선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한결이에게 닿았다. 아련하게 흩어지는 미소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한결이를 보러 오신 거죠?”
생각해보니 극야에 대해 묻느라 러브리스가 여기 있는 이유조차도 알지 못했다. 나는 러브리스에게 질문했다.
“네. 학교에 자주 오진 못하더라도 저희 반 학생이니까요.”
“선생님이신가요?”
“한결이 담임이에요.”
담임…… 그렇구나.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러브리스의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한창 바쁠 저녁 타임에 메시지를 보내오던 한결이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틀은 같다고 했지. 바깥 세계에서 한결이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결이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인 걸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여기서도 이미 죽었어야 했다. 흉기 난동에 휘말려 죽은 반서준의 동기들처럼 말이다.
괴물이 타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나는 눈 감은 한결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곧 깨어나겠죠. 그때 꼭 말할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러브리스의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한결이가 깨어날 일은 극히 드물다는 걸 알고 있다.
바깥의 한결이는 아마 죽었을 테니까.
외상을 입은 건지 작은 머리에 감겨 있는 붕대가 보인다. 아마 이곳을 습격한 괴물 때문에 혼수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타워 안의 괴물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만 잡아 죽였으나, 타워 밖으로 나온 괴물은 무작위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기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어떤 기준인지는 알지 못했다.
만약 그게……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면?
게이트가 열렸을 때 몬스터에 의해 목숨을 잃었어야 할 사람들. 바깥에서는 진작에 죽었으나, 이곳에서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골라 죽이고 있는 거라면?
등골을 타고 섬찟한 감각이 올라왔다. 이 세계는 내 생각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기는 앉아서 할까요?”
섬뜩한 사색에 푹 잠겨있을 때였다. 사색을 깨는 러브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좋아요.”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희망을 갖자. 일단 러브리스의 이야기부터 듣는 게 좋겠다.
나는 러브리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러브리스는 바로 이야기를 풀었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어요. 근처에 개울이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 물살이 굉장히 세지는 곳이었어요. 방과 후에는 동네 애들이랑 같이 개울가로 가서 노는 게 일상이었고, 그 날도 변함없이 개울가에 갔어요.”
러브리스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기억해두었다.
“비가 온 후라 물살에 휩쓸리셨군요?”
“네. 맞아요. 그대로 쭉 떠내려가면 강으로 가요. 그럼 거의 죽었다고 봐야죠.”
러브리스는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몹시 담담했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였다.
“그때 절 건져준 게 하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였어요. 이 정도 되는 키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요.”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러브리스가 다시 한번 극야의 키를 표시했다. 묘하게 재밌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에요. 별거 없는 이야기인데, 도움이 되셨나요?”
“네. 감사합니다.”
내용 자체를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고, 러브리스가 극야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했다.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러브리스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에 관해서 왜 물어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별거 아닌 질문이었다. 나는 가볍게 답했다.
“그 사람을 찾고 있어서요. 그래서 목격담이 필요했어요.”
진짜로 찾는 건 아니지만, 이런 질문에는 이만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러브리스에게 재차 감사하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 병실에 있는 슬라임을 싹 쓸어 담을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그러나 이번에는 러브리스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예?”
반사적으로 물음이 튀어나갔다. 조금 전 내가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러브리스가 내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러고 있다가는 옷이 늘어날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러브리스가 조금 느리게 입술을 뗐다.
“그 남자를 찾게 되면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여전히 국어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