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궁극적인 목적이 생겼다고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일상이란 게 원래 그런 거였다. 약간의 변화로는 쉬이 달라지지 않는 것 말이다.
바깥에서는 늘 편애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아야 했는데, 안에서는 극야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아야겠구나. 나는 손목에 낀 문구점 봉투를 달랑거리며 병원 로비를 걸었다. 시간은 한낮이었다.
저번 금요일에 벌어진 소동은 극야의 난입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예단은 이 세계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복수를 다짐했으며, 나는 타워를 같이 오를 사람을 얻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타워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괴물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 괴물이 노리는 것은 주로 노약자. 특히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좋아했다.
괴물의 등장 이후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괴물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출몰했고, CCTV 같은 현대 문물로 잡을 수 없는 속도를 냈다.
타워는 감옥이니 그 안에서는 능력치가 제한되었던 걸까? 괴물은 타워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장난이었던 것처럼 날랬다. 세상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환자를 만나러 왔는데요.”
병원이란 장소는 어느 때든 늘 아수라장이지만, 요즘은 더 혼잡하고 분주했다. 나는 방문 시간을 맞춰 한결이의 문병을 왔다.
병원을 습격한 괴물의 소식이 포털 사이트 뉴스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한 날, 나는 한결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결아 괜찮아?]
◀[그 병원에 사고가 났다던데]
장기 입원으로 등교하는 날이 드문 한결이는 메시지 확인이 빠른 편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시각은 밤 10시. 지금은 자고 있을 시간이니 내일 확인하면 답장을 보내주겠지?
나는 안일하게 생각하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답장은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누나, 걱정이나 고민 있어요?”
“예?”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교대 시간에 맞춰 출근한 이예단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내가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가? 아까 왔던 반서준도 비슷한 말을 하고 떠나긴 했다.
“그냥…… 별 거 아니에요.”
평소에 씩씩하게 답장 잘 보내던 애가 아무 말도 없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한결이네 오빠 봄결이♡
010-XXXX-XXXX]
PK한테 연락을 해볼까? 그나저나 한결이 얘는 언제 하트를 붙여둔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와 완전히 다른 연락처 이름을 PK로 고쳐 썼다.
“걱정하는 거면 몰라도 고민하는 거라면 일단 해보세요.”
겉옷을 벗고 조끼를 걸친 이예단이 조언했다.
“어차피 진짜 세계도 아닌 걸요. 잠깐 망설였던 것 때문에 바깥에 나가서도 후회하게 될지 모르잖아요?”
엷게 지은 미소 뒤로 후회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경험담인 것 같았다.
“네. 참고할게요.”
마음이 PK한테 연락한다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PK한테 연락할 용기를 내기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무래도 특성을 되찾기 전에는 일반인과 다름 없으니 말이다. 지금 PK랑 싸웠다가는 내가 질걸? 이런 저질 같은 신체 스펙으로는 누구랑 싸워도 못 이긴다. 특성을 되찾기도 전에 바다 다이빙하면 좀 곤란하지 않나.
보험으로 극야가 있긴 하지만, 극야만큼 믿기 곤란한 사람도 없었다. 혹시 모르지. 그 악마라면 드럼통에 갇히고 나서야 ‘재밌어 보이시네요.’ 하면서 날 구해줄지.
믿는 구석이 있긴 한데, 종잡을 수 없어서 어렵다. 나는 결국 이예단에게 조언을 들은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드럼통의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연락이었다.
◀[안녕하세요, 우연희라고 합니다.]
◀[잠실역 지하에서 한결이랑 만난 후로 종종 문병을 가곤 했던 사람인데, 한결이가 연락이 안 되어서요.]
◀[괜찮으시다면 한결이의 안부를 여쭤보아도 될까요?]
물론 이 동네에서는 PK도 상식인인데, 갑자기 드럼통 급발진을 할 확률은 낮겠지.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만일을 대비해야만 한다. 나는 내가 보아왔던 PK의 인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직업에 어디 사는 지까지 물어봤으면 그건 100%다. 내 뒷조사를 하고 있는 거라고.
뭐…… 여기서는 백수니까 뒷조사해도 나올 건 없겠지만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심해해야 하는지. 복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누나, 전화 오는데요?”
낮에 예의를 차려서 보낸 메시지는 밤 11시가 다 된 시각에 전화로 돌아왔다.
나는 엄마 취향의 뽕짝이 벨소리로 울리는 휴대폰을 두고 아주 깊은 고민을 했다.
아, 이걸 받아? 아니면 말아?
일부러 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 저 쓰레기랑 전화하기 싫어서 아니냐고. 잘 모르는 사이에서는 전화가 예의긴 하다만, 메시지 보낸 걸 굳이 전화로 돌려줘야겠어?
그리고 밤 11시에 전화하는 건 메시지보다 못하지 않나? 나는 이 동네 PK의 예의범절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정교육 대체 어떻게 받은 거임?
“옙. 여보세요.”
하지만 먼저 연락한 건 나였고, 드럼통 IF는 극야라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한결이 오빠 분 되시죠?”
나는 이예단에게 양해를 구하고 편의점에서 후다닥 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무언가가 마구 펄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잘 들으면 거센 바닷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바다 다이빙은 그저 기우일 뿐이었던 거 아니었나. 진짜로 바다에 있다고?
“저기요?”
화면에는 분명히 통화 중이라고 떠 있는데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PK의 대답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분간 몹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외국어와 총성, 그 와중에 들리는 한국어까지.
[“물량이 그쪽에…… 있……“]
[”낙원교…… 가……“]
[”……목요일 10시에 집회……
“]
……어쩐지 들으면 안 되는 걸 들은 것 같았다. 중간에 낙원교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조용히 통화를 끊었다.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느라 연결해놓고 안 받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X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몹시 심각하게 말이다.
지금 대체 뭘 들은 거지? 나는 혼란스러운 멘탈을 다잡으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편의점 카운터에서는 낙원교 교주 아들이 태평한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목요일 10시에 집회 있어요?”
들어온 날 보고 손을 흔들어주던 이예단이 화들짝 놀라며 기우뚱 넘어갔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
글쎄요. 제가 이걸 알고 싶어서 안 건 아닌데. 지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혹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무시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모르는 번호요?”
“아마 드럼통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저일 수도 있어요.”
영문을 모르는 이예단이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진지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진지했다.
“낙원교와 엮인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있나요?”
“마약 밀수범이라면 있어요.”
“진짜 심각한 단체긴 하네요.”
평범하게 살면 쉽게 들을 수 없는 화제가 무려 두 개나 있었다. 사이비 종교와 마약 밀수범.
문명의 발달이 우리를 범죄와 더욱 가깝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기술의 발달로 심각해진 SNS 범죄를 거쳐 로봇 반란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까지 상상했다. 물론 이 세계는 그 전에 사라질 예정이긴 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질문이 좀 수상했는지 이예단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봤다. 나는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바깥 세상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였던 사람이 있어요.”
“네.”
“그럼 그 사람은 이 안에서도 극악무도한 범죄자일까요?”
바깥의 PK에겐 아주 강력한 특성이 있었다. 특성을 가진 PK는 보통 특성에 관련된 범죄에 엮여 있었다.
거짓된 세계의 PK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바깥에서 범죄자였던 사람은 이 안에서도 범죄자일까?
한결이가 있는 데도?
“저는 그게 궁금해요.”
혼자 고민해서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지이잉-. 휴대폰이 울린다. 나는 휴대폰 화면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흘끗 보았다.
[한결이는 지금 혼수 상태에요.]
▶
[문병 오셔도 괜찮습니다.]
▶
PK로부터의 답장이었다. 아까 연결되었던 통화를 언급하는 말은 조금도 없다.
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함정을 판 걸까. 이것 또한 혼자 고민해서는 절대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아요.”
무표정한 얼굴의 이예단이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범죄에 손을 댔다면, 다른 세계에서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 사람의 사고는 바깥과 똑같을 테고, 그렇다면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가요.”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다른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보아 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어요.”
말을 마친 이예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 위에 떠 있는 메시지를 옆으로 밀어 지웠다.
바깥에서 범죄자면 이쪽에서도 범죄자. 바깥에서 정의감 넘치던 반서준은 여기서도 경찰, 하람은 여전히 인성 갑, 네정좋도 개념 아웃.
부정할 틈 없이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생각 정리를 마친 후 이예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생각해보니 크게 고민할 거 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범죄자든 아니든 바깥에서 범죄자니 말 다한 거지. 신경 쓸 건 오직 내 안위 뿐이다.
짐을 챙기고 손을 흔드니 이예단도 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아무리 봐도 퇴근을 부러워하는 움직임이었다.
이예단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나는 한결이의 병문안을 위해 병원에 왔다.
평소처럼 접수를 하고, 변함 없는 태도로 병실까지 걸어왔다. 올 때마다 한결이가 좋아하는 슬라임을 사오곤 했는데, 이번에도 빼먹지 않고 사왔다.
PK는 무슨 심정으로 한결이가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을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혼수 상태에 빠진다면, 나도 그렇게 태연한 척할 수 있었을까?
나는 병실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열었다.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병실 안에는 나 말고도 다른 방문자가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테가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단정한 차림새에 차분한 분위기, 이지적인 눈빛을 가진 사람.
“안녕하세요.”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저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가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여자가 병실을 나가려는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하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를 본 적 있으세요?”
병실 안에 있던 여자는 러브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