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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32화 (132/175)

제132화

코끝을 간지럽히는 싸한 향기.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향기였다. 어디서 맡아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위로 들자 얼굴을 무릎에 묻은 이예단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이 세계가 가짜라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나라도 덥썩 믿긴 힘들었다.

하지만 극야의 존재는 그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그가 충격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렇게 쿨하게 받아들인 하람이 이상한 거라니까? 그 사람은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변함없는 것 같다.

“좀 괜찮아요?”

나는 계단을 올라 이예단 앞에 섰다. 뻥 뚫린 문 사이로 보이는 1층에서는 낙원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이만 떠나려는 모양이다.

“네. 괜찮아요.”

고개를 든 이예단이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일그러진 눈가가 눈에 띈다.

“아까 그 사람은 진짜 악마였던 거죠?”

그는 엉망이 된 앞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괴물을 손짓으로 눌러 죽이고 순식간에 사라졌잖아요.”

“일단 인간은 아니긴 해요.”

“보통 다른 사람의 꿈에 찾아오고,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대가를 받아가는 존재를 악마라고 부르지 않나요?”

충격이 제법 컸을 텐데도 이예단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런 존재를 보통 악마라고 부르긴 하지. 그리고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수의 사람이 그를 악마라고 부르긴 하죠.”

일단 내가 아는 극야의 이름은 두 개였다. 닉네임인 극야와 그를 통칭하는 명칭인 자색 눈의 악마.

진짜 이예단의 삶을 빼앗은 탓에 바깥의 모두가 그의 본명을 이예단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예단이라는 이름은 그의 것이 아니니까 두 개라고 할 수 있겠지.

쾅-!! 쾅쾅쾅-!!

아까 열려고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2층의 문이 마구 울렸다. 누가 안쪽에서 두들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물론 이예단까지 그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깐의 대치에 기력을 다 소모한 상태였다.

또 나라면 몰라도 이예단은 굳이 저걸 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는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지. 비록 이 세계는 조만간 사라질 세계지만 말이다.

“이 세계가 가짜라면, 저 또한 가짜인 거겠죠?”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던 이예단이 운을 뗐다. 극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 이 세계는 언젠가 무너지겠네요. 그렇죠?”

“그렇죠. 제가 이 세계를 나가면 무너질 걸요? 안 나갈 경우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거기부터는 아까 다녀간 악마만 아는 스토리거든. 그 악마도 모를 가능성이 있으려나?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물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이 세계가 무너진다면 저를 비롯해 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이 사라지겠죠?”

이예단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별다른 딴죽을 걸지 않고 착실히 대답해주었다.

“네. 그러겠죠.”

“제가 그걸 도울 수 있을까요?”

“예?”

이 세계의 사람에게는 절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말이 나왔다. 기본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게 무관심한 하람도 날 도울 것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렇겠지. 하람은 이 세계에서 이룬 것이 있다. 가족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완벽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 살면서 가장 필요한 금전도 충분했다.

언젠가는 모두 잃을 것들이지만, 그래도 이 세계의 하람이 노력해 이룬 것들이었다. 하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았다. 밀려올 허무함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는 소리다.

거기에 하람 특유의 무관심함이 더해져 지금의 태도가 된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예단이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저건 지구 종말을 돕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설마 미친 지구 종말론자일 리는 없고. 대체 왜? 나는 미간을 슬슬 좁히며 물었다. 이예단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타워를 올라야 한다고 들었어요. 설마 혼자 오르실 생각은 아니죠? 이 타워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시잖아요.”

“그건 맞지만, 제가 궁금한 건 왜 굳이 그러시냐는 거죠. 지금 하시는 말씀이 이상한 건 아세요?”

“알고 있어요. 누나를 도우면 제가 죽게 되겠죠. 그렇지만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다고.”

계단에 앉아있던 이예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검은 눈이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가 이 타워를 오르는 걸 도와드릴게요. 대신 누나도 저를 도와주세요.”

계단에서 몇 발짝 내려온 이예단은 아직도 울리고 있는 2층의 문을 퍽 걷어찼다. 문은 신기하리만큼 금세 잠잠해졌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았다.

“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요.”

세상이 무너지면 그 사람 또한 사라지겠지. 하지만 이예단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그 사람이 죽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어요.”

이예단의 검은 눈이 증오로 까맣게 불타올랐다. 무엇이 저 애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이예단과 낙원교에 얽힌 사연이 조금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

타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타워를 볼 수 있는데다가 날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더 드물다. 나는 이예단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건가요?”

“그건 제가 정리를 마친 후에 말씀해드릴게요.”

“사정은 설명 안 해줄거죠?”

“거기까지 밝히기는 좀 그래서요.”

대체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길래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걸까.

뭐, 안 알려준다면 어쩔 수 없지. 하람에게 낙원교 조사를 부탁해놨으니 그걸 들으면 낙원교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 무언가를 질문하려면 나도 얼추 알고 가야지.

우리는 낙원교의 바깥 정리가 끝난 후에 타워를 나왔다. 나는 그대로 알바하러 편의점에 갔고, 이예단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뒷모습만 보면 어디 외국이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

물론 하람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는 그쪽까지 구현이 안 되어 있다. 그리고 어차피 교대 시간에 얼굴 봐야 하는 사이기도 하고.

주말은 평범하게 흘렀다. 나는 괴물이 사라진 타워 1층을 샅샅이 뒤져가며 조사했다.

그리 특별한 건 없었다. 괴물이 사라지고 나니 그냥 어두침침하고 미래지향적인 건물이 되었을 뿐. 영화 세트장 같아서 돌아다니는 맛이 있었다.

[언니]▶

[할 거 없으면 놀러올래요?]

◀[언니 할 거 많은데?]

[거짓말!]

◀[맞아]

◀[다 거짓말이야]

◀[언니 할 거 없어]

[맞아! 언니가 언니 입으로 백수라고 했어요]▶

밖에 외출한 김에 내 근처에서 가장 맹랑한 꼬맹이랑도 좀 놀아줬다. PK는 날 조금 거북해하는 것 같았지만, 한결이가 원한다는데 어쩔 수 없지.

“언니. 우리 오빠 이름은 알아요?”

“언니는 너희 오빠한테 관심 없는데?”

“정말요? 우리 오빠는 관심 있어 보이던데. 언니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한결이는 틈만 나면 PK 옆에 날 갖다 붙이려고 애를 썼다. 내가 정말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보통 직업을 물어본 거로 관심 있다고 하진 않아.”

“그렇지만 어디 사냐고도 물어봤는데?”

“혹시 내가 너희 오빠한테 잘못한 거 있니?”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저건 나한테 관심 있어서 물어본다기보다는 날 드럼통에 넣고 바다에 다이빙 시키려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응? 우리 오빠한테 잘못한 거 있어요?”

“나도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음…… 물어볼까요?”

“아니.”

물어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나는 한결이의 배려를 거부했다. 한결이는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PK를 소개시켜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언니! 그럼 우리 오빠 전번이라도 저장하고 가요, 응?”

“전번? 그런 줄임말은 어디서 배웠어?”

“담임 쌤이!”

요즘 애들 빠르기가 장난이 아니구나. 나는 무턱대고 조르는 한결이에게 휴대폰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PK의 본명이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내가 쟤랑 밖에서 비즈니스 파트너 하면서 계속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줬다니까?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이길래 그러냐.

한결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눌러 번호를 등록해줬다. 나는 한결이가 적어놓은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희 오빠 이름이 봄결이야?”

“응! 맞아요.”

“굉장히…… 놀라운 이름이구나.”

PK 닉네임 초성설은 그렇게 석양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성격이랑 다르게 귀엽고 예쁜 이름의 소유자였구나? 이름이 부끄러워서 말을 안 해 준 건가?

밖에 나가서 이 이름을 부르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다. 나는 PK의 이름을 잘 기억해두었다. 너무 인상 깊은 이름이라 잘 기억해줄 것도 없긴 했다.

짧은 주말이 지나가고 다시 평일이 돌아왔다. 나는 오늘도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월요일에 노는 것만큼 짜릿한 게 또 없다.

[정체 불명의 괴인, 대학 병원 10곳 습격]

[서울대 병원 등 대학 병원 10곳,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부상자 400여명, 사망자 23명]

[10여 개 병원에서 발생한 묻지마 범죄… 현재 경찰 수사 중]

2주 전만 해도 메인에 네정좋 열애 기사가 보여서 재밌었는데, 이번 메인은 제법 심각하다. 나는 헤드라인을 점령한 뉴스 기사를 쭉 읽어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이 대학 병원 여러 곳에 침입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다녔다는 이야기. CCTV에 찍히지도 않고, 지문이나 체액 등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범인이라서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고.

게다가 각 병원에 출몰한 시간마저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수준이라 조직형 범죄로 예상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한다.

잠깐만, 이거…….

“좀 이상한데.”

나는 기사를 쭉 내리며 짧게 혼잣말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수준의 범죄, CCTV에 찍히지 않는 모습, 사람을 해치고 다니는 손버릇까지.

멀리갈 것 없이 타워에서 만난 괴물이 떠오른다. 나는 기사에 적혀 있는 피해 병원 열 곳을 천천히 살폈다. 그곳에는 한결이가 장기 입원해 있는 병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이 많이 죽고 다쳤는데, 한결이는 괜찮을까? 안 그래 보여도 병원에 장기 입원할 정도로 아픈 애라서 걱정이 됐다. 그래서 PK도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꾸준히 한결이를 만나러 오지 않나. 연락도 자주 하려고 노력하고.

바깥의 쓰레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착한 오빠다. 내가 걔 연락처 싹 비어있는 거 보고 사회 생활 좀 하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했었지. 분명히 텅 빈 연락처에 내 번호를 저장했던 기억이 난다.

바깥의 PK를 생각하니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바깥의 PK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한결이가 있는데, 왜 한결이의 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바깥에는 한결이가 존재하는 걸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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