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흐린 조명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이예단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극야는 여전히 날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조금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은 상태였다.
“믿기 싫으면 말고.”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지. 이 세상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사는 하람 같은 사람이 흔하겠는가. 물론 그쪽은 인성이 정신 나갔지만.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진 걸 보니 바로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판단을 마치자마자 계단 위에 바로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특성 없어서 힘들다. 시간은 얼마 안 지났는데, 일곱 시간은 있었던 것 같네. 짧고 굵게 체력을 소모했다.
“나중에 타워 정상까지 가야 하는데, 저런 게 계속 나오는 건 아니겠죠?”
내 질문을 들은 극야가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아무래도 내 옆에 앉으려는 것 같다. 나는 난간 쪽으로 붙어 그가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극야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내 옆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굉장히 사뿐한 움직임이었다.
“이 마천루가 상징하는 바는 이 세계의 불완전함이에요. 비록 환영이라고 하나 이만한 크기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죠. 이 세계를 근간을 흔들고 세계를 어지럽히는 요소들을 모두 몰아넣은 곳이 이 장소입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나는 손에 턱을 괸 채로 물었다.
“그럼 아까 본 괴물 같은 것을 죽여 없앤다면 세계가 흔들린다는 거죠? 약간 토템 같은 건가?”
저주 인형을 없애면 저주의 효력이 상실되는 것과 비슷한 매커니즘인가? 나는 조금 전까지 혀를 낼름거리며 우리를 위협했던 괴물을 떠올려보았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죽여?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극야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소리 내 웃었다.
“아니요. 이 마천루는 일종의 감옥입니다. 아까 보셨던 것은 감옥에 갇힌 죄수라고 할 수 있죠.”
“예? 감옥이요?”
“네. 아까 보셨던 그것은 이제 감옥에서 풀려났으니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거예요.”
인간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나, 원래 인간이 아닌 것이었다. 원래 세계의 인간은 그러한 존재들을 몬스터라고 불렀다. 인간의 적이 되는, 지성을 가진 다른 종족들을.
극야의 말에 따르면 이 타워는 감옥이다. 그리고 이곳에 갇힌 그들을 죽이는 것은 그들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원래 자리? 그들에게 원래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던가? 그들은 외부 차원에서 온 침입자였다. 이 세계에 그들의 자리는 없을 터인데.
하지만 이 세계에는 변수가 있었다. 이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 가짜 세계였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래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질문해야만 했다.
“원래 자리라 함은?”
“그야 당연히…….”
극야의 시선이 문짝 없는 문을 향했다. 바깥에서는 진짜 사이비 종교 교주가 마이크를 들고 연설 중이었다. 대충 돈 많이 가져오면 다가올 종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의 헛소리가 연설의 반을 차지한다.
“이 마천루의 바깥, 인간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일이 없지. 그 혀 긴 괴물은 이 안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거로 모자라 밖에서 포식하게 생긴 것이다. 맙소사.
이거 하람이 위험해진 거 아닌가? 나는 내 정보원의 안위를 걱정했다. 잘못했다가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할 말이 없는데.
“저희 망한 거죠?”
보통 망한 게 아니라 아주 망한 것 같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전하만 망한 거죠.”
극야는 예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진짜 끝내주는 얼굴이었는데, 진짜 끝내주게 화가 났다. 아까부터 일부러 한 대씩 먹이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신다니?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마천루에는 이 세계를 뒤흔드는 모든 것이 봉인되어 있으니까요.”
“위안이 하나도 안 되는 말이네요.”
“그 말은 즉, 특성 또한 이 마천루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다는 거죠.”
특성.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극야를 바라보았다.
“특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요?”
“네.”
“그럼 이 탑의 수감자를 바깥에 풀어내어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특성을 되찾아 환영의 주인과 싸워 이기는 게 핵심인 거죠?”
극야는 입을 열어 말로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캄캄해서 앞길조차 보이지 않던 차에 등불이 생겼다. 목표가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으나, 결국 최종 목표는 저것이었다. 혼자서 아까 같은 괴물과 싸울 수는 없으니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겠지. 그것도 이 타워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계단 한 구석에 쭈그려앉은 이예단이 우리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꼭 저 애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계속 궁금했던 거였다. 더 나은 조건의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극야는 이예단을 골랐지.
이예단은 아까 몇 년 전에 극야가 꿈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게이트가 터진 시기는 내 19살의 겨울.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이다.
극야가 이예단의 소원을 들어주고 몸을 빼앗은 건 7년보다 더 전일 것이다. 이예단의 말을 토대로 추측해보자면 꿈에 나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모양인데, 이 세계는 가짜 세계라서 그의 소원을 들어줄 극야가 없었다.
이예단은 그렇게 방치. 잠잠해졌어야 할 낙원교는 그대로 몸을 불려버렸고, 미치광이들의 소굴이 되었다.
“저 애를 구하기 위해 소원을 들어준 건 아니잖아요.”
큰 맘 먹고 선심을 쓴 거라면, 저 애의 이름을 가져갔을리가 없다. 극야는 이예단의 무언가를 바랐기 때문에 저 애의 꿈에 들어간 거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했고, 아버지에게 시달리던 이예단은 극야의 손을 잡았고,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의 결말이야말로 가장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구원도 준비된 사람만이 받을 수 있죠.”
극야가 고개를 휙 돌려 이예단을 바라보았다. 극야의 시선을 받은 이예단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단지 가장 먼저 기회를 잡았을 뿐이에요. 대답이 되었을까요?”
뭘까.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이렇게 딱 선을 긋는 극야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예단이라는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 애의 소원을 들어주고 이름을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히 그 이름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수많은 사람 중에 저 애가 가장 먼저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된 걸까?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저 애가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다. 방금만 해도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졌다.
영원을 사는 그들에게 인간이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존재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았다. 짧은 삶을 사는 내게도 특별한 존재는 몇 없는데, 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지고 마는 것이다. 저쪽에서 너무 일방적으로 잘해줬기 때문일까. 나는 이 묘한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입 밖으로 나가는 목소리가 본의 아니게 딱딱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깥의 이예단…… 아니, 저 애는 어떻게 되었어요?”
이름을 비롯한 삶 전체를 빼앗긴 이예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아직까지 살아 있을까?
나는 마지막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극야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답지 않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지나간 일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 궁금하신가요?”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아는 이예단이 어깨를 더 움츠렸다. 그 모습이 참 가엾기 짝이 없었다.
“뭐,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궁금하잖아요. 그냥 그 뒤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소원을 이뤘으니까 만족하고 살았을까요?”
바깥에서는 모르는 사이지만, 여기서는 자주 얼굴 본 사이였다. 나는 악마와 거래한 그의 끝이 그닥 좋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이건 일종의 동질감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쎄요.”
늘 짓는 미소마저 지운 극야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억을 지웠으니 소원을 이룬 것에 만족감을 느끼지는 못할 거예요.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이란 언제나 변수를 창출하는 존재니까요.”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뒀다는 소리 같은데. 아니면 그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는 소리 같다.
이예단이라는 이름과 그의 삶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워야만 했겠지. 극야가 이예단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예단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
어찌 보면 아주 너그러운 처사였다. 눈만 깜빡여도 죽일 수 있는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 거니까 말이다.
극야가 거래가 끝난 후의 이예단을 신경 써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거래는 이미 끝났고, 극야는 신이 아니라 악마였으며, 이예단은 이제 쓸모없는 인간일 뿐이니까.
이게 끝이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악마와 거래한 후의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알게 된 이예단이 창백한 낯빛을 숨기기 위해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충격적일 만도 했다.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극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는 극야를 따라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웃거나 우는 모습은 많이 봤는데 짜증 내는 건 또 처음이네. 색다른 모습이었다.
“그만 돌아가 볼게요. 바깥에서도 할 일이 있으니까요.”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게 극야의 특징이었지. 나는 곧 사라질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손도 대충 흔들어줬다. 잘 가라는 뜻이었다.
“다음에는 둘이서만 봤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의 왕이 위험에 처하면 어느 때라도 개입할 거에요.”
극야가 계단 위에 선 채로 허리를 숙였다. 차가운 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그에게서 나는 싸한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극야의 보라색 눈이 보잘것없는 내 갈색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게 가장 특별한 존재거든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없이 상냥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하얀 낯에 걸렸다.
“당신의 곁에 있는 것만이 나의 안식이니까.”
뺨을 감싼 차가운 손이 순식간이 사라졌다. 나는 그의 손이 올라가 있던 뺨 위를 더듬거렸다. 여전히 싸한 향기가 남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