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과연 코리안 샤먼은 그 싹부터 다르다는 건가.
나는 바깥에서도 눈이 좋은 거로 모자라 안에서도 눈이 좋은 하람의 클라스에 감탄했다. 마왕성은 진짜 이예단도 볼 수 있었지만, 이 세계가 거짓이라는 걸 안 것은 하람이 처음이었다.
조사할 게 이렇게나 많은데 이런 귀중한 인재를 놔두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하람의 번호를 딴 그날부터 그에게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하람 씨. 저는 어제 만난 2.5D 사이의 유일한 3D입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인상깊어서 이렇게 인용해봅니다. 그날 주신 돈으로는 국밥 대신 햄버거를 사먹었고요, 오락실에 잠깐 들려서 제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을 말씀드리자면, 하람 씨가 절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안 해요]▶
◀[단호하시네요]
일단 장문으로 공격하자는 첫 번째 시도는 무산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람을 공략할 수 있을까? 나는 포털사이트 지식인의 힘을 빌려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사진)]
◀[제 성의입니다]
◀[받고 다시 생각해보세요]
[저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그만 보내세요]▶
포털사이트 지식인이 부탁할 때 성의를 표현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것도 아니었나 보다.
하긴 성의 표현 같은 거로 구슬리기엔 상대가 너무 강적이야. 저 사람은 나보다 돈이 많단 말이지.
그럼 하람을 구슬리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쓰면 좋을까?
나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네가정말좋아에게 연락했다.
◀[유주하 씨]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
▶
◀[근데 안 도와준다네요]
◀[어떡하죠?]
[들이받아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연락할 사람을 잘못 찾은 모양이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네가정말좋아한테 상담한 내가 바보지.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팩트로 하람을 들이받았다.
◀[이 세상은 가짜예요]
◀[하람 씨도 익히 아는 사실이죠]
◀[하지만 저희의 실랑이가 길어질수록 바깥의 진짜 하람 씨가 괴로워집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바깥의 제가 알아서 하겠죠]▶
◀[이 세상은 제가 떠나면 사라져요]
◀[어차피 사라질 세상인데 공부는 왜 해요?]
◀[1년도 못 버틸 텐데?]
내가 사는 세상이 가짜고 곧 사라진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하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적었다.
◀[제가 못 나가면 이 세계는 계속 남아있겠죠]
◀[하지만 그로 인해 바깥의 하람 씨가 죽으면요?]
◀[저는 하람 씨를 포함해 바깥의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절 도와주세요]
하람이 죽으면 새벽 길드에 구멍이 너무 크게 난다.
안 그래도 배후좌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인간인데, 그대로 죽어서 몸 빼앗기면 어떡해.
이곳의 하람은 그 수상한 동호회를 캐내기 딱 좋은 인물이다.
그 동호회 사람들과 꽤 보고 지낸 사이인데다가, 동호회가 수상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마왕성의 진짜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 들키지 않은 사람.
그리고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마왕성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색욕왕을 만날 때 함께 갈 수도 있을 거다. 외알 안경이 없으면 진짜 마왕성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하람만 꼬시면 동료를 두 명이나 챙길 수 있는 거라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빤히 바라보며 하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람은 다른 일을 보고 있었는지 20분 후에나 답장을 주었다.
[왜요?]
▶
[절 굳이 구할 필요가 있어요?]
▶
[바깥의 저랑 무슨 사이였는데요?]
▶
뭐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새벽 소속이 아니라서 상사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말하기도 애매한데.
◀[자주 만나고]
◀[어디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고]
◀[하람 씨 어머니를 뵌 사이?]
나는 최선을 다해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어필해봤다.
물론 하람 님 어머니는 지나가듯이 본 거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네가 날 스토킹했다고 말하면 하람이 믿을까? 안 믿겠지?
일단 보낸 메시지에 거짓말은 없었다. 스토킹 때부터 시작해서 델리키아 사건까지 계속해서 만났고, 실종 사건에 관한 비밀부터 내 정체에 대한 비밀까지 고루고루 공유했지 않나.
쟤가 오해하든 말든 난 떳떳하다니까?
[바깥의 저를 이해할 수 없어요]▶
뉘앙스가 애매해서 그런가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취향이 진짜 이상하네?]
▶
◀[댁 취향은 남의 눈 색을 RGB로 표현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 게임 하는 걸 아시는 거 보니까 거짓말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그 게임 하는 게 비밀이었냐. 하긴 어디 가서 그런 옛날 게임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것 같긴 하다.
충전기에 꽂은 휴대폰 화면 위로 100% 표시가 떴다. 나는 휴대폰에서 충전기를 뽑으며 하람의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알겠어요]▶
[도와줄게요]▶
◀[정말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나는 조건이라는 단어를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타자를 쳤다.
◀[뭔데요?]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손 뗄 거예요]▶
하람은 가장 보장하기 힘든 걸 말했다.
저번에 진짜 이예단이 마왕성을 보는 사람은 몰라도 주변인이 위험해진다고 했는데, 괜찮을까?
◀[그럼요]
하람의 가족들은 이미 저쪽에 한 발 걸쳤으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일단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의 일은 당분간 두고 봐야 할 터였다.
* * *
서울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대기업 자본의 탑은 기본적으로 연중무휴다.
하지만 연중무휴라고 해서 쉬는 날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 타워는 종종 점검이나 수리를 빌미로 휴무 공지를 때렸다. 그것도 무조건 금요일에.
금요일. 왜 하필 금요일일까?
금요일은 평일의 끝이었고, 또 동호회 비밀 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쪽이에요.”
그리고 진짜 이예단이 나를 타워로 부른 날이기도 했다. 나는 펜스가 쳐진 입구 앞에 서 있는 이예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에는 괴물이 있잖아요.”
“저도 지금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일단 와서 안을 보실래요?”
이예단이 손을 까딱거리며 날 불렀다. 나는 이예단의 곁으로 다가가 타워 안을 엿보았다. 분명히 수리 때문에 아무도 없어야 할 타워 안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귀신처럼 흰색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춘 사람들이 열을 맞추어 정렬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고 있었으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단체로 귀신에 씌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지옥 같은 정적이 타워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로 가득한 로비 중앙에는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임시로 설치한 단상과 마이크가 그것을 증명했다.
“……저게 뭐죠?”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나는 바로 앞에 펼쳐진 이상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오늘은 임시 집회 날이에요.”
“임시 집회요?”
“정기 집회는 이것보다 거창해요. 오늘은 관리가 아니라……”
드르륵.
로비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수레가 끌려 나왔다. 하얀 천을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가린 두 명이 수레를 중앙에 두고 물러났다.
그들의 위에서 입이 크고 혀가 긴 괴물이 그들이 두고 간 수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겁주기 위해 마련한 집회니까요.”
수레 위에 놓인 상자가 지속적으로 덜컹거리면서 소음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괴물이 긴 혀를 뽑아 상자를 슥 핥았다.
그 순간, 이예단이 내 손을 꽉 잡더니 타워 안으로 진입했다. 저기에 괴물 있는데? 지금 가도 괜찮은 건가?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이예단의 뒤를 따랐다.
나무 상자에 정신이 팔린 괴물은 타워 안으로 들어온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예단과 나는 로비를 가로질러 비상계단까지 왔다.
“저희는 여기서 볼 거예요.”
비상계단 문을 연 이예단이 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이예단과 함께 비상계단 문 뒤에 숨었다. 마침 로비에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참이었다.
“다들 고개를 드세요.”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등장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개 숙이고 있던 사람들이 남자의 말 한 마디에 일제히 고개를 든다. 그 모습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볼 장관이었다.
희끗희끗하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머리를 넘긴 남자.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남자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나는 내 옆에 밀착해 서 있는 이예단을 흘끔 바라봤다. 얼굴이 아직 다 낫지 않아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증오로 들끓는 이예단의 눈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를 향한다. 두 사람의 얼굴은 남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비싼 시계와 알 굵은 반지를 가득 낀 남자가 로비 중앙에 놓인 단상 위로 올라갔다. 괴물은 나무 상자를 핥느라 여념이 없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시선이 마이크를 잡은 남자에게로 향한다.
“올해의 일곱 번째 임시 집회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계신 분들이라면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절실한 믿음을 가지신 분만이 성의를 보여 이 자리에 오셨을 테니 말입니다.”
유려하게 올라가는 남자의 입꼬리가 보인다. 남자는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세상에는 저희를 음해하려는 악독한 자들이 존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 상자 안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이에도 숨어 있습니다!”
남자가 열성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흘겼다.
남자는 나무 상자로 다가가 상자 뚜껑을 확 열었다. 비싸 보이는 구두로 상자를 휙 걷어차자 상자가 넘어지며 그 안에 든 것이 옆으로 쏟아져 굴렀다.
“저건…….”
상자 안에서 굴러나온 것이 읍읍 소리를 내며 퍼덕거렸다. 테이프로 입이 막히고 손발이 꽁꽁 묶인 그것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바닥에 마구 비볐다. 핏발이 서 벌겋게 된 눈이 천장에 매달린 괴물을 보더니 경기를 일으키며 발버둥쳤다.
상자 안에서 굴러나온 건 사람이었다.
“저는 이 악독한 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고자 합니다!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릴 겁니다!”
남자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소리쳤다. 괴물이 혀를 날름거리자 묶여 있는 사람이 마구 꿈틀거렸다. 광기에 찬 사람들이 하나 되어 외친다.
“천벌! 천벌! 천벌!”
건물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고조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남자의 연설에 푹 빠져 천벌이라는 단어 하나를 연호하고 있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웃는 얼굴의 남자가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핀다. 사람들 사이에는 공포에 질려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더러 섞여 있었다. 한두 명 정도.
지옥불처럼 끓어오른 분위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천벌’이 한 단어를 끊임없이 외쳤다. 목이 닳고 쉬어 더는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까지 외쳤다. 쇳소리만 나오는 성대를 쥐어짜 망가진 목으로 외쳤다.
“자, 보십시오. 때가 되었습니다!”
웃는 얼굴의 남자가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미치광이처럼 환호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입을 닫는다. 정적이 흐르는 로비에서, 혀를 뽑은 괴물이 공포에 질려 떠는 제물의 머리를 휘감았다.
퍽.
두개골이 부서지고 그 안에 든 뇌수가 흩날린다. 목과 분리되어 부서진 머리의 조각이 단상 위에 흩뿌려진다.
괴물은 제물의 몸통 반쪽을 씹어 먹고 나서야 입을 뗐다. 머리 없이 목과 상체만 남은 시체 토막이 단상 위를 구른다.
천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