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수상한 동호회는 그 수상한 내면과 달리 겉으로는 제법 평범했다.
“아가씨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 추천받고 왔어?”
“저는 예나 선배 후배예요. 오늘 대신 참석해달라고 하셔서 왔어요.”
“그래? 예나 엄마는 좋겠네~.”
시끌벅적한 가운데 혼자 멀뚱히 걷고 있었더니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는 인상 좋은 아주머니의 질문에 대답해드린 다음 다시 침묵을 지켰다.
이 동호회는 산 타는 동호회답지 않게 젊은 사람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잘 보면 나보다 어린 사람도 있다. 다들 친한지 화목하게 대화하면서 산 타고 있지만.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레나의 본명을 대서 해결했지만, 저들 사이에 어떻게 껴야 하지?
나는 숨이 차 헉헉대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내 체력이 이렇게 쓰레기였다니. 특성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구나.
체력이 영 안 좋아서 느리게 걷다 보니 어느새 뒤처지게 되었다.
나는 나보다도 뒤에서 걷는 하람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여기 사람들과 말도 섞지 않고 계속 뒤에서 걷고 있었다.
“저기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하람이 시큰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나는 하람을 향해 물었다.
“혹시 대화 상대 필요 없으세요?”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건지고 갈 판이다. 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하람에게 말을 걸었다. 레나가 말하는 거 보면 두 사람 다 여길 좀 와본 모양인데, 하람도 뭔가 알지 않을까?
“필요 없어요.”
하람은 내 간절함도 몰라보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미지 관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원래 인성을 드러내고 사는 모양인데, 그렇게 살지 마라, 진짜.
나는 물을 벌컥 마신 후에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그러지 마시고 말씀 좀 해보세요. 저 지금 어색해 죽겠거든요?”
“목적이 있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저 사람들한테 말을 걸어야지 왜 저한테 말을 걸어요?”
“제가 수줍음이 많아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말을 못 걸어요.”
“그러는 저는 언제 보셨다고? 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하람이 돌연 감탄사를 흘렸다. 어제의 짧은 만남이 생각 난 모양이다.
“류예나가 초면에 핫도그 뺏어 먹은 사람?”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까 후배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어느 쪽이 진짜예요?”
“초면에 핫도그 뺏어 먹은 사람 쪽이요.”
그럼 설마 진짜 후배겠냐? 레나가 아무리 그래도 후배를 이런 등산 구렁텅이에 처박는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다. 하람은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정직한 대답을 들은 하람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장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래도 등산할 때까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지는 않구나.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엿 같은 뿔테 안경을 벗으니까 사람이 사람 같아 보인다.
“걔가 아무리 정신머리가 없어도 두 번 본 사람한테 여기 가 달라고 하진 않을 텐데. 그쪽이 오겠다고 한 거죠?”
“네. 제가 오겠다고 했는데요?”
“왜요? 약 하고 싶어서요?”
“예?”
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입을 쩍 벌리고 황급히 되물었다. 약? 약이라고??
“말씀하시는 약이 제가 생각하는 그 약인가요? 들키면 감방 가는 그거?”
줄곧 시큰둥했던 하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약 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런 곳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저는 안 그렇게 생겼어도 대한민국의 모범 시민이거든요.”
“그럼 여기 왜 왔는데요?”
“도장 팔아서 국밥 먹으려고요.”
만담같이 이어지는 대화에 하람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꿋꿋하게 고개를 들었다. 레나한테도 저렇게 말하고 왔으니 찔릴 건 없었다. 세상 살다 보면 국밥 먹으려고 이상한 곳에 오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제가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데, 조만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하람은 이제 날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밥 사 먹을 돈 필요하면 제가 드릴 테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말을 마친 하람이 겉옷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지갑을 꺼냈다.
하람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지갑에서 등장한 노란 지폐 다섯 장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초면인데 이런 걸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쿨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학비도 생각하셔야죠.”
“서울에 제 명의로 된 아파트 두 채 있어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나는 하람이 건넨 지폐를 넙죽 받았다.
와, 말 몇 번 섞었다고 25만 원? 저 친구가 싸가지만 늘었는 줄 알았더니, 남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도 늘었구나!
자존심 다 갖다 버리고 이걸 받는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큰 돈이었다. 바깥에서야 감히 날 이따위 돈으로 사는 거냐고 큰소리 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세계의 나는 대졸 백수인 걸 어쩌겠어.
“가는 건 가는 건데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가도 될까요?”
하람의 노란 지폐 다섯 장은 내 지갑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하람이 금수저였다는 사실은 참 놀랍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뭔데요?”
적선을 끝낸 하람이 다시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궁금했던 점을 콕 짚어 물었다.
“이 동호회의 진짜 목적이 뭘까요?”
“진짜 목적이요?”
“네. 예나 씨한테 듣기로는 도장을 모아서 비밀 모임에 가는 게 이 동호회의 목적이라던데요? 방금 말씀하신 약은 그 비밀 모임과 관련되어있는 건가요?”
이 동호회를 모르는 외부인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수상한 모임이다. 거기에 하람이 약 하러 왔냐고 물은 걸 포함해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그 모임이 약하는 모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내 추측에 따르면 이 동호회는 낙원교의 포교 루트였는데, 약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지? 설마 낙원교에서 신도들한테 약 주나?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막장이라고 해도 신도들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겠는가. 그랬다간 얼마 안 가서 죄다 죽을 텐데. 그럼 공짜 노동력을 잃는 꼴이지 않나. 게다가 마약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다.
불길한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뜯으며 하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람은 아주 쿨하게 말했다.
“저도 잘 몰라요.”
“예?”
“약은 제 추측이에요. 동호회 사람들 몇몇을 자세히 살펴보면 약을 한 티가 나거든요. 가끔 마약 추문으로 인생이 망한 연예인도 와요. 더운 여름에도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고 오죠.”
말을 마친 하람이 팔에 주사를 놓는 시늉을 했다.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고 오는 이유가 주사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란 뜻이구나. 나는 깨달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결국 그 비밀 모임은 직접 가보지 않으면 뭐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는 거네요?”
“그렇죠. 갈 생각도 없지만.”
하람이 건성건성 대답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하람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발을 빨리 놀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하람이 여기 온 건 가족 대신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예나 씨는 어머님 대신 등산 스케줄에 참석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마찬가지로 가족분 대신 여기 오신 거 아닌가요?”
산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저만치 멀어진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하람의 어머님이 도장을 팔기 위해 이 동호회에 출석했다고 치자. 그래도 이 동호회는 약쟁이들이 속한 위험한 모임이다.
그런 모임에 가족이 계속 나가는 걸 두고 보기만 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족 대신 온 거 맞아요.”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럼 위험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요?”
“예?”
이 인간 인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째 바깥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부모님도 성인이신데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하시겠죠. 제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하람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 이 정도면 진짜 이예단과는 다른 의미로 불속성 효자 아닌가?
“문제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그쪽 아닌가요?”
“자기가 벌인 일은 알아서 수습하자. 저희 집 규칙이에요.”
“가족이랑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 대화하시나요?”
“30분?”
하람은 듣기만 해도 기가 막힌 소리를 하면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일주일에 30분 대화한다면서 이런 데는 가라니까 또 가네. 그것도 저쪽 집 규칙인가.
하긴 레나가 퇴원하는 것도 가라니까 갔다. 일단 까라면 까는 게 저 집 규칙인가 보다.
하람네 집은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었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저 인간은 바깥에서도 사헌 길드 가기 싫다고 가출을 하지 않았는가. 아니지, 이건 출가라고 해야 하나.
암만 그래도 가족과 연락을 뚝 끊고 사는 게 쉽지는 않다. 저번에 어머니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던 하람을 생각해 보면 집 나가서 연락도 안 한 모양.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집안 분위기 자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소리다. 자기 혼자 큰 것처럼 말하는 걸 봐서 저 집은 완전 방치형인 모양이지. 가족이 아니라 하우스메이트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나 보다. 성격 좋은 레나가 재수없다고 까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침묵을 지키다가 곧장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참 복잡한 사정이네요. 파이팅입니다.”
“질문 다 하셨으면 이제 슬슬 가시는 게 어떠세요?”
“예, 예. 그럼요. 그냥 가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돈까지 주셨는데 가야죠.”
정보 캐려고 인왕산 왔다가 돈 벌어가네. 나는 제자리에 멈춰서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등산을 위해 가져온 물은 어느새 반만 남아있었다.
“사실 이렇게 잘 대답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가족이 위험하든 말든 상관 없으시다는 분이 초면인 사람한테 돈까지 주시고.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하람은 초면에 이렇게 큰돈을 적선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나는 생수병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두 걸음 앞에서 멈춰선 하람이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래 보여요?”
“누구나 꽁돈 주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전 이유 없이 돈을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하람은 심드렁히 내 말을 받았다. 저 시큰둥한 태도가 사람을 참 화나게 한다. 나는 하람에게 탱커 잘하겠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도발 스킬 끝내주네.
“그럼 저한테는 왜 돈을 주셨는데요?”
이거 뭐 적선에서 시작하는 그린라이트 같은 거 아니지?
나는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람은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별건 아닌데, 가끔 보이는 게 있어요. 저 사람은 오늘 죽겠다, 아니면 저 사람은 이제 팔자 폈구나, 그런 거.”
하람은 동호회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였어요. 저는 깨달았죠. 아, 이건 가짜구나. 나는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복제품이구나.”
하람의 목소리는 충격적인 내용과 달리 지나치게 담담했다. 나는 그 말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근데 세상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어도 바뀌는 건 없더라고요. 서울에는 이상한 고철 탑이 있고, 대한민국 바깥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지만, 다 이유가 있겠죠. 복제품인 제가 알 필요는 없는 거고요.”
하람은 내가 모르던 사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하람도 마왕성을 보고 있었구나. 그리고 이 나라 바깥에도 다녀왔던 거구나.
“그러다 그쪽이 나타난 거예요. 2.5D 사이에서 혼자 3D인…… 그걸 본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설명이 쓸데없이 상세하네요. 감회가 새로우셨나요?”
“아뇨? 기분 더럽던데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쪽 때문에 제가 생겨나서 안 해도 될 고생을 굳이 하고 있는 거잖아요?”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있으니 식은땀이 뻘뻘 나는 것 같았다. 이 세계의 하람은 삶을 고통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참 죄송하네요.
“사과라도 할까요?”
나는 생수병에 든 물을 바닥에 휙 뿌리며 물었다. 하람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빨리 목적 달성하시고 사라져주세요.”
“넵.”
어디서나 말문 막히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비상시 연락망을 들먹이며 하람의 번호를 땄다. 하람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번호를 줬다.
보통 미세먼지로 텁텁한 서울 하늘이 오랜만에 맑은 하늘색이다. 하람 때문에 오늘 조사는 망했으니 다음에 다시 들리는 거로 해야겠다.
나는 왔던 길을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