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27화 (127/175)

제127화

아버지를 죽이는 게 꿈이라는 불속성 효자와 수상한 종교 집단. 거짓된 세계에서 펼쳐지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색욕왕은 과연 무엇을 위해 나를 이곳에 가뒀단 말인가. 단순히 IF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무엇이 되었든 나는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뭐든 손에 잡히는 걸 파헤쳐서 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해야만 했다.

물론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알바 가기 4시간 전이었다.

‘예, 그러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싶으시다고요?’

진짜 이예단과 극야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어제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맞아요.’

진짜 이예단은 몹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큰 충격에 빠진 채로 눈을 굴렸다.

표정을 보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름 개성있다고 생각했던 철물점 패션은 온데 간데 없다. 얼굴에 상처가 생긴 후로 그렇게 되었던가? 가만 보니 그 날을 기점으로 편의점에도 조금씩 빨리 오기 시작했다.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인 정보를 취합해봤을 때, 가장 유력한 가설은.

‘가정폭력 때문인 거죠?’

가정폭력이었다. 굳이 콕 집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말한 거라면 가정폭력일 확률이 높았다.

‘…….’

진짜 이예단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만 흐르는 매장 안에서 곰곰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깥의 극야는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교주였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자리던가? 보통 그런 건 교주를 신으로 모시길 마련이다. 지금 대학생이라면 그때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학생이 가지기에는 쉽지 않은 자리다.

그렇다면 다른 특수한 요소가 작용했겠지. 타워를 볼 수 있는 건 진짜 이예단뿐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극야를 볼 수 있는 것도 저 사람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네정좋도 극야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저 애가 선택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매스컴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럼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고.

낙원교의 크기가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바깥의 극야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와 메인 기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낙원교가 그만한 영향력은 갖추고 있었다는 소리겠지.

‘이것도 낙원교와 연관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 종교에는 신처럼 모셔지는 교주가 있었을 텐데, 교주는 어디 가고 갑자기 그가 교주가 되었을까?

무표정한 얼굴의 진짜 이예단이 내 눈을 응시했다. 한순간 섬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기 없는 눈동자였다.

‘꼭 그렇게 파야겠어요? 경고했는데도?’

‘저도 나름의 목표가 있거든요.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걸 조사하는 일이고요.’

숲을 보지 못한다면 나무라도 봐야 했다. 나무라도 열심히 본다면 언젠가 지도를 완성해서 숲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정 궁금하시다면 이번 주 금요일 정오에 타워로 오세요.’

‘타워요?’

‘직접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요.’

지나치게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안에서 깊은 환멸과 약간의 두려움을 읽었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바뀌었다면, 그것은 기존의 교주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겠지.

이예단의 이름을 가지고 다음 교주가 된 극야와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소원을 빈 진짜 이예단.

그 이상한 종교의 내부인이면서 그 종교를 믿지 않는 것 같은 모습부터, 외부인인 내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명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진짜 이예단의 아버지는 아마 낙원교의 교주일 것이다.

이게 확실할 것 같긴 한데, 아니면 말고.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팔에는 슬라임을 한가득 넣은 문구점 봉투를 건 채였다.

["언니!! 슬라임 가지고 놀아요!!"]

“갑자기? 오빠한테 허락은 맡았어?”

["응! 오빠가 언니는 멀쩡한 사람 같으니까 문자만 남기고 같이 놀아도 된댔어요!"]

“너희 오빠가 날 멀쩡하다고 칭하다니. 되게 새롭다.”

["응? 왜요? 우리 오빠가 이상한 말 같은 거 했어요?"]

“그런 건 아니고…….”

바깥의 너희 오빠는 날 정상인 취급 안해줘서 그래. 물론 너희 오빠부터 정상인은 아니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오후에 가는 거라 평일 낮에는 딱히 할 게 없었다. 나는 아침에 걸려온 한결이의 호출에 기꺼이 응답해주기로 했다.

이 병원에 다시 오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두 번째로 오는 병원 로비를 휘적휘적 걷다가 익숙한 두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다.

“네가 퇴원하는 데 왜 내가 와야 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나도 고모가 널 보낼 줄은 몰랐다. 이 재수 없는 놈아.”

“불만이면 우리 엄마한테 따지든가.”

“내가 미쳤어? 그러면 고모가 김치 안 줘.”

이제 퇴원하는지 환자복이 아닌 레나와 레나 옆에서 짐가방을 들고 서 있는 남자.

하얀 머리에 노랑 보라 오드 아이가 아니지만,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저건 하람이었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꼈지만, 하람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변화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나는 너무 기막힌 나머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뭐야, 저 요란한 건.”

이쪽 세계에서도 눈치 백단인 하람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람이 이쪽을 보자 옆에 있던 레나의 시선도 같이 따라왔다.

“아! 그때 핫도그!”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핫도그를 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누구야? 아는 사람?”

“내가 초면에 핫도그 뺏어 먹었어.”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녀? 아줌마들 노는 데 끌려다니더니 아줌마들 닮아가는 거야?”

“너 말이 너무 심하다?”

“난 틀린 말은 안 해.”

두 사람이 반말로 투닥거렸다. 바깥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썼던 거로 아는데. 아닌가? 내 앞이라서 서로 존댓말을 썼던 건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얘기하다 올 거면 먼저 나가 있는다. 나 다시 들어가봐야 해.”

“네에, 네에. 로스쿨 다니는 가문의 자랑이신데 제가 배려해드려야죠.”

“빈정거리지 말고. 불만이면 너도 공부를 했어야지.”

“누군 대학 안 나온 줄 알아? 나도 대학 나왔거든? 아, 맞다. 너 내일 등산 따라가야 하는 거 알지? 나는 다쳤으니까 네가 가야 해.”

“아, 진짜 짜증 나.”

자기 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하람이 성질을 팍팍 내며 병원 로비를 떠났다. 얼핏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나는 재빨리 모른 체했다. 묘한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와, 저게 하람의 진짜 성격인가? 장난 아닌데? 나는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병문안 오신 거죠?”

“네. 오늘 퇴원하세요?”

“네! 제가 좀 튼튼해서요. 사실 전문 병원으로 옮겨 가는 거긴 한데, 퇴원이라고 할 수 있죠.”

아하. 대학 병원에서 나와 집 근처에 있는 전문 병원으로 가는 모양이다. 집이랑 멀면 그쪽이 더 좋기는 하지.

“아까 그 분은 누구예요? 엄청 싸우시는 것 같던데.”

“퇴원하는 거 도와준다고 사촌 동생이 온 건데, 쟤가 싸가지가 없어요. 그래서 좀 속 시원하네요. 전 다 나을 때까지 등산 못 가거든요.”

“등산이요?”

아까 하람이 짜증 난다고 말하고 뛰쳐나간 이유가 아니었던가. 사헌 길드일 때도 열심히 등산 가더니, 사헌 길드가 아닌 세상에서도 열심히 등산을 가는구나.

나는 조금 짠한 시선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이 얼마나 불쌍한 영혼인가. 저 정도면 운명 아닐까?

“네. 별건 아니고 동호회 활동이에요. 저기 한강 근처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엄청 소속되어 있어요. 저번에 갔을 땐 유명 연예인도 봤다니까요?”

“유명 연예인이 동호회 활동 같은 걸 해요?”

“그러던데요? 사실 이 동호회 관련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성실하게 참석하면 도장을 주고, 그 도장을 다 모을 때마다 비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레나는 그 도장을 사고 팔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 동호회의 사람들은 늘 거금을 주고 도장을 사고, 그것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부업으로 그 동호회에 든다는 거다.

덧붙여 그런 식으로 도장을 주는 동호회가 몇 개 더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모두 지인 추천제.

“그걸 파는 사람이 많아요?”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레나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대부분은 잘 모아서 비밀 모임에 가더라고요. 도장을 사서라도 그 모임에 가려는 사람이 많아요.”

“되게 수상하네요.”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제 사촌동생은 수상해하긴 하더라고요. 비밀 모임이라는 게 대체 뭘까요? VVIP들을 위한 사치와 향락의 파티? 그 사람들도 펜트하우스 같은 곳에 사는 걸까요?”

레나는 퍽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럼 굳이 동호회라는 틀을 짜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그 건물 사는 사람만 모으면 되는걸요.”

“하긴. 그건 또 그렇네요.”

레나는 빠르게 수긍했다. 나는 별 이상한 동호회가 다 있다고 생각하고 이 대화를 넘기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약간 수상한 부분이 있긴 해요. 가끔 이상한 말을 떠드는 어른이 계시거든요.”

“이상한 말을 떠드는 어른이요?”

“네. 강남에 건물 네 개를 가지고 있는 어르신인데, 종종 이상한 말을 하세요.”

강남에 건물 네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동호회에 간다고? 그런 사람이면 그냥 도장만 사면 되는 거 아닌가? 뭐하러 등산을 하는 동호회에?

레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눈을 굴렸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멸망의 때가 다가오니 반드시 그것을 대비해야만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만이 살아남아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예?”

“그 어르신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에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낙원. 누가 머리를 팍 내리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낙원교. 다른 건 몰라도 저 어르신 만큼은 낙원교와 관련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그 말에 아무 반응도 안 해요?”

“다른 사람들이요? 그냥 넘기던걸요? 다들 익숙해진 모양이겠죠. 그래서 저도 아무 말 안 했어요.”

일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레나는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누가 저기서 섣불리 사이비 종교를 떠올리겠어. 아닌가? 하람은 수상하다고 말했다고 했으니 얼추 짐작했을지도.

“그 등산 동호회, 내일 모임이 있다고 했죠?”

“네. 내일 오전에 있어요.”

“혹시 저도 가볼 수 있을까요?”

우연하게 찾아온 기회였다. 내일은 수요일이니 금요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정말 진지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아…… 왜요? 이유를 물어볼 수 있을까요?”

레나는 내 이런 태도에 살짝 놀란 듯했다. 그래.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이 지인 추천제 등산 동호회에 가고 싶다는데 누가 흔쾌히 허락해주겠어. 나는 아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백수 알바생이라서요. 도장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부업 좋아해요.”

이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고 돈 들어갈 곳은 정말 많다. 나는 아주 구구절절하게 내가 도장을 얻어서 팔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레나는 조금 질린 얼굴로 번호를 넘겼다.

그 수상한 동호회의 내일 모임 장소는 인왕산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