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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26화 (126/175)

제126화

출근하기 싫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이 생각을 품고 살지 않을까? 자매품은 학교 가기 싫다와 병원 가기 싫다 정도.

늘 생각하는 거지만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며 고민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나?

겉만 보면 그럴싸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영향력 있는 레터와 네정좋 두 사람과 접촉했고, PK와 레나를 만났다.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왕성을 보는 사람도 만났다.

아, 그래. 마왕성을 보는 사람 말이다.

켜켜이 쌓인 철골의 탑은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흉물이다. 색욕왕이 남긴 바깥 세계의 잔재는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는 악의 소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사람을 족족 잡아간다는 낙원교. 이 세계엔 악마가 없으니까 낙원교도 바깥 세계와는 다른 모습이겠지. 그런 건 보통 머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말랑거리는 슬라임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짜부라졌다. 나는 애꿎은 슬라임을 괴롭히며 한 시간 뒤에 교대하러 올 다음 타임 알바를 떠올렸다. 내 립밤 가져간 립밤 도둑.

정확히 말하면 내가 준 거니까 도둑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을 괜히 더 몰아세우곤 하지 않던가. 이것도 그런 거였다.

이 세상은 가짜지만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다. 지금도 보라. 저 흉측한 마왕성이 저렇게나 큰 존재감을 뽐내는데 다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지 않나.

바깥에서 끗발 날리는 헌터들도 여기선 일반인이다. 그러나 낙원교는 달랐다.

그 이상한 종교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마왕성을 보는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말보로 라이트 하나요.”

“4500원입니다.”

편의점 알바 생활은 이제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담배 위치라면 이제 다 외웠다.

극야가 없는 이 세상의 낙원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극야에게 물어본다면 처음의 낙원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있겠지.

그리고 내 다음 타임 알바의 이름이 그의 위장 신분과 같은 이유도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극야와 닮은 듯 안 닮은 그를 떠올렸다. 이예단이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 않은가. 낙원교에 얽힌 이예단이 두 명일 수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다.

근데 이걸 물어보려면 극야가 와야 한단 말이지. 지금은 일단 이쪽 세계의 이예단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나?

나는 가지고 놀던 슬라임을 통 안에 집어넣고 물티슈를 뽑았다. 한결이가 선물로 준 이 장난감은 생각 없이 주물럭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딸랑딸랑.

손님이 들어오며 편의점 문이 열렸다. 나는 물티슈로 손을 빡빡 닦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이 시간에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은 한정적이다. 지금 들어온 손님이 반서준이라는 데 내 슬라임을 걸겠다.

“소주 두 병.”

“예?”

“소주 두 병 가져오라고!”

매장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안타깝게도 반서준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랑 내기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한결이가 준 슬라임을 잃을 뻔했다.

“물건은 직접 가져오셔야 해요.”

“후레쉬 두 병 가져오라니까? 내 말 안 들려?!”

“물건은 직접 가져오셔야 한다니까요.”

어디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벌써 얼굴이 시뻘건 취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취객 앞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같이 죽자고 소리 질렀다가는 나만 손해다.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술에 꼴아서 혀가 다 꼬부라진 취객이 냉장고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나는 휴대폰을 쥐고 화면을 켰다. 조만간 112에 신고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냉장고 앞까지 걸어가 냉장고에 몸통 박치기를 한 취객이 멋대로 소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가져오라고 노래를 부르던 후레쉬도 아니고 빨간 뚜껑이었다.

단숨에 두 병을 따서 병 채로 입에 처박은 취객이 킬킬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건 생각할 것도 없다. 나는 바로 112로 연락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카운터에 있는 경찰 호출 버튼은 목숨이 위험할 때만 쓰라고 들었던 것 같다. 일단 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런 건 그냥 연락하는 게 맞겠지.

나는 차분하게 편의점 위치와 상황을 말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취객은 대자로 뻗어서 온몸으로 바닥 청소를 해주고 있었다. 오, 편의점 알바 편하라고 저러는 건가? 소주를 부어서 알코올 소독까지 해준다고?

두 번 다시 없을 천사표 손님이었다. 바닥에서 지랄 발광하며 난리 피우던 취객은 경찰이 도착하자마자 진짜 천사가 되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단 경찰서로 가시죠.”

“저 안 취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안 취하긴 뭘 안 취해.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분 돈 안 내셨어요.”

생각보다 멀쩡한 취객을 두고 고민하던 경찰이 망설임 없이 취객을 연행해갔다. 취객은 끌려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내가 돈 줄게. 지금은 지갑이 없으니까 나중에 주면 될 거 아니야!”

“안녕히 가세요.”

“야!! 나중에 준다니까!! 이런 싸가지 없는……!!”

“많이 취하셨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좋게좋게 갑시다. 예?”

끌려가기 싫어서 발광을 하던 취객이 경찰의 몇 마디에 얌전해졌다. 저 새끼는 왜 나한테만 이러냐. 이게 바로 공권력의 힘인가?

무전취식 취객을 태운 경찰차가 떠나자 다른 사람이 슬그머니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저 경찰과 달리 사복을 입은 반서준이었다. 생각해보니 혼자만 계속 사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취객입니까?”

“네. 오늘은 운수가 안 좋네요.”

“이 동네가 요새 문제가 많긴 해요.”

평소와 똑같이 커피 두 잔을 가져온 반서준이 카운터 앞에 섰다. 나는 바코드를 찍고 커피 두 잔을 계산했다.

“혹시라도 수상한 사람이 다녀가면 경찰에 바로 신고해주세요.”

“그럴게요.”

수상한 사람이 누굴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라니까 알겠다고 해야겠다. 사실 이 편의점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서 가장 수상한 건 내 다음 타임 알바인데 말이지.

반서준은 계산한 커피를 들고 떠났다. 이 시간대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 은근히 오늘도 오나 하고 기대하게 된다. 근처에서 뭘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모쪼록 잘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반서준을 떠나보내고 카운터를 나와 창고로 들어갔다. 취객의 흔적을 뒤 타임 알바한테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후딱 청소해야 했다.

일단 대걸레로 밀고 생각하자. 나는 대걸레를 들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딸랑딸랑 소리가 그와 동시에 울린 건 거의 신의 농간 수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젯밤 내 립밤을 가져간 립밤 도둑이 가방을 맨 채로 인사했다.

오늘도 20분이나 일찍 왔네. 편의점을 참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출근하기 싫어서 지각할 뻔했는데.

“어서 오세요. 청소 중이니까 잠시 카운터 좀 봐줄래요?”

“그럴게요.”

어제의 소동은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다.

나는 매장을 구석구석 청소하면서 꺼낼 말을 고민했다. 낙원교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 말할까? 관계자라면 아는 게 많을 것 같은데.

아니지. 이름에 얽힌 의문부터 해결하는 게 나을까? 당신이랑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

와, 그렇게 말했다가는 제대로 미친 사람 취급 받겠는데?

나는 청소하는 척하면서 괜히 야간 알바를 흘끗거렸다. 그러자 조끼를 걸치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들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네?”

“저한테 할 말 있죠?”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왔다. 나는 주어진 기회를 거리낌 없이 잡았다.

“있는 수준이 아니라 좀 많죠. 어제 거기엔 왜 서 있었어요? 그것도 비 맞으면서.”

“우산을 안 가지고 나갔는데 비가 오더라고요.”

“아하. 그래서 거기엔 왜 서 있었어요?”

은근슬쩍 중요한 것만 쏙 빼고 대답하는 것 봐. 나는 미간을 좁히고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여우같이 쏙 빠져나가려고 했던 야간 타임 알바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답했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찾는 사람이요?”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 존재를 악마라고 부르고 있거든요.”

상상 이상의 대답인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차분해 보였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신 대가를 달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바로 악마 아니겠어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편의점 안을 울렸다. 나는 대걸레 자루를 쥐고 선 채로 굳었다. 아. 저 사람이 말하는 악마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네정좋도 그 타워 앞에서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보았더랬지. 이 세상에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대가를 받아 갈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분명히 내가 아는 그 사람일 것이다.

“그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가 맞춰볼까요?”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이예단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에 보라색 눈.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요.”

우리가 악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신분 없이 살아가기 힘든 나라다.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이 철저한 나라는 별로 없을걸? 당장 미국만 봐도 주민등록제도가 없다.

제대로 된 신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활동해야 한다면, 신분을 만들면 되는 법이다. 없는 신분을 만드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 세뇌, 조작, 뒷돈 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간편한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남의 신분을 빼앗는 것이다. 이미 주민등록을 마친 사람이 되는 것. 그리하여 이 사회에 속하는 것.

극야의 이름이 이예단인 게 아니었다. 진짜 이예단은 따로 있고, 극야는 이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그 이름을 가로챈 거였다.

진짜 이예단이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저 사람의 삶을 가져간 거다. 맙소사.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애써 쥐어 짜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소원이 뭐예요?”

“네?”

“소원이 뭐냐고요. 뭘 이루기 위해서 악마를 찾은 건데요?”

진짜 이예단이 자신의 삶을 버리면서까지 이루고 싶어했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당황한 표정의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악마라고 이름 붙인 그것이 대가로 무엇을 바랄지 생각해봤어요? 그게 어떤 것일 줄 알고 악마를 찾은 거예요? 어쩌면 악마가 영혼 같은 걸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이 세상에 영혼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왜 없어요? 마왕성 같은 마천루도 있는데. 그런 게 있는데 영혼은 없을 것 같아요?”

짧은 침묵이 오갔다. 나는 질문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뤄야 할 소원이 있어요? 죽음을 각오하고 악마를 찾은 거예요? 바라는 게 대체 뭔데요?”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과거에 게이트가 터진 그때, 극야는 이미 낙원교의 교주였다.

진짜 이예단과의 거래로 이예단의 이름을 얻은 후에 교주가 되었다면, 진짜 이예단은 무슨 소원을 빌었지?

아마 바깥의 낙원교가 잠잠해진 것도 분명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두서없이 질문을 마구 늘어놓았다. 갑작스레 질문 세례를 받은 진짜 이예단은 당황한 듯이 눈을 깜빡이다가……

“제 선택이 바보 같아 보여요? 저도 알아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 그 모든 걸 각오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목숨을 내던지면서도요?”

“반응을 보니 그 존재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계신가 봐요. 네. 목숨을 내던져서라도요.”

비장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는 매장 안에 울리는 음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그게 뭔데요?”

진짜 이예단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극야에게 넘겼을까.

나는 문득 바깥의 이예단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진작에 목표를 이룬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을 이뤘으니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늘 알아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제 소원은…….”

악마가 자신의 행동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였다면, 그것은 악마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는 거예요.”

충격적인 소원이 자칭 효녀의 뒤통수를 강타한다. 이 동네 장르는 공포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갱스터 느와르였던가.

뭐가 됐든 암울하고 칙칙한 장르는 맞았다. 나는 초장부터 느껴지는 K-막장드라마의 향기에 그만 혼절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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