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우리 오빠가 그랬는데요]▶
[언니가 너무 좋아도 따라가지 말래요]▶
[어른이 치사하다! 그쵸?]
▶
◀[언니는 널 데려갈 생각 없다고 전해 줘]
[진짜요? 날 안 데려간다고?]
▶
◀[다른 사람 막 따라가면 곤란하다니까? 너 잘못 데려갔다가 너희 오빠가 복수하러 오면 어떡해]
[그건 그래요]▶
[나도 언니가 시멘트에 파묻히는 건 보고 싶지 않아여]▶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다가온 일요일이었다.
나는 한결이와 대화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한결이 병실에 꼭 들리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결이가 입원해 있다는 대학병원은 마왕성이 위치한 송파구에 자리해 있었다.
물론 바로 옆이라는 소리는 아니고, 마왕성이 있는 곳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저런 흉측한 게 병원 바로 옆에 있으면 정신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다행이다.
나는 한결이가 오빠 몰래 사다 달라고 한 슬라임을 구매하기 위해 문구점에 들렸다.
“뭘 사 오라고 했더라?”
모르겠다. 대충 예쁜 색으로 사 가자.
슬라임 두세 개를 구매하고 문구점을 나오니 오늘도 흉흉한 마왕성이 눈에 딱 들어왔다. 서울 사람 모두가 저걸 봐야 하는데. 그래야 철거할 마음이 들지.
하지만 어지간히 눈 좋은 사람이 아니면 저건 볼 수도 없을 터였다. 어쩌면 볼 수 있는 사람이 서울에 더는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리다.
나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백팩을 열었다. 마침 우산을 가져온 참이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점심을 안 먹은 터라 1층에서 먹고 올라가려고 가는 길에 핫도그를 샀다. 설탕을 잔뜩 묻히고 케첩과 치즈 소스를 한가득 뿌린 고구마 치즈 핫도그는 보기만 해도 혈관이 막힐 비주얼이었다.
조심히 발을 들인 병원 로비에는 주말임에도 사람이 많았다. 나는 적당히 로비 구석에 서서 사 온 핫도그를 꺼냈다.
“와.”
동시에 오른쪽 입구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진짜 맛있겠다.”
부러움의 시선도 쏟아져 내렸다. 대체 누가 어디서 이런 감탄사를?
나는 고개를 휙 돌려 감탄사의 진원지를 찾았다.
왼팔을 깁스한 레나가 딱 침 흘리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내 핫도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 레나가 왜 여기서 나와? 나는 얼빠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네? 그, 글쎄요. 환자라서?”
“하긴 환자복을 입고 계시긴 하네요.”
병원에서 환자복 차림에 깁스까지 한 사람보고 왜 여기 계시냐고 묻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내 핫도그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레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드실래요?”
“……제가 돈이 있긴 하거든요. 지하에 가면 식당이랑 빵집도 있어요.”
“싫어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망설이듯 우물쭈물거리던 레나가 폴더폰처럼 몸을 접었다. 태세 전환이 우디르급이다.
“진짜 눈물 나는 맛이네요. 제가 수술한다고 어제부터 굶었거든요. 이 병원은 왜 밥을 안 줄까요?”
“그건 의사나 간호사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근데 그거 드셔도 괜찮아요?”
“아니어도 어때요. 먹고 죽으려고요.”
깁스한 거 보니까 골절 환자인 것 같은데, 그럼 밥을 안 줄 리가 없는데?
나는 내 점심을 열심히 먹는 레나를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밥을 굶으면 살기 힘들긴 하지. 어쩌다가 이 사람을 병원에서 만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병문안 오신 거예요?”
핫도그를 순식간에 비운 레나가 나무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물었다.
나는 오른팔에 끼운 문구점 봉투를 왼쪽으로 옮겨 끼우며 대답했다.
“네. 점심 먹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제 점심이 사라진 관계로 바로 올라가려고요.”
“이 핫도그가 점심이셨군요.”
“그랬었죠.”
“……제가 점심을 사 드리면 어떨까요? 지하에 푸드 코트가 있거든요. 핫도그는 안 팔지만요!”
남의 점심을 홀라당 먹었다는 사실이 찔리는지 레나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사 주시면 먹을게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점심 사는 거 가지고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실 필요가 있나요?
나는 근질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세계의 레나는 산호색 눈이 아닌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기 넘치는 목소리만큼은 바깥과 똑같았다.
“듣기로는 푸드 코트 돈까스가 괜찮다던데 그건 어떠세요?”
“소화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따지면 핫도그도 소화가 안 될 것 같은데요.”
“핫도그는 핫도그잖아요.”
“……뺏어 먹어서 죄송합니다.”
시무룩한 표정의 레나가 터덜터덜 걸어 푸드 코트로 진입했다.
나는 레나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결국 주문한 메뉴는 돈까스가 아니라 불고기 덮밥이었다.
“맛있게 드시고 아까 일은 잊어 주세요.”
“그건 아무래도 평생 잊기 어려울 것 같아요. 병원 로비에서 핫도그 삥뜯기는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제가 배가 고파서 눈이 돌아간 거죠. 안 그래도 다이어트 한다고 핫도그는 몇 달 안 먹었거든요.”
“다이어트요? 왜요?”
“그건 아주 길고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분위기를 잡은 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고기 덮밥 벌써 나왔네. 나는 레나를 내버려 두고 밥을 받아 왔다. 레나는 밥을 가지고 돌아오는 나를 황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저기, 평소에 너무하시단 소리 듣지 않으세요?”
“하지만 평소에 점심으로 먹으려고 산 핫도그를 뜯기지는 않는걸요.”
“으악!! 죄송하다니까요!!”
레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푸드 코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갑자기 주목받게 된 레나가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입술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개미만 했다.
“사실 제가 직장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퇴사율이 160%인 희대의 블랙 기업이었는데, 저희 팀 부장이 진짜 끝내주는 개저씨였어요.”
“과거형이네요?”
“자꾸 살쪘다고, 예쁘지도 않은데 꾸미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시집은 가겠냐고 개소리하길래 얼굴에 서류 집어 던지고 나왔어요.”
“화끈하시네요.”
퇴사율이 160%인 회사면 대체 뭐 하는 회사지.
나는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됐든 탈주 잘한 게 맞았다. 비록 실직자가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럼 팔은 왜 다치신 거예요? 부장 얼굴에 서류 던지다가?”
“그건 아니에요. 서류가 그렇게 무거웠으면 부장은 이미 지옥 갔고 저는 감옥 갔겠죠.”
“부장을 지옥에 보내고 싶으실 것 같은데요?”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죠.”
부장의 악랄한 만행이 생각난 건지 레나가 어깨를 떨었다. 표정을 보니 부장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원래 오토바이 타는 게 취미였어요. 실업 급여 나오는 동안 부업이라도 해 보려고 라이더 일을 시작했죠.”
“멋있어요.”
“근데 밤에 족발 배달하다가 사고에 휘말려서요. 저는 속도 줄이다가 넘어진 거라 팔만 부러지고 말았는데, 크게 다친 사람도 많나 봐요. 어떤 차가 역주행해서 추돌 사고가 일어난 거라던데…… 잘은 모르겠네요. 바로 응급실로 직행했거든요.”
역주행한 차 때문에 일어난 추돌 사고. 차 일곱 대와 오토바이 운전자 하나가 휘말린 사고.
편의점에서 알바하다 접했던 사고였다. 레나가 그 사고에 포함되어 있던 오토바이 운전자였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조금 신기하네요.”
“어떤 게요?”
“제가 점심을 핫도그가 아니라 다른 걸 먹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건 잊어달라니까요!”
끝까지 놀려도 진심으로 화내지 않는 게 바깥의 레나랑 똑같아서 어쩐지 안심됐다.
나는 밥 먹는 내내 히죽거리는 얼굴로 레나를 놀리다가 헤어졌다. 자꾸 한 명씩 만나니까 왠지 도장 깨기 하는 기분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올라간 한결이의 병실은 입이 떡 벌어지는 특실이었다.
하루 종일 여기서 뭐 하냐고 물어보니까 보통 그림을 그리거나 숙제를 하면서 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구구단 표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야? 구구단은 다 외웠어?”
“응. 9x1은 9, 9x2는 18, 9x3은 27…….”
“7x9는 뭐야?”
“음, 몰라요!”
숫자 9에 눈과 코를 그리던 한결이가 재빨리 지우개를 가져와 지웠다.
이거 학교 숙제라며? 담임 선생님 고생깨나 하시겠다.
“그것보다 언니, 슬라임은 사 왔어요?”
“당연하지. 꼭 사 오라고 했잖아?”
“응! 내가 슬라임 합치는 거 보여 줄게요!”
슬라임으로 주제를 확 돌린 한결이가 구구단 표를 던지고 달려왔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구구단 표를 주워 협탁에 올려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문구점 봉지를 가져간 한결이가 슬라임을 몽땅 꺼내 놓고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한결이와의 슬라임 놀이는 PK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한결이는 한 달에 한 번 꼴랑 오는 오빠가 어쩐 일이냐면서 툴툴댔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언니를 따라갔으면 언니를 시멘트에 파묻어 버리려고 온 걸지도 몰라요.”
“근데도 날 따라오려고 했다고? 그래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내가 같이 들어가 줄게요!”
한결이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냥 너희 오빠가 날 시멘트에 담그지 않는 길은 없는 거니?
이쯤 되니까 PK의 현 직업이 굉장히 궁금해졌다. 모르는 게 내 신상에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결이를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이가 연희 씨를 많이 좋아해요.”
“제가 동생이 없다 보니까 한결이가 참 예뻐 보이더라고요. 처음 본 사람이 방문한다고 해서 걱정 많으셨을 텐데,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이가 좋아하면 저도 좋은걸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죠.”
다시 만난 PK는 이번에도 비즈니스용 미소를 보였다.
나는 저 미소를 보고 살았을 델리키아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심장 떨리네. 다음 날 시멘트에 묻혀서 바닷속에서 눈을 뜨게 될지도.
“아,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어떤 거요?”
“한결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이가 자꾸 빵이나 시멘트 같은 소리를 해서요. 저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PK는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은 채로 굳었다. 나는 돌덩이가 된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 병실 앞을 떴다. PK가 목에 두른 그 스카프 엄청 비싼 거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돈 많은 건 좀 부럽네.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것 같았지만, 그렇게 겁나진 않았다. 극야라는 최후의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네정좋의 힘을 빌려 봐도 될 것 같고. 극야를 만나기 전에 드럼통에 갇히고 시멘트에 파묻혀 바닷속을 떠돌게 생겼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도와줄 거다.
낮 내내 하늘이 흐리더니 밤에는 결국 비가 왔다. 나는 주말이 끝나기 전에 마왕성의 상황을 한 번 더 보려고 밤거리를 걸었다.
빨리 걸었다고 자부하는 데도 비가 오다 보니 도착까진 한 시간쯤 걸렸다. 나는 여전히 SF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마왕성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누군가가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사이에 서 있었다.
마왕성 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이 놀랍도록 낯익다.
나는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요.”
축축하게 젖은 까만 눈이 내 쪽을 응시했다.
남자는 뺨에 붙인 거즈와 입가에 든 피멍으로 모자랐는지 얼굴 군데군데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상태였다. 빨갛게 딱지가 앉은 귓불에 빗물이 맺혀 주르륵 흘러내린다.
“야간 타임 알바 씨.”
알바하면서 열 번은 넘게 마주쳤을 텐데 아직도 이름을 모른다.
하긴 다른 타임 알바의 이름을 알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나는 빗물에 푹 젖어 생쥐 꼴인 그를 불렀다.
“비 다 맞으면 감기 걸리거든요? 내일 알바 펑크 내시려고요?”
나는 우산을 어깨에 끼우고 백팩을 앞으로 돌려 휴지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우산은 하나밖에 없었다. 인간이 우산이 두 개나 필요할 상황이 얼마나 된다고. 머리가 두 개도 아니고.
“누나, 제 이름 아직 몰라요?”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럼 안 알려 줬는데 당연히 모르지. 내가 알겠냐?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르죠. 안 알려 줬잖아요.”
“맞아요.”
“새삼스럽게.”
빗물이 바닥에 고여서인지 걸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나는 백팩에서 휴지를 찾아 꺼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다음 타임 알바는 내가 건넨 휴지를 꽉 쥐며 말했다.
“제 이름은 예단이에요.”
“……예?”
어깨와 턱 사이에 끼워 놓은 우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예단이라고 소개한 다음 타임 알바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들었다.
“이예단. 제 이름이에요.”
우산을 쥔 그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여 줬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로 굳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