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남자를 살폈다.
하얀색이 아닌 검은 머리카락. 잘 갖춰 입은 정장과 잘 정돈해 넘긴 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가격대 있는 명품으로 도배한 남자는 분명 내가 아는 PK였다. 맨날 부스스한 머리에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다니는 인간 말종 사회악 말이다.
이거 혹시 서프라이즈인가? 누군가가 날 위해 준비한 트루먼 쇼?
“한결이 너도 감사하다고 해야지.”
“응. 감사합니다.”
작은 손을 모은 한결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했다.
“근데 오빠, 언니랑 더 놀고 가면 안 돼?”
“안 돼. 실례잖아.”
“아냐. 나 언니 번호도 땄어. 그쵸?”
고개를 번쩍 든 한결이는 PK의 옷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곤란해하는 PK와 승기를 잡아가는 한결이를 보며 픽 웃었다. 바깥 세계에서는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언니는 일 있어서 가 봐야 해. 나중에 놀아 줄게.”
“진짜요?”
“응. 평일은 안 되고 주말에.”
“약속한 거죠?”
PK의 옷을 놓고 내 앞으로 달려온 한결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몸을 낮춰 한결이와 눈을 맞춘 후 새끼손가락을 걸어 줬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칭얼거리며 달라붙는 게 자기 오빠랑 아주 똑같았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아직 어려서요.”
“괜찮아요.”
머쓱한 얼굴의 PK가 한결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결이는 안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진짜 안 갈 거야? 너 자꾸 이러면…….”
“이러면 뭐? 이러면 뭐 어쩔 건데.”
“저 언니 와도 못 만나게 한다.”
PK가 비장의 수를 뒀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간다고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 애초에 만나게 해 주는 게 이상하지 않나? 내가 유괴범이면 어쩌려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한결이가 PK와 눈싸움했다. 몇 분간 지속된 그 눈싸움의 승자는 PK로 결정된 것 같았다.
“언니, 나 이제 갈게요. 전화 꼭 받아야 해.”
“그래. 오빠 말 잘 듣고.”
“응. 오빠 말 안 듣고 전화할게요.”
한결이는 끝까지 맹랑했다. 나는 씩씩하게 주먹을 쥐는 한결이와 한숨을 푹 내쉬는 PK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줬다. 남매는 그렇게 떠났다.
그 뒤는 딱히 별일 없었다. 집에 가려고 걷는 참에 우르르 뛰어가는 경찰 한 무리를 보긴 했다.
이 동네는 틈만 나면 사건이 터지는 것 같다니까. 게이트가 있든 없든 눈 돌아가게 어지러운 동네다.
[언니 우리 사랑의 도피 해요]▶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드라마에서!]
▶
나는 가는 길에 한결이와 대화를 나누며 실실 웃었다. 아무리 봐도 정말 웃기는 애였다.
* * *
조금 특별했던 주말과 반대로 평일은 큰 문제 없이 평탄했다. 나는 월요일에 편의점에서 웹서핑하다가 지난 주말에 잠실 아쿠아리움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관한 기사를 발견했다.
[100억 원대 마약 유통책 검거… 상습 투약자 대거 구속.]
좌표를 찍어 마약을 유통 중이던 범죄 조직의 일부를 잡았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마약을 산 중독자 명단을 확보했고 대규모 수색에 들어간다는 내용.
주말에 경찰이 단체로 뛰어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세상 말세야, 말세.
근데 좀 흥미롭긴 하다. 이런 건 조금 더 은밀한 방법으로 거래하지 않나? 저건 너무 대놓고 나 잡아 주세요~ 한 거 같은데.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을 위한 눈속임일 수도 있겠다. 델리키아와 PK가 본진을 감추기 위해 크레이터를 터뜨려 댄 것처럼 말이다.
“어서오세요.”
나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이거 계산이요.”
익히 아는 얼굴이 손님으로 등장했다. 요새 자주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말없이 바코드를 찍었다.
화요일에도 사건이 터져서 인터넷이 떠들썩했다. 이번에는 유명 여자 아이돌과 네가정말좋아의 열애 기사였다.
평소 같았으면 흥미롭게 봤겠는데, 네가정말좋아가 주인공이라 흥미가 사라졌다. 오보겠지. 쟨 지금 유리 구두조차 가져간 신데렐라를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기사 진짜예요?]
[전 못생긴 사람이랑 일할 때 말고 대화 안 해요.]
▶그렇다고 한다. 오보가 확실했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네. 4200원입니다.”
나는 오늘도 방문한 반서준의 커피를 계산해 줬다. 항상 두 잔을 사 가는 것 보니까 같이 온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정말좋아의 열애 기사는 수요일에 정정 기사가 나왔다.
첫 기사에서 여자 아이돌의 얼굴은 제대로 나왔지만, 남자는 뒷모습만 찍혔던 게 함정이었다.
그 뒷모습의 주인공은 알고 보니 신인 아이돌 그룹의 메인 보컬이었다더라.
신인인데 불쌍해라. 네가정말좋아는 그렇게 혐의를 벗었다.
◀[축하드립니다.]
[이런 거 보낼 시간에 그 사람이나 찾아 주세요.]
▶이 자식 말하는 거 보소.
권력 앞에서 설설 길 때랑 완전 다르네. 하긴 지금의 나는 권력이 없으니까 그럴 만하지. 극야처럼 차원이 다르게 예쁜 것도 아니고.
◀[님 말투 재수 없어요.]
나는 네정좋에게 욕을 보내 놓고 정정 기사 밑의 댓글을 살폈다.
‘뭔가 이상했어. 우리 애가 인간을 좋아할 리가 없지!’ 같은 댓글에 좋아요가 500개나 박혀 있는 걸 보니 측은함이 올라왔다.
역시 허우대만 멀쩡한 인간이랑 상종하는 거 아니다. 인간은 무릇 성격이 멀쩡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다 꽝이다. 오늘 아침, 엄마가 사라진 극야의 코트를 눈치채고 물었다.
‘코트 어디 갔어? 혹시 그 사람 또 만났니?’
‘어…….’
‘번호는 땄어?’
‘중고로 팔았어.’
그 대화 이후로 우리 엄마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데 그건 외계인이야. 걔랑 연애하는 건 종족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나는 심각한 종족 차별주의자였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 문이 열렸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이번 손님이 누굴지 추측했다. 사람이 잘 없는 퇴근 직전에만 찾아오는 고정 손님.
“이거 두 개요.”
아마 반서준이겠지.
그리고 역시나 반서준이었다. 바깥이 추운가? 맨날 차가운 커피를 사 가더니 오늘은 따듯한 커피를 가져왔다.
“밖이 많이 춥나요?”
나는 바코드를 찍으며 물었다.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반서준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네. 저번 주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간 것 같아요.”
“그렇군요.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밖이 그렇게 추운가. 오늘 집에 가서 엄마한테 목도리 찾아 달라고 할까?
나는 편의점을 나서는 반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밖이 춥냐고 물어볼 게 아니라 몇 도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대면은 짧고 후회는 길었다.
목요일에는 반서준과 조금 더 긴 대화를 나눴다.
“이 근처에 사고가 그렇게 많이 나요?”
“네?”
“어쩐지 계속 뵙는 것 같아서요.”
형사가 아니라 단순한 경찰 아니었나? 탐문 수사 같은 걸 하는 것도 아닌데 이 근처에 너무 자주 나타난다. 경찰서 앞에도 편의점은 있잖아.
“주정뱅이들이 그렇게 많나요? 이번 주에는 한 번도 못 봐서 잘 모르겠네요.”
“음…….”
반서준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나는 진지하게 캐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저 지금 알바 튈지 고민 중이거든요.”
“알바를요? 어째서요?”
“경찰서가 코앞인데 치안도 안 좋고, 사고도 많이 나고, 일은 더럽게 힘든데 시급은 짜고, 진상들 상대하기도 힘들고. 복합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죠.”
살기 팍팍하다. 나는 영수증을 버리고 카드를 건넸다.
커피 두 잔을 챙겨 든 반서준이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괜찮아질 거예요.”
“아마?”
“곧이요.”
그걸 댁이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요.
나는 멀어지는 반서준의 뒤통수를 보며 근질근질한 입을 닫았다. 그래. 어차피 평생 편의점 알바 할 것도 아닌데 상관없겠지. 나는 청소를 시작하기 위해 카운터를 나왔다.
금요일에는 온 동네가 사이렌 소리로 가득했다. 듣기로는 미친 인간 하나가 역주행을 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연쇄 추돌 사고가 벌어졌다. 피해 차량이 무려 일곱 대에 오토바이 한 대도 휘말렸다고 한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자동차 운전자 중에서는 사망한 사람도 있다고 하고.
세상이 참 험악하다. 아직도 사이렌 소리가 생생해서 미칠 것 같다. 나는 고막을 때리는 환청을 지우기 위해 매장 내 음악을 더 크게 틀었다.
오늘은 반서준이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 주변에 그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 한가하게 편의점에 올 시간이 있겠는가. 경찰 공무원은 참 힘든 직업이다.
나중에 오면 잘해 줘야지. 나는 징징대는 네정좋을 향해 메시지를 날렸다.
[그 사람은 언제 볼 수 있어요?]
▶
◀[그 사람 바빠서 저도 자주 못 보거든요?]
[약속이랑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신고할래요.]
▶
◀[해 보시던가요. 그럼 평생 못 보게 될 테니까.]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신고를 하냐? 내가 뭘 받아먹은 것도 아닌데 신고당할 일이 뭐가 있어.
나는 손님 없는 틈을 타 시재 점검을 마치고 매장 청소까지 싹 했다. 퇴근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안녕하세요.”
다음 타임 알바 목소리다. 오늘은 일찍 왔네.
나는 창고에서 나와 편의점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 타임 알바는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입술 끝에 든 피멍을 보니 어디서 맞고 온 것 같았다.
“……어,”
말을 붙이긴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싸우고 온 건가? 싸웠다기보단 일방적으로 맞고 온 것 같은데.
남의 사정도 모르는데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다. 그냥 무시하자. 정말로 일방적으로 맞고 온 거라면 그게 더 나을 거다.
“점장님이 요새 강도가 성행한다고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강도요?”
“예. 2인조라던데요?”
이 동네에는 마가 낀 게 분명하다. 일 하나 없이 평범한 날이 별로 없다니까.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준비하는 다음 타임 알바의 귀를 응시했다. 그 독특한 철물점 패션을 때려치우기로 한 건지 귀가 싹 비어 있었다.
진짜로 무슨 일 있나. 궁금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괜히 참견했다가 지뢰를 밟으면 문제가 될 텐데.
“점장님이 카운터 밑에 야구 배트를 숨겨 뒀다고 말하긴 했는데요.”
“네.”
“그래도 강도가 들면 그냥 돈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괜히 반항했다가 죽으면 저희만 손해잖아요.”
저 돈은 다 점장님 거지 우리 건 아니다. 남의 돈 지키겠다고 목숨을 잃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목숨 건지려고 내 돈도 바치는 판에 말이다.
내 말을 들은 다음 타임 알바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어서 카운터 밑에 숨긴 야구 배트를 보더니 숨죽여 킥킥댄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자기 목숨 잘 챙기라고 말해 준 건데 뭐가 고마운 건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감사를 받아들였다.
별거 없는 평일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