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세상이 진짜든 가짜든 해는 뜨고 사람들은 움직인다. 나는 거리를 설렁설렁 걸어 다니다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잠실역에는 놀이공원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마왕성으로 변모한 타워를 세운 기업에서 만든 놀이공원인데, 서울에 사는 사람이면 수 번은 가 봤을 장소다.
여기서 학교 다니다 보면 소풍날에 무조건 저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멋모르던 유치원 시절부터 머리 큰 고등학생 시절까지 빠짐없이 갔던 것 같다. 이제 눈 감고 길도 찾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게이트가 터진 이후로는 가 본 적 없는 곳이다.
게이트 터지면서 부서졌다는 말 들었는데, 진작 고쳤겠지. 수익이 엄청날 텐데 아무렴.
나는 지하에 자리 잡은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
데이트하러 온 커플부터 애들 손 잡고 온 가족까지. 환영은커녕 진짜 같기만 하다. 하긴 진짜 같지 않으면 진작에 탈출했을 거다.
패스트푸드점 진동벨은 금세 울렸다. 나는 음식을 받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밥 먹을 돈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이쪽이 더 편했다. 괜히 혼자 거창하게 먹을 생각도 없고.
다 식어 말라비틀어진 감자튀김을 하나씩 집어 먹고 있자니 입 안이 텁텁했다. 사실 여기는 치즈스틱 먹으러 오는 곳인데, 그걸 간과했네.
나는 감자튀김을 포기하고 미리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가격에 비해 부실한 게 딱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예솔이랑 여기 왔을 때, 예솔이가 햄버거를 세 개나 시켰던 게 생각난다. 빵 세 장 빼고 햄버거를 합치는 기술은 그때 배웠다.
사람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빠졌다. 나는 햄버거를 비우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니.”
자그마한 손이 테이블 위를 꼬물꼬물 움직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어린이가 내 팔을 잡고 날 올려다봤다. 키를 보니 초등학생쯤 되는 것 같았다.
“감자튀김 먹고 싶어요.”
“……응?”
“감자튀김 먹고 싶어요.”
아이가 검은 눈을 애교 있게 깜빡였다. 귀 아래로 묶은 양 갈래 머리가 삐져나온 곳 하나 없이 꼼꼼한 걸 보니 보호자가 있는 아이 같았다.
“어…… 먹고 싶으면 먹어.”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그란 머리 방울이 같이 흔들렸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 애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다 식어서 맛도 없을 텐데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맛있어?”
“응. 근데 다 식었어요.”
“그건 알바가 바빠서 그래. 처음에 받았을 때도 식어 있었어.”
사람이 많아서인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알바들이 보인다.
내가 알바 안 할 때는 몰랐는데, 하게 되니까 또 다르게 보이더라고?
사장님이면 몰라도 알바는 죄가 없다. 나는 측은한 시선으로 바삐 일하는 그들을 바라봤다.
“식어도 좋아요. 우리 오빠는 이런 거 못 먹게 해.”
“오빠가? 그럴 수 있지. 튀긴 건 건강에 나빠.”
“언니는 그런 거 돈 내고 사 먹잖아요.”
“나는 맛없는 거 먹고 오래 살 바에야 맛있는 것만 먹고 일찍 죽을 거야.”
사실 바깥에서는 뭘 먹든 상관없긴 해.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살아도 남들보다 건강할걸.
“선생님이 그렇게 살면 안 된댔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손가락에 묻은 소금을 쪽쪽 빨아먹으며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장래가 유망하겠구나? 나는 냅킨을 들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언니 인생은 이미 망해서 그래도 괜찮아.”
“벌써 포기하는 거야? 희망을 가져요, 언니.”
“응원 고마워. 노력해 볼게.”
살면서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만난 아이한테 이런 응원을 들어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아마 평생 동안 한 번일지도 모른다.
“응. 희망을 가지는 건 좋은 거랬어요. 우리 오빠가 그랬어.”
냅킨 위에 손을 박박 문질러 닦은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묶은 머리 방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그런 거 알려 주면 큰일 난댔는데.”
“다른 사람한테 말 걸면 큰일 난다가 먼저 아니야?”
“응. 그치만 오빠를 혼자 찾기는 어려우니까 만만하게 생긴 사람한테 말 걸라고 했어요.”
그럼 네 말은 내가 만만하게 생겼다는 소리니? 나는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만만하다는 소리는 칭찬이 아닌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 하면 화낼 수도 있어.”
“알아요.”
“그럼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언니는 감자튀김을 줬으니까, 그래도 될 것 같아서요.”
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교 있게 웃는 얼굴을 보니 선수였다.
“한결이에요, 내 이름.”
“음, 그래. 한결아.”
“응.”
“부모님은 어디 계셔?”
말하는 거나 차림새를 보니 보호자는 있는 것 같은데, 혼자 돌아 다닌다? 이거 완전 미아였다.
모르는 사람한테 대뜸 말을 거는 걸 보니까 부모님이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미아를 발견한 이상 보호자를 안 찾아 줄 수는 없지.
나는 아이를 빨리 보호자의 품에 돌려보내기 위해 말을 꺼냈다.
“부모님 없어요.”
돌아온 말에 말문이 좀 막히긴 했지만.
“……그럼 여기는 누구랑 왔어?”
“응. 오빠랑요.”
한결이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누구랑 같이 오긴 했구나. 다행이다. 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그럼 오빠는 어디 가셨어?”
“으응, 오늘은 나랑 놀아 주기로 했는데 또 일 때문에 전화 받는 거 있죠.”
“응.”
“그래서 버렸어요.”
그런 걸 보통 버렸다고 표현하던가? 범상치 않은 말솜씨를 가진 친구였다.
“그래도 오빠를 버리면 돌아갈 수 없잖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돌아가기 싫어요.”
눈을 살짝 내리깐 한결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모님은 없고 오빠랑 둘이서 사는 어린아이. 가정 환경이 안 좋은가? 나는 덩달아 심각해져서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한동안 안 만졌더니 화면이 꺼져 있었다.
“왜? 평생 밖에 있을 수는 없잖아. 집에 돌아가야지.”
“집에 안 가요.”
“그, 그래도 집에 가야지. 오빠가 기다리잖아.”
계속 오빠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오빠랑 같이 사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저 집에 무슨 일 있나? 혹시라도 가정 폭력 같은 거면 경찰서에 찔러야 했다.
나는 한결이의 차림새를 구석구석 살폈다.
단정하게 양 갈래로 묶은 머리, 도톰한 코트와 원피스, 갖춰 신은 스타킹과 운동화까지. 한결이는 어딜 봐도 있어 보이는 집 아이였다. 빈곤이나 가정 폭력의 그림자 같은 건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오빠는 바보야.”
“응?”
“오빠랑 같이 안 살아요. 돌아가면 집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니까.”
한결이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가정 폭력 같은 생각을 싹 지워 버렸다. 병원에 가야 해서 돌아가기 싫은 거였어?
“그럼 못 써. 병원에 가야 아픈 게 낫지.”
“안 나아요. 선생님이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했어. 그리고 그마저도 엄청 큰돈이 든다고 했어.”
“…….”
“그래서 오빠는 바빠요. 한 달에 한 번씩 시간 내면서 그마저도 제대로 안 놀아 줘.”
한결이는 사람 말문을 막는 데 정말로 재능 있는 친구였다. 이렇게 날 당황시킨 건 극야와 네정좋 정도였는데.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시선만 굴렸다.
“언니가 나 주워 갈래요?”
“응? 언니는 가난해서 안 되는데.”
“나는 밥 많이 안 먹어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냥…….”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묻은 한결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랑 맨날 놀아 주라…….”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의지할 곳은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구나.
나는 예쁘게 세팅된 한결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아직 어린 애였다. 고치지 못하는 병이나 돈에 관한 문제를 알 나이가 아니었다.
“돈 같은 건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어? 아니면 오빠?”
“아니. 내가 몰래 들었어요.”
“왜? 몰래 듣는 건 나쁜 일이잖아.”
팔에 고개를 묻고 엎드려 있던 한결이가 돌연 고개를 쑥 들었다. 나는 손을 뒤로 물렸다.
“내 문제니까 나도 알아야 해요. 계속 모르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오빠는 하나도 안 알려줘.”
“오빠에 대한 신뢰도가 제로구나.”
“응. 오빠는 맨날 거짓말만 해.”
오빠도 거짓말만 할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닐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쪽 심정도 이해가 갔다. 소중한 사람이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누구나 있는 법이지. 나도 그랬다.
“언니랑 가고 싶어?”
“응.”
“그럼 언니 유괴범으로 감옥 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난 이제 건물주도 아니라서 보석금 낼 돈도 없단다.
“그리고 오빠를 평생 못 보게 될 텐데, 그래도 좋아?”
“…….”
“아니지? 오빠 찾으러 갈까?”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한결이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빠가 정말 싫은 건 아닌 모양이네. 다행이다.
“혹시 오빠 전화번호 같은 건 없어?”
“휴대폰 있어요.”
“그럼 그거 언니 줄래? 연락해 줄게.”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쑥 넣은 한결이가 휴대폰을 꺼냈다. 저번 달에 나온 최신형이었다.
[부재중 전화 34건]
잠금이 따로 걸려 있는 건 아닌지 휴대폰 화면을 쓱 밀자마자 부재중 전화 숫자가 떴다.
전화벨이 안 울린 이유는 무음 설정이 되어 있어서인 모양이다.
오빠라는 사람은 계속 한결이를 찾고 있었는지 금세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한결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이랑 함께 있는데 아무래도 보호자랑 떨어진 것 같아서요. 여기가 잠실역 놀이공원 가는 길 구석에 있는 햄버거 가게인데, 이쪽으로 오실래요?”
[“아…… 금방 가겠습니다.”]
전화는 금방 끊겼다. 한결이는 휴대폰을 돌려주려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번호도 저장해 주면 안 돼요?”
“내 번호? 왜?”
“언니랑 연락하고 싶어요.”
계속 느낀 건데, 얘 진짜 선수구나. 나는 히죽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언니 완전 나쁜 사람이라 잘못하면 납치당하는데?”
“언니는 모르는구나? 나쁜 사람은 감옥 안 가요.”
“이야, 그런 것도 알아?”
“응. 오빠가 빵에 가면 돈 주고 나오면 된댔어요.”
한결이는 무서운 소리를 하면서도 해맑았다.
그…… 너희 오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시니?
나는 침묵했다.
어차피 할 거라고 해 봤자 편의점 알바랑 웹서핑밖에 없으니 연락해도 괜찮겠지. 이 세계의 나는 손가락테크닉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한결이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한결이는 주소록에 저장된 ‘연희 언니’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언니 이름 예쁘다.”
“이름만 예뻐?”
“응!”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될 친구였다. 나는 한결이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아이의 오빠를 기다렸다.
“언니, 우리 오빠랑 만나면 안 돼요? 우리 오빠 잘생겼어요.”
“언니는 눈이 높아서 어지간하게 잘생긴 게 아니면 혹하지도 않아요.”
“진짜? 오빠한테 피부 관리 좀 하라고 할까요?”
“진심이었어?”
어린이 주제에 보통 맹랑한 게 아니다. 나는 싱글벙글 웃는 한결이를 보며 픽 웃었다. 그렇게 얼마쯤 보냈을까.
“한결아!”
가게 문이 열리며 한결이를 부르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결이가 총총 뛰어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녕하세요. 전화 받으셨던 분이죠?”
한결이의 오빠는,
“제가 전화 받느라 동생을 깜빡 놓쳐서…… 정말 감사합니다.”
PK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