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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20화 (120/175)

120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11시 30분쯤 된다. 지하철을 타야 하기는 한데,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보통 자고 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켜고 문을 닫으니 숨통이 조금 트였다.

밋밋한 벽지와 천장에 덕지덕지 붙은 야광별 스티커, 먼지가 쌓인 책장과 어지러운 책상. 서랍이 달린 원목 침대 옆에는 그래픽 카드를 잃은 컴퓨터 본체가 놓여 있고, 방 끝에는 늘 공기 청정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다.

진정한 휴식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취할 수 있다던데,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가 침대 위에 가로로 엎어졌다.

“열심히 살기 힘드네…….”

내일도 나가 봐야 하는데, 벌써부터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

저 마왕성 같은 마천루를 조사하겠다고 마음먹기는 했으나, 무턱대고 돌진할 용기는 없었다. 특성이 있던 때라면 모를까, 특성도 없는 지금은 적당히 몸을 사려야 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대다가 다치면 모두 다 내 책임 아닌가. 환영 안에서 죽으면 바깥의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대로 죽게 되겠지. 그러면 이제 내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게 될 테고.

편애가 말하기를, 죽으면 극야의 손에 떨어진다던데 그게 어떤 구조로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외부 차원의 죽음은 오로지 그의 영역이라지만, 내부 차원의 죽음 또한 그의 것인가?

직접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몸을 돌려 방문 뒤에 걸어 둔 극야의 코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정체가 뭐지.”

악마나 회귀자 같은 거 말고, 조금 더 깊고 자세한 것. 낙원 길드의 길드장이나 사이비 종교 교주 같은 거 말고, 그의 본질을 지칭할 수 있는 것.

나는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벽에 기댔다. 어딘가에서 싸한 향기가 났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싸한 향기만큼이나 차분했다.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아무도 없던 장소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지. 사람이 아니라 악마가 나타났다.

코트 없는 차림으로 나타난 극야가 문 뒤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나는 잠시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주거 침입죄로 신고해도 될까요?”

이 세계에는 특성이 없는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나타난 건지.

하긴 저번에도 갑자기 나타나긴 했다. 그래도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 줄은 몰랐지.

“당신을 위해서 무리해 이곳까지 왔으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사뿐하게 웃은 극야가 침대로 다가와 앉았다. 그의 손에는 낯익은 외알 안경이 들려 있었다.

“그건?”

“노란 눈의 특급 아이템, ‘본질을 보는 눈’ 입니다. 이 거짓된 세계에 가장 걸맞은 아이템이죠.”

본질을 보는 눈이라. 이거 내 아공간에 들어 있던 아이템 아닌가.

저번에 인천 게이트에서 엘프 로에닌을 잡고 얻었던 물건이다.

노란 눈의 특급 아이템 다섯 개 중 하나. PK의 소유인 본질을 바꾸는 반지와 같은 등급의 아티팩트.

그냥 얻은 거니까 대충 챙겼지, 이게 필요한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안경을 눈가에 가져다 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뀌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 물건으로 진실을 보려면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사용했을 때 진가를 발휘할 거예요.”

극야의 말은 그랬다.

나는 이 세계가 거짓된 세계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잠실에 우뚝 솟은 대기업 자본의 탑이 마왕성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환영 세계의 사람들은 저 마천루가 현실의 모습처럼 반듯하게 보이겠지.

그 사람 중 하나한테 이 아이템을 쓰게 한다면 그 사람도 마왕성이 보일 거란 이야기다.

“동료 만들기용 아이템이네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이제 중요한 건 누굴 동료로 만드느냐인가. 이곳은 특성이 없는 세계인 만큼 바깥의 특성을 생각하고 동료를 만드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나가면 세계 자체가 사라진다.

결국 그들이 나를 돕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없애는 행위와 같았다. 진짜 그들은 바깥에 있을 테니까.

“이 세계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일까요?”

단순히 날 백수로 만들기 위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이렇게 정교하고 치밀한 환영은 오랜 공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게이트 안의 몽마들이 급조한 환상은 범위가 좁고 두루뭉술하다. 그들은 보통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환영을 만들지 않는다.

보통 그들이 직접 그 환영 속에 들어가서 상대를 농락하니까 말이다. 그러면 사람을 많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거지. 애초에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도 힘들고.

그런 환영은 그저 환영일 뿐이지, 세계라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세계였다. 독립된 개체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세계.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환영이 수십억 인구만큼 존재하는 세계.

“이 세계 밖으로 나가려면 뭘 해야 하죠?”

구현된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 이 세계의 끝이 어딘지 모르니까. 우주 정거장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세계의 주인을 죽이는 것도 어렵다. 특성이 없는 나는 색욕왕을 죽일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아마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바깥에서는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바라는 게 뭐야?”

극야가 정말 회귀자라면 이 또한 의도한 상황이겠지. 내가 이 세계에 갇히는 것을 그가 원치 않았더라면. 이 환영이 구현되기 전에 색욕왕이 무너졌을 테니까.

나는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이어지는 내 질문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다.

“바깥에는 다시 침략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왕의 군단?”

“아니요. 하늘 높게 탑을 쌓은 학자들이 교류의 명목으로 깃발을 꽂으려고 하고 있죠. 일곱 개의 탑이 내우주에 발을 들여 대치하는 중입니다.”

일곱 개의 탑.

저번에 마법서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마법의 계열마다 탑이 있었다. 이번에 지구를 침공한 것은 왕이 아니라 마법사들이라는 소리였다.

“환영 탑을 주축으로 시작된 이번 침공은 색욕왕의 노림수입니다. 나의 왕을 이곳에 가두면 계획한 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글쎄요.”

극야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짧은 조소가 떠올랐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비웃음이었다.

“이 세계는 진짜처럼 정교하지만, 진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색욕왕은 강대한 마법사일 뿐이지, 신이 아니니까요. 분명히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아, 대기업 자본의 탑이요? 그 흉측한 철골 장식 마왕성?”

저걸 지은 대기업 제정신이냐고 물을 뻔했던 그 자본 떡칠 마천루?

“그 건물 안에 환영의 중심이 된 물건이 있을 거예요. 이곳에서 나가려면 그것을 파괴해야 합니다. 아마도 나의 왕과 관련된 물건이겠죠.”

그래. 이 환영은 나를 중심으로 구축된 환영이니 나와 관련이 있겠지. 나는 외알 안경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깥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못할 테니까.”

입가에 걸린 미소가 흐릿했다. 극야는 살짝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면 말씀해 주세요. 그때가 오면…….”

극야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점차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함께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가요.”

점점 흐릿해지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몇십 초가 걸렸다.

나는 손을 뻗어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쓸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싸한 향기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색욕왕이 사용하는 마법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편애도 간섭하지 못하는 세계였다. 극야가 무슨 방법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장시간 머무르는 건 어려운 모양이다.

바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나 대신 다른 헌터들이 침공을 막고 있어서겠지. 러브리스와의 통화에서 폭음이 들렸던 것은 그런 까닭 때문이었나.

마음의 준비라면 이미 됐는데 무슨 준비를 마치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극야가 이 아이템을 넘기고 간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나는 외알 안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다가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솔솔 왔다.

* * *

누가 어딜 가야 하니 준비하라는 말을 한다면, 보통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산에 가야 한다면 장비를 챙겨야 하고, 바다에 가야 한다면 낚싯대를 챙겨야 하지.

대기업 자본의 탑. 그러나 이제 마왕성이 되어 버린 마천루도 그랬다.

나는 큰맘 먹고 마천루 근처에서 기웃거리다가 혼자 미션 임파서블을 찍고 왔다.

마천루는 겉만 마왕성인 게 아니라 안도 마왕성이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몬스터가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홀로 혀를 길게 빼고 날름거렸다.

나처럼 그것을 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서.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심령 스팟이란 말인가.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저런 게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돼?

나는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와 그 입을 피해 황급히 도주했다.

세상에 귀신 같은 건 없다고 비웃던 나날들 안녕. 하마터면 심장 떨어질 뻔했다. 솔직히 저 정도면 퇴마사를 불러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잠실 타워 괴담]

[잠실 타워가 이상해요ㅠㅠ]

[잠실 타워 귀신 실화?]

그리고 이런 걸 나만 보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저 타워에서 무언가를 봤다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문제는 목격담보다 실종이나 사건, 사고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우발적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는데, 과연 그럴까?

건물 틈에 끼여서 반토막 난 시체 단면이 짐승이 뜯은 것처럼 우둘투둘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시체가 아예 발견되지 않은 실종 사건도 조금 있고.

깨끗하고 멀쩡한 저 마천루는 서울의 랜드마크였지만, 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온 첫날, 인터넷에 글 하나를 작성했다.

대충 잠실 타워가 다르게 보인다는 글이었는데, 그 글에 낚인 사람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으니 만나자고 하길래 알겠다고 했었지. 닉네임이 분명…….

‘LETTER’였다. 동일한 닉네임의 누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여보세요?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인데요.”

[“아, 찍어드린 건물 2층에서 레터라는 닉네임을 대시면 될 거예요.”]

실제로 그 사람이 맞는 것 같고. 나는 주머니에 챙긴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잠실의 한 카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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