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편의점 알바 생활은 그야말로 용사 일대기였다. 나는 손님이 없는 사이 진열대에 물건을 채워 넣으며 생각했다.
편의점에 나온 지 벌써 일주일.
이 소식을 엄마한테 알리니 할 거면 엄마네 카페 알바나 하지 뭐하러 편의점 알바를 하냐고 잔소리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 고시생이었지?
엄마가 보기에는 시험을 내팽개치고 먹고 살길을 찾는 거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비슷하기도 하고.
스펙 쌓은 것도 없어서 취직은 힘들 테니까 이대로 간다면 엄마 카페를 물려받게 되겠지. 차라리 엄마 카페에서 일이나 배울 걸 그랬나.
반듯반듯하게 각을 맞춘 진열대를 보니 뿌듯하다.
나는 매끈한 매장 바닥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한 시간 뒤에 청소하고 퇴근하면 되는데, 그 전에 분명히 일이 생기겠지. 이 편의점의 불문율이었다.
첫째 날엔 취객이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잡혀가는 꼴을 봤고, 둘째 날엔 근처 가게에 강도가 드는 사건을 목격했다.
셋째 날에는 미친 운전자가 전봇대에 차를 들이받아서 경찰이 왔다. 그리고 거기서…….
반서준을 봤지. 차림새는 달랐지만, 분명히 반서준이었다.
“여기 쓰레기봉투 팔아요?”
“예. 몇 리터요?”
“10리터짜리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 쓰레기봉투를 사 갔다.
나는 카운터 안쪽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편의점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지, 분명히.
레터나 네정좋처럼 휴대폰 너머로 본 게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모른다는 게.
바깥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겐 특성이 있었고, 그 세계는 특성이 있는 자들을 대우해 주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의 나는 가지고 있는 게 별로 없다. 지금도 봐라. 고시 준비를 하다가 포기하고 편의점 알바나 하는 모양새지 않나.
이래서야 환영을 파훼하고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을까? 거대하고 기괴한 철조물 장식의 마천루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편의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단정하게 내린 머리에 반듯하게 각을 맞춘 옷차림, 짙은 고동색 눈과 살짝 올라간 입매.
“어제 도로 앞에서 난 사고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꿈인가.
“조사에 협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반서준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진짜 반서준이 찾아왔다.
“어어, 예. 뭐가 궁금하신가요.”
겉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그가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확실한 경찰 신분증이었다.
“어제 사고가 일어날 당시에 뭘 하고 계셨습니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막 떠난 참이어서 테이블을 닦고 있었는데요.”
“테이블이요?”
고개를 휙 돌려 야외 테이블을 확인한 반서준이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편의점 내부 CCTV를 잠깐 확인할 수 있을까요?”
지금 알바 시작한 지 고작 넷째 날인데, 경찰이 와서 CCTV를 볼 수 있겠냐고 묻는다. 이 정도면 빨간불 아닌가?
낮에는 점장님이 근무한다 치더라도, 야간 알바는 왜 진작 도망가지 않은 거지? 요새 알바 자리 구하기 힘드나?
나는 이 편의점에서 제법 오래 근무한 것 같던 내 다음 타임 알바를 떠올렸다.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갭이 몹시 큰 사람이었다.
‘저번 저녁 타임 알바는 이 주 만에 도망갔어요.’
‘예? 그걸 왜 말씀해 주세요?’
‘그냥 언제까지 일하실지 궁금해서요. 그런 거 맞추는 게 제 취미거든요.’
첫째 날, 교대하기 위해 도착한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어차피 오래 못 버틸 거니까 빨리 도망가라고 남기는 경고인가.
수습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도망간 저녁 타임 알바들과 떠나지 않은 채로 끈질기게 붙어 있는 야간 타임 알바.
일이 얼마나 지옥 같으면 다 도망갔을까.
나는 야간 타임 알바의 귀를 보며 생각했다. 저 피어싱 다 뽑으면 철물점 하나 차리겠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귀를 뚫는 취미가 있는 친구인 모양이다.
취향은 존중해 주는 게 좋지.
나는 뚫은 자국 없이 매끄러운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이 세계에서는 아공간을 열 일도, 아공간이 열릴 일도 없었다.
‘그렇군요.’
이상한 거 맞추는 게 취미면 존중해 줘야지. 남한테 피해 주는 일도 아니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포스기 점검을 마쳤다.
퇴근 시간이다. 지하철 끊기기 전에 돌아가야지.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야간 알바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말을 싸가지 없게 던지던 아까와는 달리 조금 완곡한 말투였다. 자기도 초면에 재수 없게 말한 걸 깨달았나 보지?
평소 같았으면 말투가 모나다고 비꼬았을 테지만, 지금은 지하철이 급하다.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대충 대답해 줬다.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엔 신경 안 써서요. 전 퇴근합니다.’
그리고 네가 그게 취미라며. 내가 이래 봬도 취미로 에베레스트 등산 가는 인간들도 본 사람이야. 취미로 심해어 낚아 오는 인간들 소식을 귀에 박히게 들었다고. 레나가 얼마나 슬프게 울부짖던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야간 알바는 첫날 이후로 퍽 친근하게 다가왔다.
인사성 밝고 붙임성 좋은 게 딱 새벽의 제라늄 같았다. 원양 어선에 납치당해도 거기 사람들이랑 생선 바베큐 파티를 벌이고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말이 있는 그 인간 말이다.
“말씀 듣고 계십니까?”
다른 생각 하느라 잠시 한눈을 팔았더니 스타일 낯선 반서준이 독촉해 왔다.
“아, 잠시만요.”
야간 알바가 말하기를, 점장님은 편의점에 신경 쓰는 거 싫어한댔는데 이래도 괜찮은가.
에이, 몰라. 점장님 가게인데 내가 알 게 뭐냐.
그리고 경찰이 출동했는데 점장님도 이해하시겠지. 물론 이 편의점은 하루에 한 번씩 경찰이 찾아올 만한 소동이 일어나는 곳이긴 하지만.
나는 휴대폰의 연락처를 뒤져 점장님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기 모양 아이콘을 누르니 유명한 재즈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만간 달로 날아가시겠군.
“여보세요? 점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우당탕 쿵탕탕 같은 소리가 났다. 간식 줄 테니까 장식장 위에서 내려오라는 괴성이 고막을 마구 때렸다.
하하. 동물이랑 놀고 계시는 건가. 개는 장식장 위에 올라가기 힘드니까 아마 고양이?
놀고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절한 비명이었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점장님이 상황을 무사히 해결하기를 바라며 착실하게 기다렸다.
“점장님?”
아무래도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엔 그른 것 같지만.
와장창!!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상황이 더 심각하게 흘러가는 모양이다.
“제가 보기엔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내 휴대폰을 반서준에게 쥐여 주고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시재 점검을 조금 일찍 해 두려면 미리 청소를 하는 게 좋겠다. 안 그래도 바깥에 앉아 있던 손님이 떠난 모양이니까.
10월의 밤은 상상 이상으로 어두침침하다.
나는 야외 테이블 위에 버려진 작은 비닐 팩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저게 뭐지? 설탕? 냉동 핫도그에 케첩이랑 설탕이라도 뿌려 먹었나.
핫도그를 결제한 기억은 안 나지만, 편의점 이용 안 하고 야외 테이블만 쓰는 인간들은 차고 넘쳤다. 그런 인간들 중 하나겠지, 뭐.
나는 테이블 위에 검게 말라붙은 자국을 박박 문질러 지웠다. 청록색 걸레에 묻은 이물질이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아놔. 어떤 새끼가 여기서 또 쌈박질했어. 미치겠네.
첫째 날에 대가리 파이트 하다가 경찰차에 실려 간 취객들이 생각난다. 그들의 대가리 파이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약한 새끼들처럼 서로의 대가리를 쾅쾅 박아 댔는데, 난 또 그들이 인간에서 파키케팔로사우루스로 변한 줄 알았다.
박치기 공룡도 한 수 접어 주는 대가리 파이트를 벌인 그 인간들은 온 동네 떠나가라 난리를 벌이다가 경찰차로 이송됐다.
술에 취해서 경찰도 때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개처럼 살면 쓰나. 나는 야외 테이블 청소를 마치고 편의점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반서준은 아직도 점장님과 통화하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거의 끝물이었나. 나는 걸레를 전자레인지 앞에 대충 던져 놓고 반서준 쪽을 살폈다. 통화를 마친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점장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잠시 가게 안에 있겠습니다.”
반서준은 간단하게 한마디 한 후에 가게 구석에 가서 섰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매장 청소를 시작했다. 슬슬 11시가 가까워지는 시점이었다. 곧 점장님과 함께 다음 타임 알바가 오겠군.
퇴근할 때가 다가오면 손님이 팍 줄어든다. 날씨 쌀쌀한 가을밤에 편의점 야간 테이블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여름엔 또 모르겠네. 우리 집 앞 편의점에는 모기떼의 역습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침묵이 흐르는 매장에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 가 점장님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머리는 까치집, 상의는 깔깔이, 바지는 반바지, 신발은 슬리퍼,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뺨에 할퀸 자국까지.
집에서 급하게 깔깔이만 걸치고 뛰쳐나오셨나 보다. 하긴 경찰이 가게에 방문했다고 하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이 방문했는데?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잠깐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급하게 나왔는데 신발이라도 신고 나올 걸 그랬습니다.”
“괜찮습니다.”
“하하하. CCTV라고 하셨죠? 금방 보여 드리겠습니다.”
점장님 저렇게 웃는 건 수습이라고 내 시급 깎을 때밖에 못 본 것 같은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점장님은 그래도 불쌍한 알바를 잊지 않은 건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내게도 희망을 주셨다.
“바닥 청소 끝내면 먼저 퇴근해도 좋아!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나이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걸레를 미는 손에 힘을 주었다. 노동은 고되고, 남의 돈을 호주머니에 넣기는 힘들다. 조금만 더 간을 보다가 한 달만 채우고 그만두든가 해야지.
이름 모를 야간 알바야, 네가 맞는 것 같다. 나는 틀렸으니까 여길 떠나야겠다. 그리고 엄마 카페나 물려받아서 노후 대책을…….
“…이 아니지.”
나는 엄지에 낀 반지 위를 더듬거리며 내 위치를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 세계는 거짓된 세계. 색욕왕의 환영이고, 나는 이 세계를 한시라도 빨리 파훼해야 했다.
틈만 나면 자꾸 잊으려고 해서 문제다. 평생 특성 없이 편의점 알바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을.
나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바닥 청소를 서둘렀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휴일이다. 마천루를 조사할 시간이 생긴다. 그러니까 빨리 퇴근하자.
한번 목표를 정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바닥 청소를 마친 후 안쪽을 슬쩍 보았다.
곰살맞게 구는 점장님과 세상 심각한 표정의 반서준이 보였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다.
슬금슬금 짐을 챙기고 조용히 편의점을 나서니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야간 타임 알바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그에게 마주 인사해 주었다.
“일찍 퇴근하시네요?”
“안에 점장님 있어요.”
와락 구겨지는 야간 알바의 얼굴이 제법 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