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할로윈이 다가오는 주의 월요일이다. 나는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으로 가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는 언제 텅 비어 있었냐는 듯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천천히 들어선 지하철역 안에도 사람들이 빽빽하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첫째 날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계는 점점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극야는 이것을 두고 로딩 중이라고 말했다.
‘색욕왕의 환영은 체스판을 펼치고 그 위에 말을 올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에 올리면 죄다 넘어지고 말죠. 이 세계는 이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할 거예요. 지금은 로딩 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로딩 중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첫 번째, 돈을 번다.
이곳은 극도의 자본주의 세계. 뭐든 해 보려면 돈이 필요하다.
나는 극야의 코트를 팔까 고민했던 나쁜 마음을 미뤄두고 컴퓨터 본체를 분해했다. 다행히도 내 그래픽 카드는 아직 쓸 만했다.
그래픽 카드를 중고 매물로 내놓자 90만 원이 수중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아르바이트비 받을 때까지 문제는 없을 터였다.
나는 넣자마자 덜컥 붙어 버린 편의점 알바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광고 봐. 사진 진짜 잘 나왔다.”
“이거 지하 3층에도 있지? 역 몇 개에 붙었대?”
“33개. 오늘 다 찍으려면 바쁘게 돌아다녀야겠다.”
카메라를 든 여자 두 명이 지하철 광고판 앞에서 소곤거렸다. 나는 두 사람이 찍고 있는 광고판을 봤다가 멈칫했다.
[HAPPY BIRTHDAY! Juha Yu! 199X 1031]
광고판에는 네가정말좋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아마 생일 광고인 듯했다.
지하철에서 아는 사람 생일 광고를 보는 날이 오네. 얘는 무슨 아이돌이라도 되나?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유주하’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해 보았다.
[유주하
Yu Juha | 모델, 탤런트
출생 : 199X. 10. 31.
소속사 : NY엔터테인먼트
사이트 : 공식 홈페이지, 별스타그램]
찾아보니까 아이돌이 아니라 모델이랑 탤런트다.
하긴 아이돌로 먹고 살 수 있는 성격은 아니지. 바로 태도 논란이 나오고 말 테니까.
……근데 모델이면 몰라도 탤런트는 조금 힘들지 않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광고판을 스쳐 지나갔다.
이 세계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제 차세형의 유튜브를 보고 알았다.
시뮬레이터 안에서 베갯머리송사 따위의 말을 지껄여 사람의 멘탈을 터뜨린 낙원의 레터. 원래 세계에서도 공부의 신 유튜버로 활동하던 그는 이제 직업 자체가 유튜버였다.
뭐든 하는 채널을 운영하면서 히트시킨 유행어와 밈만 해도 열 개가 넘고,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어제 켜 보고 기절할 뻔했다니까.
한 명이 그렇게 등장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등장하지 못할 게 뭐 있나.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동영상을 하나 틀었다.
-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프로그램! 친구를 초대하세요~ 의 오늘 게스트는 바로!!
- 바로 바로~
- 사진 한 장으로 한류 열풍을 불러온 분이죠. 요새 10대들에게 아이돌보다 더 뜨거운 인기를 자랑하는 오늘의 게스트! 주하 씨를 박수로 맞아 주세요!!
평소에도 잘생겼지만, 힘주고 꾸며서 두 배는 더 잘생겨진 네정좋이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등장했다. 나는 그 장면에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못생긴 주제에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등장해? 이 동네 네정좋은 사회성을 가진 네정좋이란 말이야?
이게 무슨 왕 타령 안 하는 극야 같은 소리란 말인가. 세상이 망하려나 보다. 아아, 여긴 원래 세상이 아니긴 했지.
귀에 꽂아 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사회성을 획득한 네정좋의 비즈니스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발전에 감탄하며 때마침 들어온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 안은 평소처럼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 2호선에 사람이 없는 게 말이 되나. 타자마자 옆 사람 휴대폰 화면까지 다 보이는 게 딱 평소의 지하철이다.
안 그래도 꽉꽉 들어찬 지하철 칸 안에 끊임없이 사람이 밀려 들어온다. 나는 어느새 구석까지 밀려나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영상을 틀어 두면 뭐 하나.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팔을 들 수도 없는데.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래, 특성이 없을 때는 이렇게 살았지. 수많은 사람 속에서 굳건하게 버티는 게 아니라 밀치고 구겨져서 살았다.
- 주하랑은 오래된 친구예요. 부모님끼리 친하셔서 만나게 됐죠.
- 친구 아니에요.
- 쟤가 늘 저런다니까요? 저 아니면 친구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화면은 볼 수 없지만 귀에 꽂아 둔 이어폰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대화하는 건 차세형과 유주하인가. 세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가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못생긴 사람이랑 대화 안 한다는 수준에서 쟤랑 친구 아니라고 말하는 수준까지 완화된 정도인가?
팬들은 진짜 얼굴만 보고 좋아하나 보다. 아이돌 했으면 큰일 났겠다.
뭐, 지금 내가 연예인 걱정할 처지는 아니긴 한데…… 저 사람이 헌터가 아닌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어서.
- 그럼 소개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까 두 분이 정하신 테마를 들어 볼까요? 어떤 테마로 탐사를 다녀오셨나요?
- 아~ 저희가 정한 테마는 ‘유령 찾기’예요. 재미있겠죠?
- 역시 범상치 않은 팀이네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볼륨이 빵빵한 이어폰 틈으로 도착역을 알리는 안내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들에게 쓸려 갔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미치겠다.
내 차 마련을 다짐하게 되는 한때였다. 나는 엉망이 된 옷가지를 정리하며 사람이 싹 빠져나간 계단을 올랐다.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이 떠들고 있었다.
- 잠실에 있는 마천루 아시죠? 서울은 물론이고 경기도에서도 보이는 그거 말이에요.
- 거기 소문이 돈다고 해서 다녀왔어요.
- 그것만 말하면 어떡해.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지 말라니까.
- 가끔 그 타워가 거대한 철조물로 보인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 동시에 괴물 같은 게 있다지 뭐예요? 녹색 눈의 유령? 그런 걸 봤다는 사람이 있나 봐요.그래서 저희가 진실을 파헤쳐 보기로 했습니다!
- 별거 없어요.
- 하긴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괴담 같은 걸 살짝 뒤튼 느낌이 나긴 하더라고요.
교통카드를 찍고 밖으로 나오자 저녁 해가 기우는 모습이 보였다.
넣자마자 찰싹 붙은 편의점 알바는 저녁 타임이었다.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새벽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주정뱅이들이 난리 친다는 점에서 그게 그거 같다. 오히려 저녁 타임에 주정뱅이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낙원의 두 사람이 나오는 영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나는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내가 붙은 편의점은 여러모로 신기한 곳이었다.
출근한 지 고작 삼 일째지만, 더 길게 안 다녀도 알 수 있었다. 이 근처 가게가 죄다 술집에 먹자판이라서 취객이 장난 아니게 많다. 심지어 가게 밖에도 테이블이 있어서 거기서 술 처마시고 토하는 인간들도 산더미였다.
취객이 많으면 진상이 많아지는 게 당연한 법. 이 편의점은 노동 강도가 셌다. 그런데도 임금은 그게 그거.
사람이 안 구해지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내가 딱 걸린 거지, 뭐.
나는 알바 장소에 도착해 전 타임 알바랑 교대한 후에 할 일을 살폈다. 바깥 테이블 관리하기랑 팔린 물건 진열대 앞으로 빼 두기, 그리고 퇴근하기 30분 전에 매장 청소하기.
진상만 안 오면 완벽하겠네.
좋아. 오늘은 진상 안 만나고 무사히 넘어가게 해 주세요!
나는 대충 높으신 분 아무나 들으라고 기도한 후, 씩씩하게 카운터에 섰다.
“7,500원입니다.”
“봉투 주세요.”
“봉툿값 20원 붙어서 7,520원입니다.”
“봉툿값을 왜 받아요? 어젠 분명 안 받았잖아요.”
첫 손님부터 개 같았다.
* * *
남의 돈이 내 돈 되는 게 힘들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
나는 몰아치는 진상의 향연 앞에 녹다운 당했다. 손님, 봉툿값을 왜 받냐고 저한테 물으시면 저는 할 말이 없는데요.
그리고 조리는 셀프입니다. 알바는 라면 끓여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차라리 피시방에 가세요. 거기선 알바가 치킨도 튀겨 주고 밥도 볶아 줍니다.
밖에 있는 테이블 이용하는 손님. 토하고 도망가지 마세요. 그거 제가 치웁니다.
손님이 분명히 담배 팩으로 달랬는데 왜 갑이 아니라 팩으로 주냐고 화내면 어떡합니까. 이 알바는 죄가 없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팍팍하지.
나는 편의점 바깥의 테이블을 닦으며 내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색욕왕이 뭘 바라고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날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환영을 꾸민 거면 대단하다고 손뼉 쳐 줄 만하다.
집에 갈 때 술이라도 사 갈까.
나는 걸레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미친 경차 한 대가 전봇대에 머리를 들이받는 걸 보았다.
“이런 미친.”
술을 얼마나 처먹고 운전하면 도로를 벗어나 전봇대에 차를 들이받고 마는가.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2를 찍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여기 차 한 대가 전봇대 들이받고 박살 나서요.”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부서진 차를 보며 웅성거렸다.
나는 위치를 빠르게 불러준 후 편의점 안으로 대피했다. 저 사고 현장은 이제 출동한 경찰들이 어떻게 해 주겠지. 나는 청소하고 집에 가기만 하면 된다.
경찰서는 편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앞에 다른 상호의 편의점이 있어서 이쪽에 그들이 오지는 않지만, 대충 그랬다.
편의점 안을 청소하며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긴급 출동한 경찰차가 상황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나는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막 출근한 다음 타임 알바와 인사를 나누었다. 듣기로는 대학생이라는데, 인사성이 참 밝았다.
“이 앞에 사고 났는데, 보셨어요?”
“제가 신고했어요. 테이블 닦고 있는데 갑자기 전봇대에 박더라고요.”
“저런 사람 되게 많아요. 계속 일하시면 자주 보실 걸요?”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타임 알바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이 편의점은 무슨 악운이 끼었길래 매번 그런 일이.
“대단한 동네네요. 그럼 저 퇴근하겠습니다.”
“네. 내일 또 봐요.”
조끼를 갖춰 입은 그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후 편의점 문을 밀고 나왔다.
겉옷을 챙겨입고 나왔는데도 공기가 지나치게 싸늘하다. 목이 비어서인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고 뻐근한 목을 돌렸다. 사고 현장은 거의 다 정리되었는지 그 근처에 사람 두 명만 남아 있었다.
“이번 달에만 벌써 네 번째인 것 같은데, 이 근처에 진짜로 좌표가 있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예전엔 문제없는 곳이었는데, 요즘 들어 이쪽에 자주 나타난단 말이지. 커피 마실래?”
“제가 사 올게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다. 나는 편의점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뺐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편의점의 환한 조명 덕에 사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허.”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차분하게 내린 검은 머리, 하늘색이 아니라 짙은 고동색인 눈, 뚫은 자국 없이 매끈한 귀와 날 서지 않은 인상.
내가 아는 그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의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지나치게 낯설다.
“저거…… 반서준이잖아.”
내가 머리에 총 맞은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반서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