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두 눈이 회색도 녹색도 아닌 갈색이었다.
‘이 세계는 위험하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마세요. 지금은 힘을 쓸 수 없으니까요.’
검은 장우산을 들고 찾아온 극야는 우리 집 앞까지 날 데려다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약한 안도감만 들었는데…….
‘또 잊어버릴 것 같으면 저를 부르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실 처음부터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덤프트럭이랑 부딪혀도 덤프트럭만 찌그러지는 특성의 소유자였다. 골목길에서 만난 범죄자가 칼을 들고 찔러도 피부에 안 박히는 게 정상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나는 피부가 까져서 발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특성이 없다.
그리고 아마 마법도.
“연희야, 엄마 자러 갈 테니까 자기 전에 거실 불 끄고 들어가.”
얼굴에 팩을 붙인 엄마가 수면양말을 신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욕실 환풍기를 켜고 밖으로 나와 거실 불을 껐다. 티비를 켜고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헌터들이 사라진 건 그들이 특성을 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극야도 사라져야 하는 게 옳지 않나?
- 저는 가끔 순간이동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 순간이동이요? 어느 순간에요?
- 저는 차로 출근하니까 아침마다 차로 꽉 막힌 도로를 보잖아요. 그러면 정말 초능력이 갖고 싶어진다니까요?
- 정말 꿈 같은 얘기네요. 세상에 초능력 같은 건 없으니까요!
- 그건 그래요. 다 상상일 뿐이죠, 하하하.
드라마가 보기 싫어 대충 돌린 채널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예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초능력으로 치부하다니.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네가정말좋아가 레바논에서 발견됐다는 게시글을 봤는데 말이다.
모든 걸 잊었던 순간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몽땅 다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창문에 비쳐 어른거리는 바깥의 불빛들이 숨을 훅 불면 사라질 것만 같이 느껴진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에서는 한창 슈퍼 히어로 영화 리뷰가 나오고 있었다.
-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CG로 만들어진 몬스터가 놀라울만큼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상상 속에나 있을 법한 존재를 기막히게 구현해놨죠.
고릴라를 닮은 몬스터가 게이트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사람들을 위협한다. 슈퍼 히어로 단체는 몬스터로부터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목적은 다르지만, 헌터와 다를 건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나오고, 싸우고. 잃은 것도 있었지만, 지킨 것도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게 사라졌다. 나는 내가 잃은 몇 년을 떠올리며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평화를 바란 건 맞지만, 이런 세계를 바란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라져 텅 빈 세계와 사라진 특성.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단 한 명의 헌터.
나는 아까 보았던 보라색 눈을 떠올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내팽개치듯 던져둔 극야의 코트가 보였다.
내일은 세탁소에 가야겠네. 젖은 머리가 소파 커버에 물자국을 남겼다.
특성이 사라지니 피로감이 크게 다가왔다. 나는 내일을 기약하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을 뒤져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일단 이 세계는 누군가가 과거를 바탕으로 꾸며낸 세계다.
마법과 특성이 없는 세계. 게이트와 몬스터가 없는 세계. 자본주의 아래 모두가 평등한 잿빛의 도시.
모든 게 평등하면서 불평등한 그 세계를 바라는 한 사람의 꿈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
바탕이 된 건 과거의 이 세계를 기억하는 나.
즉, 나는 환영 마법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드라이클리닝 맡긴 건 언제 찾아오면 되는 거지?”
“세탁소에서 알아서 배달해줄 텐데? 이 집 앞 세탁소 간 거 맞지?”
국그릇에 밥을 퍼준 엄마가 찌개를 가져오기 위해 오븐 장갑을 들었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밥을 뒤적거리며 안에 든 율무를 하나하나 빼냈다. 씹으면 텁텁해서 싫다.
“어제 예솔이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왠 남자 코트를 가지고 들어왔대?”
받침대 위에 순두부찌개를 올려둔 엄마가 맞은 편에 앉았다. 은근한 표정을 보니 뭘 생각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미리 말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뭘 생각했는데?”
“남자친구 생겼냐고 떠볼 생각이잖아.”
내가 엄마랑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걸 몰라서 되겠어? 이 정도야 척척박사지.
원래 사람이라는 게, 다 남의 연애사에 관심 많지 않던가. 남이어도 관심 많은데, 그게 딸이면 더하지.
엄마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 말해도 알겠다. 예솔이 핑계 대고 남자 만난 거 아니냐고 물어볼 셈이잖아.
“다시 말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어제 비 왔잖아. 근데 우산이 없더라고. 그래서 비 쫄딱 맞고 오는 중이었는데, 길 가던 행인이 불쌍했는지 코트를 적선하고 갔어.”
세상 살다 보면 nnn만원 짜리 코트를 적선하고 가는 선량한 행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 와, 이게 특성보다 더 현실감 없는 소리 아닌가?
내가 말하고도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다. 나는 골라낸 율무를 휴지에 싸서 버리려다가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특성이 없어서 두 배로 아팠다.
“너 대체 몇 살이야? 편식하지 말고 제대로 먹어!”
“엄마도 초콜릿이나 사탕 안 먹잖아! 그것도 편식이야!”
“그건 건강에 나쁘고 이건 건강에 좋잖아! 이런 거 다 골라내서 나중에 어떻게 살려고 그래! 어제 일도 말이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번호를 따 왔어야지!!”
아니, 편식이랑 번호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다시 밥상 앞에 앉았다. 엄마가 그 인간이 뭐 하는 인간인지 몰라서 그래. 그건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라니까?
“너도 벌써 스물 중반인데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사람 많이 만나봐야 결혼할 때 편해.”
“그러다 드라마처럼 결혼식장에서 칼에 찔려.”
“얘도 참,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니?”
엄마가 핀잔을 주며 생선 가시를 발라줬다.
나는 율무를 죄다 골라낸 잡곡밥을 생선 살과 함께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엄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간 불똥이 튈 것 같으니 입 다물자.
“그 사람이 코트 주면서 번호 같은 거 안 줬어? 그 코트 비싸 보이던데.”
“그 사람 완전 부자라서 코트 같은 건 적선해도 되나 보지. 그거 중고 장터에 내놓으면 돈 될 것 같지 않아?”
“얘는 젊으면서 낭만도 없어. 어휴.”
살면서 낭만 찾을 일이 얼마나 된다고. 낭만은 살만할 때나 찾는 거지.
나는 얌전히 밥을 우물거리며 고민했다. 아침에 은행 앱을 살펴봤을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지금 내 통장 잔고는 고작 12만 원이었다.
저 코트 확 팔아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돈 없어서 네 코트 좀 팔았다고 말하면 극야가 뭐라고 할까. 반응이…… 정말 궁금하긴 했다. 의외로 뭐라고 안 할지도…….
잡생각이 많아지니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나는 대충 그릇을 비우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 방 창문으로도 보이는 대기업 자본의 탑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게이트의 몽마들이 보여준 조잡한 환영과 지금 내가 보는 이 정교한 환영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르지만, 결국 환영 마법이라는 사실은 같았다.
이런 식으로 남의 기억에 기대어 구축하는 환영은 주체가 되는 사람이 흔들리면 어긋나기 시작한다.
나는 완전히 어긋난 대기업 자본의 탑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건 이제 매끄럽게 잘 빠진 초고층 빌딩이라기보단…… 가까스로 균형을 이룬 쓰레기 탑 같았다.
흉한 철골과 겉면에 덕지덕지 붙은 형이상학적 구조물들. 조만간 누군가의 움직이는 성이 되겠는데?
“용케 안 무너지고 잘 버티네.”
위보다 아래가 얄팍한 게 참 신비한 구조다. 이 세계 사람들은 저런 기괴한 마천루가 서울에 대놓고 존재하는데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걸 분해하는 자가 올해의 분리수거 MVP를 먹을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 세계가 환영 마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자각하니 특성을 못 쓰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안에 있는 건 내 정신뿐이니 특성은 바깥의 내가 쓰겠지.
바깥의 나는 의식 없이 숨만 쉬고 있을 테니까 빨리 파훼하고 나가지 않으면 위험하다. 낯선 천장이다, 따위의 소릴 하면서 병원에서 일어나게 될 수도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원더랜드에 떨어진 기분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솔직히 궁금한 것은 아직 많이 남아있긴 했다.
내 정신의 수호자라던 편애는 왜 내 정신을 못 지키고 나가떨어졌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극야는 왜 이 안에 얼굴을 비췄는지.
또 이 세상에는 헌터가 없는데, 어제 러브리스와 통화했던 건 대체 무엇이었는지.
텅 비어있던 지하철 플랫폼과 시가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각종 헌터 관련 자료들. 게이트도, 협회도, 몬스터도, 각성자도, 하나같이 자취를 감췄다. 인터넷에 검색해봐야 판타지 소설이나 나올 뿐이다.
극야가 경고했었지.
이 세계는 위험하다고. 어제 나도 모르게 바깥을 잊었던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조차 없다.
다시 이 세계에 동화되어 바깥의 일을 잊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나는 답장 하나 오지 않는 휴대폰 화면 위를 문질렀다. 수많은 의문이 있는 만큼 모를 수 없는 것도 있다.
이 끝내주는 원더랜드로 날 초대한 것은 분명히 색욕왕일 터였다.
얼마 전 편애와 이야기를 나누며 색욕왕의 존재를 알게 된 참이다. 분명 PK의 배후에도 몽마들의 왕이 존재했다.
몽마는 그 어떤 종족보다 환영 마법에 능통한 종족. 그들의 왕인 색욕왕이라면 현실만큼 정교한 환영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색욕왕이 나를 가둔 이유는…….
아주 잠깐 연결되었던 러브리스와의 통화로 미루어 짐작해 보아, 바깥에도 손을 뻗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구를 뒤집어 엎을 만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언제나 나였다.
색욕왕은 여기에 나를 가두고 바깥에 손을 쓰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한다면 제일 큰 방해꾼이 사라지니까.
“짜증 나게.”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색욕왕의 환영은 기막히게 정교한 나머지 사람을 백수로 만들었다. 나는 특성을 잃은 것으로 모자라 다시 한번 백수가 되었다. 이 무슨 무시무시한 배드 엔딩이란 말인가.
자기 좋자고 사람을 백수로 만들다니.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통장 잔고 12만원으로 살다간 진짜로 극야의 코트를 팔게 생겼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근데 계속 생각해 본 건데, 극야는 회귀자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코트를 주고 간 게 아니었을까?
나는 옷을 챙겨 입는 내내 극야의 코트를 팔아 통장을 채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안 되는 건 아는데, 이게 사람이…… 닥치면 또 어쩔 수 없다니까.
모자에 마스크까지 챙겨 쓴 후에 방문을 밀고 나가니 집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엄마가 출근한 모양이다.
[엄마 딸 잠깐 나갔다 옴! 저녁 식사 전에 들어오겠음!]
나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신발을 챙겨 신었다. 목표는 일단 저 흉악하게 생긴 마천루를 조사하는 것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