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사라진 헌터들, 그리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세상의 모습.
저녁 식사를 할 때부터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거세졌다. 이제 빗줄기가 된 그것은 세상을 온통 적시며 고였다. 양말과 신발을 축축하게 적신 빗물이 또르륵 굴러 아스팔트 위에 맺히는 게 보였다.
“비가 오네.”
에코백을 앞으로 맨 예솔이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받았다.
어두운 도시를 밝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스쳐가며 하얀 잔상을 남겼다. 이슬 맺힌 풀잎처럼 맑은 녹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촤아악-!!
버스가 지나가며 물이 거세게 튀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물을 맞은 사람이 욕을 내뱉으며 옷을 턴다.
에코백에서 지갑을 꺼낸 예솔이가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며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봐. 내가 우산 사올게.”
“같이 갈까?”
“괜찮아. 빨리 올게.”
활짝 웃은 예솔이가 편의점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건물 입구 유리문에 기대어 서서 건물 밖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치게 낯설다.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스산했다.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목덜미를 쓸며 얇은 코트를 여몄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이렇게 춥네. 비가 와서 그런가?
이런 날에는 산책 다녀온다고 말하고 엄마 몰래 피시방 가는 게 딱인데. 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독서실 간다면서 오락실만 갔지.
우리 학교 앞에 있던 독서실은 달 단위가 아닌 하루 단위로도 계산이 가능했는데, 나와 예솔이는 그 점을 이용해 매번 오락실에 갔다.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옛날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푸스스 웃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양손에 일회용 우산을 든 예솔이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우산 사왔어. 나는 여기 있는 투명 우산이고……”
팡!
비오는 바깥을 향해 펼쳐진 우산이 빙그르르 돌았다. 나는 마구 튀는 물방울에 미간을 찌푸렸다.
“연희는 핑크!”
투명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간 예솔이가 반투명한 연분홍색 우산을 내밀었다.
밤이라서 투명한 게 더 좋지 않나?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우산을 받아들었다.
“왜 분홍색이야?”
“아~ 노란색 우산이 다 팔렸더라고. 색깔 있는 쪽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밤은 위험하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노란색 우산이라니. 유치원 졸업한 게 언젠데.
노란색도 아닌 연분홍색 우산을 쓰고 있자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엄마랑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캐릭터 그려진 분홍색 우산을 사달라고 졸랐던 것 같기도 하다.
“내일 연차랬지? 오랜만에 얻은 휴일인데 뭐 할 거야?”
비 오는 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으니 물방울이 튀어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물방울 튀는 소리와 함께 화음처럼 어우러졌다.
“집에서 혼자 보낼까 싶어. 아마 당분간은 자택 근무로 쭉 집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투명 우산 너머로 예솔이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약간 싸한 향수 냄새가 습한 비 냄새와 섞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이 났다.
“갑자기 왜?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공사가 있을 예정이거든. 그래서 공사 기간 동안 출근 안 해.”
“좋겠네. 너희 집은 회사랑 멀잖아.”
예솔이와 매일매일 어울려 다녔지만, 예솔이네 집에 찾아간 기억은 없다. 반대로 예솔이는 우리 집에 자주 왔던 것 같은데.
아니다. 예솔이네 집이 어디 있는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찾아간 적이 있었나?
좀 오래 전 일이라서 잘 모르겠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옛날 일은 잊기도 하고 그런 거지.
나는 빗물에 젖어서 축축해진 발가락을 신발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21세기의 현대 문명은 빛없는 밤도 낮처럼 환하게 밝힌다.
색색의 조명과 불빛이 해 없는 밤거리를 해가 뜬 낮처럼 밝혔다.
“아! 보인다. 저 앞이 지하철역이야.”
녹색 눈의 예솔이가 내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온기가 느껴지는 예솔이의 따듯한 손이 차갑다 못해 얼음장 같은 내 손을 녹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싸늘한 향이 다시 한번 훅 풍겨왔다.
평소에 쓰던 향수와는 조금 다른 향이지 않나?
예솔이랑 같이 있으면 언제나 꽃향기가 뒤섞인 비누 향이 났는데, 이건 반대로 남자 향수 같다.
깜빡거리던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어느 순간 빨간 불로 바뀌었다. 나는 넋을 놓고 예솔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힘이 풀려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오토바이의 하얀 불빛이 횡단보도에 선 우리 둘을 밝혔다.
나는 다가오는 오토바이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팔을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조심해야지. 위험하잖아.”
내 어깨를 끌어안은 예솔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시에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물방울을 튀겼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산 놓치지 말고. 비 맞으면 감기에 걸릴 거야.”
빗물에 젖은 우산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서 우산을 접었다. 감기 같은 건 특성이 생긴 이후로 걸려본 적 없는데. 묘하게 간질거리는 말이었다.
“넌 지하철 안 타?”
“응. 나는 택시를 불렀어. 너 데려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녹색 눈의 예솔이가 투명한 우산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우니까 조심히 들어가. 집에 가서 연락하고.”
“연희 너도 집에 가서 연락해. 예전처럼 으슥한 골목길로 다니지 말고. 위험하잖아.”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 예솔이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멀어졌다.
나는 분홍색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장난을 치다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여전히 지독하게 고요한 거리다.
지하로 내려와서 카드를 찍고,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이 오는 걸 기다리고.
텅 빈 플랫폼에 내 발소리만 울렸다. 나는 괜히 어린애처럼 노란 블록 위를 따라 걸었다. 빗물이 묻어 미끄러운 운동화 밑바닥이 매끈한 블록과 맞닿자 쭈욱 미끄러졌다.
쿠당탕-!!
넘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히 다른 색깔의 블록을 밟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란 말이야.
뒤로 넘어졌을 때 바닥을 짚으면서 까졌는지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집에 가서 약 발라야겠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휴대폰을 쥐었다.
아침에 그렇게 연락을 돌렸는데 밤이 다 되도록 답장 하나 없었다.
이래서 사람 많이 만나봤자 소용없다니까. 진실된 친구 하나가 낫지.
예솔이를 봐라. 취직했다고 밥도 쏘고, 우산도 주고, 걱정도 해 주고. 비가 이렇게 오는데 집에는 잘 들어갔을까 모르겠네. 차 많이 막힐 텐데, 같이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스크린도어 앞에서 한참을 멍 때리고 있으니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이 들어왔다.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칸에 올라타 가장 근처의 좌석에 앉았다. 오래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다.
* * *
["이번 역은 합정, 합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물기에 젖은 우산을 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더니 어느새 내릴 역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쥔 채로 하품을 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역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밤이 늦어서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사람도 없는데 걸리적거리는 안대를 끼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보인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벗지 뭐.
피곤해서 그런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벗어 쓰레기통에 던지고 자판기에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졸았다.
왜 자꾸 잠이 오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놀아서 피곤한 건가.
그래도 잘 거면 집에 들어가서 자야 할 텐데.
나는 다시 한번 하품하며 지하철역 밖으로 나왔다. 사람 없이 고요한 거리를 거센 빗줄기가 잠식하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거센 비에 한없이 약한 편의점표 우산이 쏟아지는 비를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이래서야 집에 가기 전까지 버티긴 하겠어? 나는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 속에 넣고 꽉 쥐었다. 나보다 훨씬 비싼 휴대폰이었다.
거리를 비추는 불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에서 나오는 빛들이 빗줄기에 쪼개져 산개했다. 나는 망가진 연분홍색 우산을 들고 큰길을 지나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점멸하는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이 쓰레기로 가득한 골목을 비췄다.
담벼락에 가득한 낙서와 바닥을 굴러다니는 담배꽁초,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종량제 봉투들.
엄마는 이 골목이 더럽고 불쾌하다며 싫어했지만, 나는 좋아했다. 집에 가는 길이 훅 줄어드는 것도 있지만, 여기서 종종 동물을 발견하곤 했기 때문이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옆 담벼락에 살랑거리는 꼬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림자가 진 담벼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까만 털의 작은 개가 비를 피해 웅크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개가 아니라…….
“여우?”
물에 다 젖은 귀가 쫑긋 솟아오르더니, 검은 여우가 고개를 든다. 털처럼 검은 눈이 날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울 거리 한복판에 왜 여우가 있지…….”
개나 고양이는 자주 봤는데 여우는 또 처음이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검은 여우 위에 우산을 내려놓았다. 앞발을 핥은 여우가 까만 눈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살랑이는 꼬리가 물에 젖어 난장판이었다.
신기하긴 하지만 집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 헤어져야지.
나는 여우에게로 손을 잠시 뻗었다가, 그대로 다시 거뒀다. 만지는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만두자.
우산을 여우에게 양보하니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게 되었다. 코트 안쪽에 목이 드러나는 셔츠를 입었더니 정신 나가게 춥다. 안대 있었으면 걸리적거렸을 텐데, 버리기 잘했네.
하긴 중2병도 아니고 멀쩡한 눈을 안대로 가리고 다닌 게 이상한 거였다.
컬러 렌즈를 낀 것도 아니라서 두 쪽 다 갈색일 텐데.
예솔이에게 말한 것처럼 할로윈은 오늘이 아니라 다음 주였다. 오늘 분장하면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깜빡깜빡 점멸하던 가로등이 팍!! 소리를 내며 꺼졌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켜고 그 위를 꾹꾹 눌렀다. 손이 빗물에 젖은 탓인지 지문 인식이 잘 안 먹혔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앞이 뚜렷하게 보였다.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집까지 얼마 안 남았다. 돌아가서 씻고 바로 자야지.
없는 기운을 쥐어 짜내며 씩씩하게 걷던 때였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뒤쪽에서 뚜벅뚜벅 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났다.
뒷덜미가 어쩐지 서늘하다. 나는 걷는 속도를 높여 더 빠르게 걸었다. 일정하게 뚜벅뚜벅 소리를 내던 뒷사람이 내 속도에 맞춰 더 빨리 걸었다.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뺨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빗물처럼 머리가 차갑게 굳었다. 나는 걷는 속도를 더 빨리했다.
뒤따라오는 사람은 나보다 더 빨리 걸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굳고, 호흡이 빨라졌다. 휴대폰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휴대폰 플래시를 앞으로 두고 있으니 뒷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이대로 집에 가면 큰일 나는 것 아닌가? 나는 단단히 얼어붙은 채로 걸음을 멈췄다. 아니지. 특성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나?
아, 그런데…… 특성이 뭐였더라?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내가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를 상대로 여유로울 리가 없지 않나.
지하철에서 졸면서 잠시 허황된 꿈을 꾼 모양이다.
나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집에는 엄마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갈 수는 없다.
차라리 여기서 결판을 내면……
결판? 무슨 결판? 무기로 쓸 만한 우산도 두고 왔는데, 휴대폰만 든 채로 뭘 할 수 있다고?
자꾸 이상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이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바뀐 게 없고, 이 세상 또한 바뀐 게 없는데도.
눈앞에 여전히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내가 자리에 멈춰선 이후로 속도를 늦춘 그 사람은 아주 천천히 걸어와 내 어깨를 감쌌다. 장갑을 낀 손이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고, 머리 위에 우산을 기울였다.
나는 파랗게 질렸을 게 분명한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닥쳐온 플래시 불빛에도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그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너무 늦었을까요?”
하얀 낯 위로 보라색 눈만이 선명했다. 온통 갈색뿐인 세계의 단 하나뿐인 보라색이었다.
아. 그랬던가.
저 눈을 보니 깨닫게 된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거짓일 것이라고 느꼈던 기시감이 진실이고, 이 세상이 거짓이었던가?
어깨 위로 느껴지는 무게가 어색하다. 나는 내 어깨 위에 올라온 그의 코트를 만지작거리면서 더듬거렸다.
“분명…… 다른 헌터들은,”
“…….”
“분명히 사라졌는데…….”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사라진 헌터들, 그리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세상.
갈색 눈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칙칙한 세계였다. 나는 허둥대며 휴대폰 플래시를 껐다. 남자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트를 내 어깨에 다시 걸쳐주었다.
“제가,”
그리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하얀 머리카락이 뺨 위를 간질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보라색 눈이 보였다.
코끝에 맡아본 적 있는 싸한 향기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