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그 다음 페이지들은 하나같이 흥미 없는 내용뿐이었다.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다섯 번째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의 수호자를 불러오는 정령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정령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세계에 깃든 수호자를 불러 그 힘을 빌리는 마법을 사용한다.
정령 마법은 자연을 볼 수 있는 눈과 그들과의 교감에 필요한 소통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므로 까다로운 마법 중 하나다.
수호자들의 힘을 빌려 기후를 다스리고 조종하는 정령술사는 대부분 엘프 종족이며, 아주 희귀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재능 중 하나다. 상징은 푸른 구름이다.]
델리키아와 엘프 종족이 담당했다던 정령 마법에 관한 내용,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여섯 번째는 이세계의 존재를 불러와 복속시키는 소환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소환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별구름 너머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불러 자신의 수하로 부리는 마법을 사용한다.
소환술사들은 우주와 천체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관측자이다. 정령술과는 다르게 소환한 존재의 머리 위에 앉아 그들을 다스리며, 이는 왕의 권세와도 같다. 대부분의 소환술사는 나태왕의 군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상징은 감색 망원경이다.]
이번에 나타난 델리키아와 감색 눈의 소환 마법에 관한 내용,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일곱 번째는 영혼을 보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사령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사령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마법을 사용한다.
사령 마법은 아직까지 의문에 쌓인 마법이며, 악마의 손아귀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마법이다. 죽음 너머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가 받은 아주 일부만이 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을 다스리는 대가로 자신의 죽음을 빼앗겼으며, 그 수는 엘프의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 상징은 자색 해골이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 교주인 악마의 사령 마법.
단순히 마법 입문만을 생각하고 보기에는 쓸데 없는 소리가 많은 편이었다. 외부 차원에서는 이것들이 다 배경 지식이라고?
【“저쪽 차원에서는 어릴 때 밤마다 악마와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읽어주거든.”】
“밤마다 너무 섬뜩한 걸 읽어주는 거 아니야?”
【“당장 잠에 들지 않으면 악마한테 팔아버리겠다! 하고 겁주는 거지.”】한때 신이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악마 취급이다.
하긴 자기들도 스스로를 악마로 칭하는구나. 신보다 악마가 적성에 맞는 걸까.
【“확실히 신보다는 악마가 편하지.”】
“왜? 신인 쪽이 좋지 않나? 섬기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는 악마를 추앙하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신이면 바라는 게 너무 많아서 말이야. 악마가 나쁜 짓을 하면 악마기 때문에 그렇다고 납득하지만, 신이 그러면 불신하고 매도하게 되잖아?”】듣고 보니 그렇네.
나는 편애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지는 막 마나를 느끼는 방법에 접어든 참이었다.
온갖 설명이 줄줄 써 있던 앞과 다르게 마나를 느끼는 방법은 심플했다.
우선 자리를 잡고 편한 자세를 취한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대자로 드러누웠다.
【“편한 자세를 취하라고 했지, 드러누우라곤 안 했어.”】
“난 이게 가장 편한 자세야. 얼마나 편해.”
한국인은 좌식의 민족이 아니라 와식의 민족인 게 분명하다.
나는 똑바로 누운 채로 다음 줄을 읽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한다. 대기에 머무는 마나를 느낀다.
“이게 끝이야?”
【“그게 끝이야.”】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페이지를 샅샅이 살폈다. 밑에 9포인트보다 작은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느끼지 못하면 마법에 재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나 마법에 재능 없어?”
떨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샜다. 개나 소나 다 한다는 마법도 못 한다니. 내가 PK랑 똑같다고? 이 무슨 지리멸렬한 소리란 말인가.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이불 안에서 바둥거렸다. 그러자 편애가 한심한 투로 중얼거렸다.
【“이 차원에는 마나가 없잖아.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해야지.”】게이트가 열리며 조금씩 새어 들어오긴 했어도, 이 차원에는 기본적으로 마나가 없다. 그러니까 마나를 느끼고 싶다면 게이트 안에서 시도해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건 또 몰랐네. 뭐야, 그럼 오늘 안에 못 하잖아.”
【“그쪽이랑 이쪽은 환경이 다르잖아. 그런 건 미리 생각해놨어야지.”】나는 쓸모없게 된 종이 뭉치를 아공간에 휙 던져 넣었다.
방 천장을 보면서 드러누워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났다.
사건 전에 레나에게서 온 경고 메시지에 감사 인사도 해야 하고, 하람과도 다시 이야기해봐야 하는데.
잠깐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하람이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색깔이 바뀌었을 눈 위를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엄마한테 뭐라고 변명하지.”
지금은 안대 끼고 아픈 척하고 있다지만, 평생 다래끼 난 사람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한쪽 눈 색이 녹색으로 변하는 병이 뭐 있더라?
【“녹내장.”】
응. 그런 거 걸렸다고 오해라도 받으면 큰일……
“야, 녹내장이 뭐냐, 녹내장이.”
내 나이가 몇인데 녹내장에 걸리고 그래. 나는 툴툴대며 차가운 손을 목에 가져다 댔다. 따듯한 목에 차가운 손이 닿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질병이랑 나이는 관계없어.”】
“나도 알아. 네가 괜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차가운 손발을 데우기 위해 이불 안에서 웅크리고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나는 예솔이와 만난 날에 무얼 하고 놀지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색욕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어렴풋이 떠오르는…… 내 어린 날이 생각나는 목소리였다.
* * *
큰일을 한 건 끝내고 나니 삶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는 매일매일 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집 안을 굴러다녔다.
【“너희 집 바닥 청소는 네가 다 하네?”】
“내가 효녀긴 해. 땡큐.”
【“…….”】
편애는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 되는 내 뻔뻔함에 자주 말문이 막히곤 했다.
태어나서 언제 또 악마의 입을 막아보겠어. 진짜 끝내주는 나날이었다.
“마법을 익히면 익힐수록 해당 계열의 상징색으로 눈 색이 변한다. 색의 선명함을 보고 그 사람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근데 방바닥에서 굴러다니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나는 아공간에서 종이를 꺼내 놓친 부분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9포인트의 작은 글씨가 날 괴롭혔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이걸 읽을 만큼 심심했기 때문이다.
“간혹 검은 눈을 가진 자가 태어나곤 하는데, 이는 모든 계열에 재능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마나를 다루고 마법을 사용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모든 이가 왕이나 왕에 준하는 존재가 되었다.”
검은 눈.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을 떠올렸다. 부산우유! 새벽 길드에 속한 그녀는 이질적인 검은 눈의 소유자였다.
“미래의 대마법사 감이었다니. 잘 보일 걸 그랬어.”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게 특성뿐이니 그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나중에 마법이 도입되면 엄청나게 성장할 거다. 어쩌면 반서준을 누르고 올라설지도 모르고.
나는 부산우유 다음으로 검은 눈의 인간을 떠올렸다.
단순히 모든 악마와 계약했기 때문에 눈 색이 바뀌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게 있나?
【“나태왕도 검은 눈이야.”】
타이밍 좋게 편애가 끼어들었다.
그 인간은 그만 떠올리고 다른 생각을 하라는 뜻인가.
나는 편애의 의도를 순순히 따랐다. 그래, 나태왕도 검은 눈이었다.
지옥으로 가는 입구처럼 새까만 눈,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핏기없는 얇은 입술.
시뮬레이터 안에서 나를 죽인 그 왕은 분명히 검은 눈을 가졌다.
그건 어쩌면 나태왕을 죽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사령술사들은 죽음을 다스리는 대신에 죽음을 빼앗겼다고 했으니.
물론 나태왕이 허가 받은 일부에 속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편애도 몰랐다.
【“모르는 게 아니라…….”】
“응, 그래 그래. 너랑 상관없는 영역이라서. 알아, 안다고.”
그 뒤로도 외부 차원에 대한 배경 지식을 쌓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이 불친절한 입문서는 알고 보니 저번에 만난 엘프 로에닌이 쓴 책이었다.
어쩐지 엘프 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만큼 적다고 표기하더라. 엘프가 쓴 책이라 엘프 기준으로 설명한 거였다.
집에서 뒹굴며 책이나 보는 소소한 평일이 지나갔다. 중간에 하람을 잠시 만나보려고 연락했는데, 하람은 저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터 협회 본부로 날아갔다고 한다.
협회 본부에 그런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그 근처에 차원 학회도 있으니까 정보를 얻을 수 있긴 하겠다. 잘하면 저세상 간 감색 눈의 악마도 만날 수 있겠네.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신경 끄고 내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예솔이와의 약속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예솔이와 약속을 잡은 일요일은 하늘이 맑고 해가 밝은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연희 네가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난 거야?”
“응. 친구랑 약속 있어서.”
엄마는 하나뿐인 딸에게 친구가 있다는 점에 감격했다.
예솔이 취직 이후로 친구 얘기를 잘 안 했더니 절교했는 줄 안 모양이다.
“용돈 줄까? 밥은 먹고 들어오니?”
“엄마 딸은 장성한 성인이야. 밥은 잘 모르겠는데…… 연락할게!”
나는 신발에 발을 구겨 넣으며 말했다. 벌써 가을의 끝물이다. 날이 쌀쌀해 예전처럼 후드 하나만 걸치고 나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수가 있었다.
마치 겨울에 반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나는 겨울에 반팔에 반바지 입고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누굴 만날 땐 제대로 차려입을 필요가 있었다.
혼자만 이상하게 입고 가면 다른 사람이 부끄러워지잖아.
내가 손가락테크닉인 걸 아는 사람 앞에서는 거리낄 것 없었지만, 모르는 사람 옆에서는 적당히 일반인인 척하는 게 좋았다.
“오늘 친구랑 엄청 유명하다는 카페 가기로 했는데, 가보고 괜찮으면 나중에 같이 갈래?”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우리 집 악마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심심할 때마다 말을 걸어오던 악마였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저쪽에서 말이 없다면 이쪽에서 말을 해줘야지. 나는 느리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왜 말이 없어? 또 네정좋이 괴롭혀? 아니면 러브리스가 입 다물래?”
엘리베이터가 3층에 멈춰 서며 스르르 문이 열렸다.
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많이 바빠? 아니면 뭐 삐진 거 있어?”
오늘 편애가 삐질 만한 짓을 했던가? 그런 거 없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1층에서 내렸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한결 서늘해진 공기가 뺨을 스쳤다.
나는 지하철 역을 향해 걸으며 편애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편애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