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함예솔. 하나뿐인 내 친구. 늘 밤샘 각이라고 메시지 보내는 게임 회사 개발자.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가 빌드 마감 때문에 퇴근을 못하고 있다는 푸념이었다.
공대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개발자로 취직했는지는 미지수. 어느 순간 취직했다는 말과 함께 지옥 같은 밤샘을 시작했으니까.
예전에는 눈만 맞으면 노래방으로 질주했는데, 엉뚱한 취직 이후로 메시지만 주고 받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그리운 감상에 젖었다.
◀[어쩐 일로? 바쁘지 않아?]
[월요일에 연차 썼어!]
▶
그래서 주말에 만나자고 했구나.
나는 예솔이와 몇 번의 메시지를 더 주고받은 후 약속 시간을 확정했다. 이번 주 일요일 정오였다.
【“누구야?”】
“친구.”
【“친구가 있었어?”】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사교적이지.”
새벽 길드의 제라늄 같은 진짜 인싸한테는 밀리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부를 사람 하나 정도는 있다.
서로 죽지 못해 보는 악마들이랑은 다르게 말이다.
【“그런 게 아니라…… 됐다.”】
편애는 너무나도 정확한 말에 찔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불 안에 꾸물꾸물 기어들어가 엎드린 후 아공간을 열었다. PK한테서 얻어온 마법서를 볼 생각이었다.
[마법 입문자를 위한 마력 운용법과 계열 선택법]
PK가 건네고 편애가 보증한 이 책은 외부 차원의 가장 유명한 마법 입문서였다.
외부 차원은 마법으로 발전한 세계다보니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마법사는 몹시 드물지만, 누구나 생활 마법 정도는 쓸 줄 아는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외부 차원이다.
[I. 마나와 서클, 그리고 마력.
마나는 공기와 같다. 언제나 대기에 흐르고 있으며,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이다. 마법이 없던 과거의 마나 사용자들은 모두 수도자였으므로 몸 안에 쌓인 마나를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중세 이후 마법의 시대가 열리며 우리는 서클과 마력이라는 개념을 새로 정립해내었다. 서클은 몸 안에 쌓인 마나의 단위이며……]
첫 장 넘기자마자 정신 나갈 것 같은 정보의 파도가 몰아친다.
나는 종이 뭉텅이를 베개 위에 휙 던졌다. 가독성 없이 빽빽한 9포인트의 글자들이 날 미치게 했다.
“마법 쓰려면 이거 다 읽어야 해?”
외부 차원에서는 개나 소나 마법을 쓴다고 하지 않았던가. PK 같이 완전히 재능 없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다 마법을 쓴다고 했다.
절대 다수가 1서클이며 대부분 3서클의 벽을 넘지 못한다고 했지만, 분명히 사용할 수는 있다고 했는데.
【“마법 쓰고 싶으면 읽어야지.”】
“진짜?”
이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를 다시 들었다. 다른 과 전공책 보는 것처럼 생소하고 어렵다.
마나와 서클, 그리고 마력에 관한 이야기는 보고 또 봐도 낯설었다.
우리 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라 상상으로밖에 처리할 수 없는 점이 특히나 더.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은 과거 이 땅에 군림한 일곱 악마로부터 비롯되었다. 작은 빛을 만들어내는 마법에서 시작해 태양 바다 불 땅 달 하늘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영역에 닿을 때까지 마법이라는 학문의 탐구는 끝나지 않으며, 우리가 사용하게 될 마법들은 일곱 영역에 위치한 악마들의 특성을 모방한 것이다.]
작은 빛을 만들어내는 마법에서 시작해 악마들의 영역에 닿을 때까지. 영역을 침범당한 악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어떻게 하더라도 악마들의 영역에는 닿을 수 없다거나?
나는 의문점을 조금씩 새겨두며 페이지를 넘겼다. 나중에 편애가 다시 설명해줄 거라고 생각하니 읽기 쉬워졌다.
【“내가 왜?”】
“그러지 말고 좀 해줘. 넌 우리 집 악마잖아.”
불쾌한 녹색 눈으로 첫인상 스타트를 끊은 편애는 어느새 우리 집 악마로 모자라 우리 집 스마트폰이 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인공지능 AI던가. 어느 쪽이든 참 편리하다는 건 변함없다.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첫 번째는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는 강화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강화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1대 1 전투에 최적화 된 마법을 사용한다. 대부분 강화 탑이나 교만왕의 군단에 밀집되어 있다. 상징은 붉은 심장이다.]
교만왕의 군단. 나는 저번에 본 교만왕의 붉은 눈을 떠올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은 원소 마법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두 번째는 네 가지 원소를 다루는 원소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원소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가장 전통적이고 화려한 마법을 사용한다. 많은 원소술사가 원소 탑과 분노왕의 군단에 밀집되어 있으며 초반이 수월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입문하는 계열이다. 상징은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색 불꽃이다.]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색을 주홍색이라고 부르던가. 아까는 붉은색이었는데 이번에는 주황색이라. 그럼 다음은 노란색인가?
나는 작은 의문을 품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세 번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연금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연금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기존에 있던 것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뒤바꾸는 마법을 사용한다.
높은 상상력과 손재주를 요구하므로 입문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은 계열이다. 게다가 두각을 보이는 연금술사는 드래곤에게 납치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재능이 있다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은 황금빛 액체가 든 플라스크와 노란 망치이다.]
주황색 다음에 노란색이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는 내 예리한 감각에 감탄하며 까만 글자를 읽어 나갔다.
“드래곤이 여기서 나오네.”
은근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대놓고 나와 있다.
재능 있으면 드래곤이 납치해 간단다. 이러면 누가 이 계열에 입문하겠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쓴 거야?
【“아니지. 돈 없는 사람이라면 저 문구에 눈이 휙 돌 거야.”】
“왜?”
【“드래곤은 수많은 종족 중에서 가장 재물을 탐내는 종족이거든. 연금술사들이 돈 될 물건을 만드니까 그들을 데려가는 거 아니겠어?”】설명 잘하는 우리 집 악마가 이번에도 끼어들어 설명했다.
나는 두툼한 종이 위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설명이 뻥이 아니란 말이지?
이쪽에서도 연금술이라는 건 금을 만드는 기상천외한 짓이었으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드래곤한테 잡혀가면 노동의 대가로 돈도 줘?”
【“반대로 돈을 뱉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드래곤 조심 문구를 써둔 거구나. 오케이.”
저쪽 세계 드래곤은 들으면 들을수록 자연재해 같다.
오는 건 알 수 있지만, 피할 수는 없는. 잘못하면 아주 큰 피해를 보는 그런 자연재해 말이다.
그런데 저번에 탐욕왕한테 노란 눈이 억류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계약 못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베개 위에 턱을 올려두며 생각했다. 생각을 읽은 편애가 바로 대답했다.
【“맞아. 탐욕왕의 레어에 갇혀 있어.”】
자연재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자연재해가 아니라 깡패다. 심지어 자기보다 센 놈한테 덤비는 깡패였다.
나는 사자의 머리 위에 올라탄 생쥐를 상상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예상해보자면, 다음은 녹색의 무언가였다.
[II. 계열
마법의 일곱 계열 중 네 번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끔 만드는 환영 마법이다. 우리는 이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환영술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사람을 홀리고 그 정신을 뒤흔드는 마법을 사용한다.
환영 마법은 정신에 관련된 유일한 마법이니만큼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마법이 아닌 종족 특성으로도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닌 종족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몽마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환영술사는 몽마 종족이며, 그들은 몽마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색욕왕 휘하에 있다. 상징은 녹색의 거울이다.]
녹색의 거울. 녹색이라는 걸 보니 이게 편애에게서 비롯된 마법이 맞겠지.
나는 우리 집 악마의 특성을 흉내낸 마법을 더 알아보기 위해 페이지 전체를 꼼꼼히 읽었다.
[정신 계열 특성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배척 받아왔다. 남에 의해 기억이 뒤집히고 생각이 읽히는 감각은 몹시 불유쾌하며,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행해진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과거 녹색 눈의 악마가 이 땅에 군림하던 시절에도 그의 사제들은 많은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 이는 거의 모든 환영술사가 밀집되어 있는 몽마라는 종족도 마찬가지다.]
몽마. 나는 가면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잡았던 그 종족을 떠올렸다.
색욕왕의 영토에 들어서면 십중팔구 그 종족이 나왔다.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로 사람을 홀리는 말을 속삭였다.
[몽마의 주식은 정기인데, 이 정기를 빼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색욕왕이 나타나기 전의 그들은 노예와 다름없었으며, 현재도 은근한 멸시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탐욕왕 정기 대출의 금리만 봐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말을 줄인다. 요컨대 환영술사가 되고 싶다면, 이 모든 편견 앞에서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기 때문에 멸시받는 종족.
나는 베개를 밑으로 끌고 와 두 팔꿈치를 그 위에 올렸다. 베개를 밑에 깔고 종이 뭉치 위를 톡톡 두드리고 있자 편애가 말을 걸어왔다.
【“몽마한테 관심이 생겼어?”】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왜 페이지를 안 넘겨?”】
그러게. 왜 안 넘기고 있을까.
나는 까만 줄글이 가득한 종이 위를 손가락을 끝으로 문질렀다.
색욕왕은 몽마들의 왕이고,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환영술사였다. 아니. 색욕왕은 옛 영주이기도 했다니까 어쩌면 그 전 시대에도 가장 강력한 환영술사였을 수도 있겠다.
가장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자가 자신의 터전을 파괴하려고 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보다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왕.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나고 자란 차원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는 왕.
그 어떤 혁명가보다 더 폭력적인 혁명가가 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리해 있었다. 혁명가와 왕이라니. 정말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관계다.
“녹색 눈의 왕은 어떤 사람이야?”
교만왕의 일이 끝난 후, 극야가 함께 만나달라고 했던 왕. 그러나 지금까지 따로 말이 없는 왕.
색욕왕은 PK를 움직여 세상을 뒤흔들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목적을 이뤘다. 그리고 자신의 대의를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을 터였다.
【“녹색 눈의 왕은,”】
입을 뗀 편애가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는 가면을 만들기 위해 죽였던 수많은 몽마를 떠올렸다. 멸시받는 종족이 매 게이트마다 등장할 정도로 그리 많을 수 있던가? 보통 찾기 힘든 것이 맞지 않나?
색욕왕의 영토 정복도는 이례적으로 수치가 높았다.
지금까지 내 앞에 열렸던 대부분의 게이트가 색욕왕의 영토였다. 내 행동거지를 전부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모두가 말려도 한번 사랑한 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지.”】편애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후에 입을 딱 다물었다.
나는 종이에 얼굴을 처박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 장난치면 머리 나빠진다. 인간은 뇌에 산소가 돌아야 한다면서.”】
“그런 것도 알아?”
【“시체 수습하다가 궁금해서 찾아봤어.”】
누구 시체를 수습하다가 그런 걸 찾아봤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질문하려다가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