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PK의 뒤에 외부 차원의 왕이 있다. PK가 델리키아와 계약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걸 명령한 흑막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유를 알아내려면 흑막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정보가 아주 없는 거면 모를까, 이쪽은 이미 정보를 쥐고 있으니까.
【“누가 간섭한 건지 알면 그 목적은 알기 쉽지. 왕이란 것들은 제각기 특징이 있거든.”】탐욕왕은 더 많은 재물을 가지기를 원한다. 나태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할 만한 흥미로운 존재를 원한다. 교만왕은 끝나지 않는 꿈을 헤매며 언젠가 돌아올 친우를 그리고 있다.
만약 탐욕왕이 PK와 접촉했다면 그것은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함이고, 나태왕이 PK와 접촉했다면 그것은 PK를 흥미롭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교만왕은 잠들어 있으니 후보군에서 제외한다.
“말해 봐.”
【“악마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쪽은 아닐 거야. 옛 영주들일 수도 있겠지만, 봉인되어 있는 그들의 목적은 봉인을 풀고 몸을 되찾는 것이지. 그런 쪽으로 혼란을 불러오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야.”】
“누가 시켰어?”
싸한 정적이 이 집 현관을 가득 채웠다.
나는 계속되는 따랏따랏 땃따따의 파도에 휩쓸리기지 않게 애썼다.
왜 계속 저 노래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나 했는데, 저쪽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꼭 말해야 해?”
“응. 너처럼 사는 인간이 있어서 지구가 망하는 거야. 화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이쪽에 편애가 붙어 있다는 것을. 저번에 배후좌가 생겼냐고 물어본 게 그것과 관련이 있겠는데?
편애의 능력에 대처하고 목적을 위해 PK를 휘두른 왕.
세상에 인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PK여야 한 이유가 있을까. 편애에게 들킬 각오까지 하고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반대면 몰라도.’ 따랏따랏 땃따따의 바다에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PK는 퍽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 배후에 있는 그자는 나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어. 그래서 손을 잡은 거야.”
몬스터와 인간이 같은 것을 바랄 수 있을까. 나는 PK의 말이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더 알고 싶으면 네 배후좌한테 물어봐.”
“네가 내 배후좌를 어떻게 알아?”
“나는 모르지만 내 뒤에 있는 사람은 알지.”
내가 편애와 계약했을 거라고 예견까지 한 흑막.
그 흑막과 PK가 함께 꿈꾸고 있는 무언가. 점점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나는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라는 게 뭐야?”
진짜 이름도 숨기고 뒷세계에서 군림하는 것. 크레이터를 관리하고 무언가에 대비해 온갖 귀물을 끌어 모으는 것. 사람을 해치고 몬스터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이루려고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길래 너는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그저 궁금했다.
“나는.”
“…….”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PK는 흐리게 웃었다. 나는 그가 내게 물병을 던져 주며 한 말을 더듬어 물었다.
“특성과 마법이 없던 때로?”
“…….”
“게이트가 열리고, 다른 차원의 존재를 깨닫고, 세상이 뒤바뀌고.”
“…….”
“그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으로?”
지금은 기억 속의 모습으로만 남은 그때. 우리 차원의 존재만 알던, 지극히 평화로웠던 그 시절.
다른 종족 같은 건 모른 채로 인간끼리만 부대끼며 살던 그 시절 말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립고 소중한 시절이지만, 결국 돌아갈 수 없는 한때.
“왜?”
나는 입을 열어 질문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지만, 그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결국 과거일 뿐, 흘러간 시간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미안.”
PK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흐리게 웃었다. 그가 내린 것은 암묵적인 축객령이었고, 나는 수확 없이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녹색 눈의 왕.”】
아무래도 이쪽은…….
【“이번 일의 흑막은 색욕왕이야.”】
수확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 * *
여기 두 개의 세상이 있다.
이 두 개의 세상 중 하나에는 마나라는 자원이 있는데, 이 자원은 특정 개체의 재능을 일깨워 ‘특성’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부여한다.
이 특성은 종족 특성과 개체 특성으로 나뉜다. 종족마다 공통으로 가진 특성이 있고, 개체마다 따로 가진 특성이 있다.
마나에 트여 있는 종족은 하나 이상의 종족 특성을 갖게 되지만, 마나와 거리가 먼 종족은 종족 특성이 없다.
특별한 개체는 개체 특성을 가질 수 있지만, 이 또한 마나와 가까운 종족에게 부여될 확률이 높다.
특성에서 벗어나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마나가 있는 세상이고, 하나는 마나가 없는 세상이다.
마나가 있는 세상에는 마나가 깃든 개념이 자아를 가진 개체가 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마나를 다뤄 그 영역을 관리했다. 그 모습은 다른 종족의 눈에 마치 신처럼 보였고, 그들은 신으로 추앙 받았다.
이게 마나가 있는 저쪽 차원의 악마들.
마나가 있어 악마들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 차원에는 악마와 비슷한 존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차원은 마나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산업 혁명과 과학의 발달로 이루어 낸 인간 문명은 참 찬란하기 그지없다.
반대로, 마나가 있는 저쪽 차원은 마나를 이용해 마법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마법을 이용해 발전했고, 그 마법의 시초는 악마들이었다.
즉 마법을 더는 쓰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들이 사라져야 하고, 특성을 더는 부여받지 않기 위해서는 마나가 사라져야 한다.
감색 눈의 영역은 하늘, 자색 눈의 영역은 죽음.
한낱 생물이 하늘과 죽음을 없앨 수 있겠는가?
저것들은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과 마나를 동시에 없애기 위해서는, 【“두 차원의 융합을 막거나, 융합 중에 저쪽 차원을 멸망시켜야지.”】
“그거 참 놀랍네.”
【“융합을 막는다면 이쪽 차원에 유입된 마나가 고갈될 테니 언젠가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저쪽 차원을 멸망시킨다면 마나 자체가 사라질 테니 문제없고.”】하지만 두 차원의 융합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결국 색욕왕이 바라는 것은 본인 차원의 멸망인가.
인간인 PK는 과거가 그리울 수도 있겠다지만…… 본인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왕이라. 너무 의외인 나머지 생각을 잇기 힘들었다.
그런데 색욕왕이라면 세력 구도를 바꾸기 위해 옛 영주들의 봉인을 부수고 싶어 하던 것이 아니었나? 극야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교만왕의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걸 위해서 색욕왕이 차원 융합을 앞당기려고 하고 있다고.
설마 봉인을 부순다는 말이 봉인된 옛 영주들 또한 와장창 부숴 버린다는 소리였나? 세계 자체를 부숴 버리겠다고?
색욕왕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길래 자기 집이 나한테 털리는 걸 얌전히 보고만 있었을까. 왜 PK를 움직이고, 우리 차원에 간섭하는 걸까. 탐욕이 넘치는 탐욕왕조차 우리 차원에 직접 간섭하지는 않았는데.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 회귀자인 극야의 말이 편애의 말보다 설득력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야.”】
“그럼?”
【“두 개가 다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색욕왕의 목적은 저쪽 차원을 멸망시키는 거잖아. 차원 융합의 충격으로 봉인이 부서지면 저쪽 차원은 어떻게 되겠어?”】
“혼란스러워지겠지. 왕이 78명이라니. 완전 배틀로얄인데?”
왕이 7명밖에 안 되는 지금도 개판인데, 78명으로 늘면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겠구나.
꼴랑 한 명 앞에 서도 버티기 힘들었는데, 78명이 동시에 나와 데스 게임을 벌이기 시작하면 어떨까.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외부 차원이 멸망할지도 모르겠네.”
【“색욕왕은 그걸 노리고 있는 거겠지. 그 과정에서 저쪽 차원이 멸망하는 것을.”】편애는 이제 외부 차원을 외우주라고 부르지 않고 저쪽 차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도 우리 집 악마라고 불러줬더니 자기가 정말로 우리 집 악마인 줄 아는 모양이다.
【“아냐?”】
“아니. 맞지.”
너 말고 우리 집 악마가 또 있겠어? 너밖에 없지. 암, 그렇고말고.
【“알면 잘 해.”】
새침하게 대꾸한 편애가 한 번만 봐준다는 듯이 말했다. 스파이도 찾아낸 만능 악마인데 취급이 너무하긴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조금 더 잘해 줘야지. 나는 마음에 대충 새겨 두며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렇게 해서 색욕왕한테 좋을 게 뭐야?”
【“그게 무슨 뜻이야?”】
“자기 차원을 굳이 멸망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약간 악당이 되고 싶어 하는 타입이래?”
색욕왕…… 언급은 분명 많이 됐는데, 정작 본 적은 없다.
그 왕은 왜 자기 차원을 멸망시키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그 차원 토착민인 악마와 척이라도 졌나? 그래서 세상을 파괴해서라도 악마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가?
【“그게 아니지. 처음으로 돌아가 봐. 아까 그 인간이 바라는 것이 뭐라고 했지?”】
“마법과 특성이 없는 세계.”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 같은 소리하네. 내 말은 그 두 개가 없어져서 뭐가 좋냐는 뜻이잖아.
특성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난 이후로 세상은 바뀌었다. 특성이라고 불리는 이 힘은 여러모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마법은 특성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는 학문인데, 이걸 왜 없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차원의 과학 기술에 마법이 더해지면 굉장한 것이 탄생하지 않을까?
아니면 마법이 더 유용한 나머지 과학이 퇴보하려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이건 내가 과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그 말이 아니야.”】
“그럼 뭔데.”
【“너 마법 못 쓰는 드래곤 생각해 본 적 있어?”】
마법 못 쓰는 드래곤. 나는 저번에 본 탐욕왕의 화려한 미모를 떠올렸다. 편애가 그건 특성인 용언으로 바꾼 모습이라고 지적해 줬다.
“그럼 그냥 거대 도마뱀 되겠네.”
【“맞아. 몸집만 쓸 데 없이 큰 도마뱀이 되겠지. 마법 못 쓰는 엘프는 어떨 것 같아?”】
“귀 긴 인간? 예쁘고 귀 커다란 인간 되겠지?”
【“맞아. 대부분의 종족이 비슷한 수준이 될 거야. 그럼 마법 못 쓰는 몽마는?”】
“예쁘고 잘생겼는데 뿔이랑 날개랑 꼬리 달린 인간이 되겠지.”
그렇구나. 편애의 질문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럼 결국 색욕왕이 바라는 것은…….
“전부 평등할 수는 없어도, 대부분의 종족이 평등한 세상인가.”
녹색 눈의 왕은 어떤 세상을 그리며 그런 꿈을 품은 것일까. 편애는 녹색 눈의 왕이 몽마들의 왕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녹색 눈의 왕은 몽마겠구나.
순간 탐욕왕이 내건 어이없는 금리의 정기 대출이 떠오른다.
어쩌면 저 세상은 인간만 존재하는 이 세상보다 더 불공평하고 차별적인 세상일 수도 있었다.
엘프인데 정령 마법을 택하지 않아 별종 취급을 받았던 델리키아가 예시가 될 수 있겠네.
정말 이상적인 꿈이다. 나는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보았다.
[주말에 놀러 갈래?]
예솔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