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사건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남겨진 자들은 언제나 뒷정리를 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갔던 서울역 크레이터는 델리키아의 본진. 그녀가 마지막에 크레이터를 죄다 터뜨린 건 헌터들을 불러 모아 포식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내가 난입하면서 델리키아가 사망. 다른 크레이터에 들어갔던 헌터들은 물리치던 적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꼴을 보게 되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겠지. 뭔… 슬라임 같은 게 덤벼들어 사람을 잡아 먹길래 열심히 싸웠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아닌가.
사건의 전말은 서울역 크레이터를 파훼한 새벽 길드 측에서 알렸다.
지구 침공을 원한 탐욕왕의 전 군단장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키웠고, 그것 때문에 실종자가 늘었던 것이라고.
그리고 이전에 벌어진 크레이터 폭발 사건은 모두 그녀가 꾸민 짓이었으며, 이번 일도 그녀가 헌터들을 잡아먹으려고 꾸민 짓이었으나!
손가락테크닉이 나타나서 그녀를 물리치고 사라졌다고.
새벽 길드가 공표한 건 거기까지였다. 교묘하게 PK와 악마 둘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았다.
뭐, 확실히 악마가 지금 알려지면 좋을 일이 전혀 없긴 하지만…….
“진짜로 죽을 뻔했네.”
이 인간 이야기는 왜 쏙 빠져 있었는지 궁금하다.
얜 그냥 잡아가도 되는 거 아닌가? 대충 몬스터 학살 계획 가담죄 같은 거 붙여서 감방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PK의 임시 거처 소파에 드러누워 거실에 비치된 TV를 켰다. 그의 이번 임시 거처는 아주 평범한 아파트였다.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두 개 있고, 거실과 주방이 있는 아파트.
조금 전 한강에서 강제로 다이빙한 PK는 남극에 파묻히는 게 두려웠는지 특성을 쓰지 않았다.
특성도 안 썼는데 저렇게나 멀쩡하다니. 요즘 구조대 되게 빠르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잖아.”】
“쟬 살리겠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죽이면 아깝지.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거기서 죽어도 됐을 것 같아.”
【“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이번 일로 외계인인 걸 들킨 편애가 나를 나무랐다.
네가 지금 나보고 뭐라고 할 상황이야? 새벽 쪽에서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는데, 그것부터 걱정해야지.
【“그건 자색 눈이 알아서 할 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쪽 길드장 고생하네.”
길드에 네가정말좋아랑 편애를 같이 두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외계인이 아니었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조합이다.
“마실 거 줄까? 냉장고에 물 있어.”
“마실 걸 준다고 말하면 보통 차나 주스 같은 걸 내오지 않아? 물은 또 뭐야.”
냉장고 앞에 선 PK가 냉장고를 뒤적거리더니 물 한 병을 던졌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묶음 상품이었다.
“젊어서 단 거 많이 먹으면 나중에 당뇨 걸려.”
“내 특성을 생각하고 하는 소리야? 나랑 장난해?”
나는 생수 병 뚜껑을 따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긴 정수기도 없는 집에서 차를 바라다니. 컵라면 먹겠다고 커피포트라도 사 둔 게 가상하다.
“특성에 너무 의존하지 마.”
냉장고 문을 닫은 PK가 젖은 머리를 털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물었다.
“왜?”
“그냥. 어쩌면 예전처럼 특성이나 마법 같은 게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수건을 머리에 올린 PK가 머리를 탈탈 털었다.
나는 머리카락과 물방울을 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편애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특성과 마법이 없는 세상…….”】
“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속으로 계속 노래 가사를 중얼거리던 PK가 수건을 내렸다.
노래 가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따랏따랏 땃따따만 반복되는 그 가사는 듣는 사람 미치게 하기 딱 좋았다.
“따랏따랏… 이 아니라, 너 어떻게 여기 있어? 감방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새벽이 용케 안 잡아갔네?”
반서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지만, 하람과 비눗방울은 쟤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던데. 마지막에 본 하람은 뒤통수 깨져서 누워 있었지만, 일어난 후에 조치를 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비눗방울도 마리 씨가 얽힌 일이니 얌전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박살 난 순정 끝에는 피의 복수가 남았다. 나는 드디어 특성을 제어할 수 있게 된 비눗방울이 PK를 오체분시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가?
“새벽이라면 괜찮아. 아마 괜찮을 거야.”
PK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반지를 꺼냈다. PK가 내게 빌려 줬던 반지였다.
“알겠으니까 혹시라도 잡혀가면 나랑은 관계없다고 말해라. 그쪽에는 내 정체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서 껄끄러워.”
1공대에만 두 명이다. 반서준이랑 하람. 반서준…… 생각하자마자 체할 것 같다. 나는 이제 걔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어.
“물론이지. 너한테는 문제 안 생기도록 할게.”
반지를 받아 든 PK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거기까진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뚜껑을 닫은 물병을 소파 위에 굴리며 입을 열었다. 맡은 일을 해냈으니 이제 대가를 받아 낼 차례였다.
“마법은 어떻게 써? 네가 알려 준다며.”
이쪽에서 게이트를 열어 외부 차원으로 나가 보겠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거기에 필요한 게 마나를 축적해 서클이라는 걸 만드는 법이고.
마법을 알려 주겠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받은 반지를 손에 낀 PK가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에서 나온 종이 뭉치는 마법서라고 표현하기에는 참 미묘한 모습이었다.
[마법 입문자를 위한 마력 운용법과 계열 선택법]
표지에 써 있는 제목은 그렇지 않았지만.
“외부 차원의 마법서는 우리가 읽을 수 없으니까 문서로 작성해서 뽑았어.”
아공간에서 스테이플러를 꺼낸 PK가 종이를 잘 정리해서 건넸다.
아공간에 왜 스테이플러 같은 걸 넣고 다니는 거지. 물론 아공간에 베개랑 이불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걸 읽으면 마법에 입문할 수 있단 말이지? 나는 종이를 휘리릭 넘겨 보았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때? 내용은 확실해?”
【“입문서로 가장 흔한 책이군. 문제없음.”】
외계인의 오케이 신호도 받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차원 토착민이 말하는 거면 믿을 만하다.
나는 종이를 아공간에 밀어 넣고 대충 던져 둔 물병을 집었다.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걸 읽고 마법에 입문해 보려면 혼자 있는 게 좋겠지. 집에 가야겠다.
“가게?”
“응.”
물병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자 PK도 따라 일어났다. 나는 거실을 나와 신발장까지 걸었다. 편애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잊은 게 있지 않아?”】
뭘?
【“저 인간이 엘프 공주와 계약해서 얻은 게 뭐야? 저건 인간 중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개체 아니었던가?”】아까도 PK를 의심스러워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편애는 PK의 행동에서 따로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노란 눈의 특급 아이템은 귀한 물건이지. 하지만 이런 큰 문제를 야기하면서까지 그것을 탐낼 이유는 없어. 단순히 그것만을 위해 이번 일을 일으킨 거라면, 당장 연을 끊는 게 좋을 거다. 그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뜻이니까.”】모습과 특성까지 흉내 내는 신기한 반지. 모습을 감추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일이 많은 PK에게 아주 딱 맞는 반지였다.
하지만 반지를 얻기 위해 델리키아와 계약하는 건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일단 그는 인간이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인간 사회에 기생해 살아가는 버러지가 자신의 터전을 스스로 부술 리 있겠는가.
편애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자색 눈처럼 별을 건넌 것도 아니고, 미래를 보는 능력도 없어. 하지만 과거를 볼 수는 있지.”】기억을 보고 생각을 읽는 것.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과거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 영역은 저쪽 차원의 땅이야. 나는 이곳 태생이 아니니까.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가진 자들의 기억이나 생각은 읽지 못해.”】일정 수준이 어느 정도인데?
【“왕이나 그 오른팔 정도. 오해하지 마. 이쪽 차원이라서 한계가 있는 거니까. 저쪽 차원으로 가면 또 달라져.”】애쓴다.
【“정말이라니까?!”】
그래, 그래.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지. 나는 편애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저 인간의 기억 열람이 안 돼.”】
PK?
【“그래.”】
갑자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 그럼 PK가 왕이거나 왕의 오른팔 정도 되는 강자라는 말인가?
나는 현관에 붙어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포즈를 취했다. 편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PK가 내 기행을 보며 웃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
“……진짜야?”
실체가 없는 귀신보다는 몬스터가 더 무섭지 않나? 지금 네가 몬스터 짱이라는 추측이 나왔는데 너는 귀신이 무섭냐?
나는 닿지 못할 말을 삼키며 편애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쟤가 왕이나 군단장이라는 소리야?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그 정도 되는 강자면 진작 알아차렸을 거야. 그리고 왕은 눈 색이 정해져 있어.”】왕은 아니라는 소리구나. 그럼?
【“군단장도 아닐 거야. 마법에 깊게 파고들면 본질도 물들게 되니까. 단,”】단?
【“왕의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해 볼 수는 있지.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손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니까.”】왕의 손길이 닿은 인간. 나는 인간이 왕과 접촉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인간이 몬스터와 접촉한 경우는 있어도 왕과 접촉한 경우는 없는데. 왕과 비견되는 존재와 계약한 사람은 있다. 하마터면 배후좌에게 잡아먹힐 뻔한 하람 말이다.
배후 계약. 영혼을 묶어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끊을 수 없는 계약.
……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는 건 받는 입장인 인간뿐이다. 그 점을 알기 때문에 PK도 델리키아를 죽인 것이고.
그럼 델리키아를 죽인 PK는 지금 다른 몬스터와 배후 계약을 했는가? 나는 고개를 돌려 PK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원래의 라임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은 두 개 다 라임색이었다.
【“짚이는 게 있기는 한데, 정확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네가 한번 물어봐.”】편애가 이어 말했다. 나는 나보고 배후좌에게 빙의 당했냐고 묻는 PK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응.”
“델리키아랑 계약은 왜 했어? 반지 하나 때문에 한 것 같지는 않은데.”
PK가 표정을 굳혔다. 편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이 스스로 단서를 내뱉을 때까지.”】
지금까지 세 명의 악마와 대화를 나눴다. 녹색 눈, 감색 눈, 자색 눈.
지금까지 세 명의 왕과 대화를 나눴다. 나태왕, 교만왕, 탐욕왕.
“……일 끝났는데, 그게 중요해?”
저쪽 차원의 존재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신발장에 기대어 서서 말했다.
“어, 완전.”
악마 세 마리 나왔고, 왕 세 마리 나왔다. 그럼 이번 타자는 누구냐?
나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PK를 보며 경고했다.
“거짓말 하면 죽는다.”
무릇 세계 평화는 스파이 취조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