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반쯤 무너진 폐허에는 바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황금색 문양 위를 더듬거렸다. 처음과 비교해 눈에 띄게 색이 옅어졌다.
“방금 뭘 한 거야? 용언을 사용한 거야?!”
다급히 달려온 편애가 내 손목을 붙들고 물었다.
그는 손목 안쪽의 문양이 드러나도록 내 옷 소매를 위로 쭉 잡아당겼다. 사뭇 심각한 표정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인데?
“당연히 보통 일이 아니지. 드래곤은 강제로 영혼을 저당 잡고 대가를 받아 내는 존재들이니까”
아직 화끈한 감이 남아 있는 손목 안쪽에 편애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가는 손가락으로 문양 위를 지그시 누른 그가 구겨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혼을 저당 잡은 건 아닌데, 대가를 받아 가게 되어 있어.”
뭐라고? 영혼? 그때 잘못하면 일방적으로 영혼을 저당 잡힐 뻔했다는 소린가?
“영혼은 진짜 듣도 보도 못 한 소리거든? 그 정신 나간 용가리가 그런 걸 떠넘기고 갔단 말이야?”
“부여한 횟수를 전부 소모하면 대가를 받아 갈 거야. 이거 찍힐 때 들은 거 없어? 원래 말하게 되어 있는데.”
이 문양을 얻었을 때 들은 말. 들은 말…….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아, 그래. 분명히…….
‘이걸 네게 줄게. 너희 차원에 달이 두 개 뜨는 날, 돌려받으러 가지. 네가 그때까지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너의 승리고.’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겠다.’
찬연한 황금빛 후광을 두른 드래곤이 말했다. 이 문양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겠다고.
나는 탐욕왕이 한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뭘까? 온갖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는 드래곤이 탐내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지?
“네가 봤을 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뭐인 것 같아?”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범위가 너무 넓다. 차라리 내가 가진 물건 중 가장 귀한 것을 가져가겠다고 말했다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탐욕왕이 말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지? 물질적인 것? 아니면 누구에게나 하나씩 주어지는 것인 목숨? 그것도 아니면 재능이나…….
우리 집 악마? 나는 고개를 들어 편애를 보았다. 편애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댔다.
“뭐든 네가 생각한 건 아닐걸. 나 같은 건 가치 없어.”
“갑자기 왜 비관 모드야? 너도 가치 있는 악마야! 자신을 가져!”
“비관 모드인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체가 드래곤이란 종족에게 가치 없는 것이란 소리야. 너도 기계 햄스터보다는 살아 있는 햄스터가 더 가치 있을 거 아니야? 대충 그런 이치지.”
아, 그런 거였나.
하긴 편애와 악마들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똑같이 긴 시간을 사는 드래곤에게는 그들이 흥미롭지 않겠지. 언제까지고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인간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데, 오랜 세월을 사는 그들은 찰나에 스쳐 가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구나. 다른 종족의 관점에서 본 가치의 구분은 생각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럼 결국 그 드래곤이 탐내는 게 뭔지 지금은 알 수 없다는 거네.”
다시 한번 게이트 열고 그 동네로 가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알아 낼 방도는 없었다.
애초에 가장 소중한 것은 의미가 모호하지 않나. 그러니까 그 드래곤은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정하고 대가를 받아 갈 것이다.
“…….”
잠시 먼 곳을 바라본 편애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이 몹시 아련했다.
두 차원의 경계로 넘어간 과거의 유산은 2층이 마개조 당하는 거로 모자라 천장까지 날아가 버린 폐허가 되었다.
이 크레이터 드나드는 헌터들이 거점으로 활용하던 곳일 텐데, 이걸 날려 버리다니. 과연 악마 이름값을 하는구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뇌에 빠진 편애의 팔을 잡아 끌었다.
“집에 가자.”
말도 안 하고 외박하면 마님이 노하신다. 지금 들어가도 뭐 하느라 늦게 왔냐고 말할 텐데, 큰일 났네.
나가서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밖에 있을 새벽 4인방도 봐야 하고, 뒤통수 깨진 하람도 살펴봐야 하고. 할 거 천지였다.
“너는 네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두렵지 않아?”
잡힌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편애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잡은 팔을 놓으며 물었다.
“어떤 거?”
“너를 왕이라고 부르면서 달려드는 것들은 앞으로 더 많아질 거야. 악마뿐만이 아닌, 인간을 숭배하는 다른 종족이 나타날 수도 있어. 너를 견제하기 위해 수 쓰는 것들이 늘어날 거고, 몇몇은 널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어.”
편애는 더없이 진지했다. 농담을 던질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도 너한테 이 차원 지키라고 안 해.”
“…….”
“네가 하기 싫다고 하면, 자색 눈도 포기할 거야. 자색 눈이 이 차원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네가 이 차원의 존속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그랬었던가. 나는 편애의 진지한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른 지구인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가 뒤에서 열심히 뛰어다녀도, 인간들은 네게 감사하지 않을 거야. 네가 이 차원이 유지되기를 원하기 때문이 이 차원이 존속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겠지.”
“…….”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혼자 희생하는 거. 주인공만 빼고 모두 해피엔딩인 거.”
흔한 대중매체 속 이야기다.
주인공의 희생으로 주인공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주인공이 오래토록 회자되는 거.
그리고 언젠간 잊혀지고 마는 이야기.
“맞아. 나 그런 거 싫어해. 솔직히 지구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살다 보면 세상이 바뀐다. 10년 전과 지금은 정말 놀랄 만큼의 차이가 있다. 산에서 10년 살다가 문명 세계로 내려오면 이게 다른 차원인가 싶을 만큼 세상이 바뀌어 있을 거다.
지구도 그렇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융합될 뿐인데. 사는 데도 별 문제는 없을 테고…….
아, 갑자기 왕이 살아 숨 쉬는 과거로 돌아가긴 하겠구나.
“근데 우리 엄마가 좋아하잖아. 지금처럼 평화로운 세상에서, 둘이 같이 이렇게 사는 게 좋다잖아.”
정말 평범하게 사는 것.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밥을 먹고, 저녁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는 삶. 뉴스나 드라마를 보면서 잡담을 나누고, 주말마다 대청소를 하고, 특별한 일 없이 팔짱끼고 외출하는 삶.
“그래서 하는 거야. 소중한 사람이 바라니까, 나도 바라는 거야.”
소중한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다.
이 금 간 유리잔같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지 않더라도 당신이 바란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내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건 언제라도 이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거잖아.”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차원은 합쳐진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왕이라는 이름과 쏟아져 나오는 외계인들.
지금 상황은 누덕누덕한 헝겊 조각 같았다. 헌터들은 지구의 평화를 위해 뜯어지기 직전인 그 헝겊 조각을 깁고 있는 거고.
“일단 열심히 막아 보다가, 끝내 그날이 오면 집에 가야지. 이번에는 손을 꼭 잡고 있을 거야.”
차원이 합쳐지고 세상이 바뀌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다시는 헤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있어야지.
바뀐 세상에서도 어떻게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세상이라도 좋았다.
“그거야.”
편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소중한 것.”
그의 녹색 눈이 먼 곳을 보듯 흐려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문 채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꽉 잡고 있어. 또 한 번 후회하지 않도록.”
무너지기 직전인 옛 유산의 폐허에서, 녹색 눈의 악마가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이번에는 돌아갈 곳을 잃지 말라고.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꽉 붙잡고 있으라고. ‘또 한 번’ 후회하지 않도록.
이것 또한 나는 모르고 그들은 아는 무언가겠지. 이제는 대체 언제쯤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게 될지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래.”
밤이 오고 있었다.
* * *
악마를 소환해 왕이 되고자 하였던 델리키아는 결국 악한 인간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남몰래 품은 사랑이 빚어낸 대참사라고 할 수 있겠다. 편애는 이 비극적인 로맨스에 간결한 코멘트를 남겼다.
【“괜히 타종족 간의 사랑을 배척하는 게 아니라니까.”】번식 문제 외에도 종족별 특성이나 관습이 다른 종족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모양이다. 가치관 같은 것도 다르고.
근데 이쪽은 가치관보다는… 그냥 PK가 나쁜 인간이라 그런 거 아닌가?
물론 PK를 소유물 취급하고 그를 소환해서 묶어 두려던 공주도 잘한 건 아니다.
그녀는 우리 차원을 침략하기 위해 온갖 수를 쓴 데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근데 PK가 한 짓이 너무 독보적이라서 그쪽이 더 문제 같다고 해야 하나.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이었다. 이를테면 타지도 않는 쓰레기.
바람이 분다.
나는 마포대교 난간 위에 올라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대충 걸친 두꺼운 후드가 바람에 마구 펄럭거렸다.
“진짜로 던질 거야? 진짜로?”
양심이 뒈진 인간이 난간을 꽉 붙잡고 바둥거렸다.
마포대교 난간에는 사람이 기어오르지도 못하도록 빙글빙글 돌아가는 철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 특성 앞에서 이런 건 별거 아니죠. 나는 공공기물을 부수고 더는 돌아가지 않게 된 철조물에 올라섰다. 반서준이 보면 기함할 모습이었다.
그렇게 연출된 게 지금의 우리.
“이 대낮에 인형탈 쓰고 뭐하는 거야. 우리 내려가서 이야기하자. 저기 저 사람이 경찰에 신고하고 있잖아.”
“응. 조용히 해.”
“제발.”
허리를 붙잡혀 매달린 PK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나는 철조물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말했다.
“닥쳐.”
그동안 쭉 생각해 봤는데, 이 자식은 세상에서 사라져 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인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권선징악은 내 취향이 아니긴 한데, 이번 일은 조금 심했다. 하마터면 악마 때문에 나라 망할 뻔하지 않았던가.
“거기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내려오세요!!”
경찰이 벌써 출동한 모양이다. 목청 크게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나는 반가면 위에 덮어 쓴 곰돌이 인형탈을 확인한 후에 한쪽에 끼고 있던 PK를 높이 들어올렸다.
삑삑대는 호루라기 소리, 제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내 팔을 꽉 붙잡는 PK, 그리고 대낮의 소동에 기웃기웃 구경 중인 사람들.
“이번 일이 끝나면 널 한강에 다이빙시키기로 결심했지.”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원래는 남극에 파묻어 버리려고 했어.”
“…….”
싸늘한 바람이 분다. 나는 한결 조용해진 PK를 한강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특성 써서 기어 올라오면 진짜로 남극에 파묻어 버린다.”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지 입술을 뻐끔거리던 PK가 그대로 한강에 고속 낙하했다.
나는 달려오는 경찰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피해 도주했다.
길고 길었던 실종 사건의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