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한 사람의 영웅에서 수많은 사람의 영웅이 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일을 겪었다.
나는 나를 영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누구보다 영웅 같은 사람이 나를 그의 영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깐 내가 싫다면서?”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건 내 특기인데. 전에 내가 정말 싫다고 말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진짜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네.
“그건,”
내 지적에 자기도 찔리는 점이 있었는지, 반서준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말이 쉬이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수습을 위해 입부터 연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싫은 게 아니라 내 행동이 싫은 거겠지.
언제나 사람들을 다 보내고 마지막에 홀로 남는 점이, 정체를 숨기겠다면서 숨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정도로 허술하게 사는 면이,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굴면서 일 터지면 언제나 발에 불나게 뛰는 모습이.
그런 게 싫은 거겠지.
나는 반서준의 어지러운 속내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언제나 날 홀로 남겨 두지 않기 위해 강해졌고, 내가 원하는 대로 정체를 숨기고 지낼 수 있게 뒷수습했다.
나를 서포트하기 위해 팀을 꾸렸고,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팀만으로도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노력이 가상하다.
다만 의문점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지.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내가 그의 목숨을 구했던 것은 마침 일이 딱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니면 저 인간도 지금쯤 자기 친구들처럼 저승에 가 있겠지.
고작 몇 번의 구원 따위가 사람을 그토록 헌신적이게 만들 수 있는가? 이 무슨 로맨스 판타지식 스토리 전개란 말인가.
“하람을 잘 관리하는 게 좋을 거야.”
현실과 소설의 괴리는 상당하다.
나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주의나 주기로 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하람의 이름에 반서준이 속으로 의문을 표하는 게 들렸다.
“배후좌는 대가 없는 선행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야. 그들은 계약자에게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과 계약한 거야. 그리고 하람의 배후좌는 현재 봉인된 상태라 움직일 수 없지.”
“그 말은…….”
“조금 전에 하람을 불러 세울 때, 남은 눈마저 보라색이 된 걸 봤어. 하람의 육체를 빼앗은 거야. 한 번 성공했으니 계속해서 시도하려고 하겠지.”
육체를 되찾은 과거의 지배자가 할 일은 뻔하다. 자신의 봉인을 풀기 위해 수를 쓰겠지. 하람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다.
가장 좋은 건 내가 옆에서 감시하다 똑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처럼 잠재우는 거지만, 내가 맨날 하람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람을 조심해. 언제 다시 몸을 빼앗길지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편애와 하람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눈을 감은 채로 깨어나지 못한 하람이 보인다. 분명히 편애 보고 깨우라고 말했는데, 일부러 안 깨운 건지 아니면 못 깨운 건지.
일단 계속해서 감색 눈의 악마가 떨어진 싱크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아 쉽게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알아서 잘하겠지. 나이가 있으니까 노하우도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우리 집 악마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편애랑은 맨날 말하지만, 반서준이랑 얼굴 보고 말할 기회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박물관은 왜 지었어? 죽을래?”
남이 먹다 버린 쓰레기 모아 두는 미친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냐? 스토커도 아니고.
나는 반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반서준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누가 칠칠맞게 신상을 다 흘리고 다니길래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사람이 길바닥에 쓰레기 좀 버릴 수 있지. 장난해?”
“멀쩡한 쓰레기통이 있는데 왜 길바닥에 버리지? 난 과태료 안 물게 해 준 거야.”
반서준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듯 나를 봤다.
너 이 자식, 방금까지만 해도 나보고 영웅이라며. 너는 네 영웅을 쓰레기 취급 하냐.
“영화랑 다큐멘터리는?”
“업적 홍보 차원에서 제작했지.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으면 백천 길드 쪽에서 뿌리는 찌라시에 묻히니까.”
“내가 반가면 쓰고 들른 곳은 왜 샀는데?”
“그야 자취를 남기고 갔으니까. 누가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지만 않았으면 안 샀겠지.”
반서준의 반반한 낯짝이 슬슬 구겨지기 시작했다.
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누가 흘리고 다녔다고. 누가 칠칠맞다는 거냐.
“영웅 타령하던 새끼 어디 갔냐? 죽었어?”
“이런 소리 듣기 싫으면 평소에 잘하던가. 조금만 신경 썼어도 이 정도까지는 안 했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그가 이죽거렸다. 나는 뒷목 잡고 싶은 심정으로 계속 따지고 들었다.
“그럼 팬클럽은 뭔데. 이것도 관리 차원이야? 이름 존나 구린 그거 있잖아.”
“팬클럽은 그냥 팬심. 이름은 들을 때마다 후회 좀 하라고.”
“이게 죽으려고.”
이 새끼 미쳤나. 남을 놀리면서 즐기고 있네.
나는 저 인간 뒤통수를 깨고 싶은 심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기껏 살려 둔 걸 내가 죽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참자, 우 선생.
열 받았더니 머리가 아팠다. 반서준은 이 상황이 퍽 즐거운 것처럼 웃었다.
“농담이야. 이름이 특이하면 다들 기억하기 쉬울 테니까 그랬을 뿐이야.”
단정하게 웃는 얼굴이 넘치는 불만을 단숨에 잠재울 만큼 위력적이었다.
이건… 극야나 네정좋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편애의 말처럼 내가 껍데기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갑자기 차분해진 걸 느끼니 부정할 수가 없네. 저번에 말한 것처럼 자연의 법칙이다.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생각이었다.
“나를 왜 믿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데.”
“말 그대로 나를 왜 믿냐고. 내가 너를 확신케 하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마지막까지 남기 때문에?”
뒤에서는 낙원 놈들한테 낚여 인류를 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뭔가 하고 있다지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뭘 보고 나를 믿는 거지? 나는 궁금했다.
“난 영웅이 아니야. 네 생각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선량한 사람도 아니지. 어쩌면 너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렇게 존경할 사람이 못 된다는 의미지. 네 신념을 관철하고 싶다면 내게서 확신을 얻지 마.”
다른 사람을 보고 삶의 이정표를 세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그 누구도 그 길이 옳고 틀리다고 말해 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는 나를 의심해야지.”
뒤편에서 바람이 불었다. 나는 흔들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반서준의 하늘색 눈을 응시했다.
검은 동공에 반가면을 쓴 내 모습이 비친다. 하람처럼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너는 내 진짜 모습을 보는 사람이잖아.”
싱크홀 위로 기어 올라온 괴생명체가 이쪽으로 돌진했다.
나는 아공간을 열어 델리키아의 양산을 꺼냈다.
펼쳐진 양산에 부딪힌 괴생명체가 거칠게 튕겨 나간다. 산산조각 나며 흩어진 그것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상을 갖췄다.
나는 사용한 양산을 접어 반서준에게 내밀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오면, 네가 죽여.”
언젠가는 하람처럼 몸을 빼앗기게 되는 날이 올까? 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인간이 아닌 것들과 어울리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지. 상황은 언제나 바뀌고 사람의 마음은 변칙적인 것이라서, 나는 혹시라도 올 그날을 위해 안전장치를 걸어 두었다.
“그래.”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가치 있는 법이다. 나는 내 눈을 믿었다. 결연하고 굳건한 저 하늘색 눈을 믿었다.
까마득한 땅 밑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악마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반서준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인상을 쓴 편애가 손을 까딱이자 땅이 훅 파이며 지반이 붕괴된다. 흔들리는 땅 위에 선 감색 눈이 킬킬 웃으며 마법진을 그린다.
마법진에서 또 다른 생물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감색 눈의 이마 근처에서 녹색 스파크가 튀었다. 편애는 쏟아지는 공격에 땅의 지형을 바꾸며 차근차근 대응했다.
나는 편애의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하람을 주워 반서준에게 넘겼다. 랑이 비눗방울을 챙겨 나갔는지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건물이 진작 무너지지 않은 것은 편애가 손을 쓰고 있기 때문일 터.
“먼저 나가.”
“당신은?”
“저기서 싸우고 있는 게 내 배후좌…… 같은 거라서. 일단 남아야 할 것 같은데.”
편애 혼자 두고 나만 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나는 인상을 쓴 반서준의 등을 밀어 댔다. 반서준은 구길 대로 구긴 미간을 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완전히 으깨지고도 살아 있더니, 역시 인간이 아니었군.”
“어어, 그렇지.”
“저 얼굴, 낙원 소속으로 아는데. 그쪽 길드장도 알고 있나? 자기 길드원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그쪽은 길드장부터 인간이 아닌데. 나는 반서준의 말에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극야마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완전 기절초풍이겠지. 나도 처음 알았을 때 그랬으니까.
“일단 나가. 하람부터 건물 밖에 던져 버려.”
나는 반서준을 문 밖으로 팍 밀어 버리고 등을 돌렸다.
상황이 개판인 걸 인지하긴 했는지 반서준은 퍽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하긴 상황 파악 못 하고 나대는 타입은 아니었다.
두 악마의 싸움이 이어진다. 두 사람의 싸움은 뭐든지 뚫는 창과 뭐든지 막는 방패 같아서, 어느 한쪽에게 승기가 기울 기미가 안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완전히 망가진 무도회장 안을 둘러보다 버려진 델리키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허리띠에는 아직 악마를 부르는 책이 걸려 있었다.
악마를 부르는 방법이 있다면, 악마를 쫓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나는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며 델리키아의 시체 앞까지 다가갔다. 엉망이 된 그녀의 허리띠에 손을 뻗자 시체가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번쩍 떴다.
‘안녕?’
목에 칼이 꽂혀 말하지 못하는 시체가 웃는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동시에 허리띠에서 뽑혀 나온 책이 바닥을 구른다.
와, 방금 놀라서 조상님 보고 올 뻔했다. 심장이 바닥에 쿵 떨어지는 거로 모자라 지하까지 내려갔다 왔다.
단순히 놀리는 게 목적이었는지, 델리키아의 시체가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게 보였다.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위를 꾹 누르고 재빨리 책을 펼쳤다. 책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었다.
당연했다. 이건 외부 차원의 물건이었다. 애초에 PK가 이걸 델리키아에게 넘긴 이유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광소를 터뜨리는 감색 눈과 얼굴을 굳힌 편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없나?
뭔가 이 상황을 종식시킬 만한 게 필요했다. 저 미치광이를 외부 차원으로 보내 버릴 무언가. 바깥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무언가.
“게이트…….”
그래. 게이트를 열어야 했다. 나는 너덜거리는 책을 꽉 쥔 채로 입술을 뗐다.
“게이트를 열어!! 다른 차원으로 보내!!”
내 외침에 편애와 감색 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손목 안쪽이 이유 없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더니, 눈이 멀 것만 같은 금빛 광채가 쏟아졌다.
놀란 토끼같이 눈을 뜬 편애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히죽이는 얼굴의 감색 눈의 악마 뒤로 황금색 게이트가 생기더니, 그의 몸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삐이이이- 알 수 없는 이명 때문에 귀가 먹먹하다. 나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깐 달아올랐던 손목 안쪽을 보았다.
황금색 용 문양이 조금 더 옅어져 있었다.